재앙의 시작은 자만심이었다
  • 도쿄· 채명석 편집의원 ()
  • 승인 1995.02.16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일본 ‘완벽한 안전 대책· 관료의 우수성’ 과신해 지진 피해 커져

5천여 인명과 10조엔에 이르는 재산을 앗아간 일본의 대지진은 바다 건너 일이 아니다. 78년 이후 진도 5.0 이상인 지진을 네 차례나 경험한 한국도 결코 지진 안전 지대는 아니다. 한국에서 일본과 같은 비상 사태가 돌발할 수도 있다.

한국 정부는 그런 사태에 대비해 일본에 조사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고베(神戶)의 복구 상황과 일본 정부의 위기관리 체제에서 어떤 교훈을 찾아보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정부 조사단이 선입관을 가지고 현지를 방문한다면 얻을 교훈은 몇가지 안될 것이다. 그것은 홍수처럼 쏟아진 지진 관련 보도가 현실과 동떨어진 면이 있기 때문이다.

‘시민은 침착, 행정은 무능’. 이것은 <아사히 신문>이 지진 발생 6일 뒤 해외의 반응을 요약한 기사의 제목이다. 사실 이번 지진 보도에서 해외 언론들은 고베 시민들의 침착· 냉정한 대응에 아낌없이 찬사를 보냈다.

해외 언론들은 도 고베 시민들의 그런 침착성과 냉정함이 집단에 대한 귀속 의식과 화(和)를 중시하는 정신(<조선일보>), 선천적인 민족성과 후천적 교육 훈련(대만 <중앙일보>), 동양인의 체념감(프랑스 <르 피가로>)에서 나왔다는 해석을 덧붙였다. 일본 언론들은 이런 해외 보도를 모아 ‘침착한 대응이 해외에서도 감동을 불러일으켰다’고 보도했다. 노다 마사키(野田正彰)라는 작가는 질서정연한 고베 시민들을 격찬하면서, 그들을 ‘피난민’이 아니라 ‘피난한 시민들’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자도 고베를 취재하면서 그런 감동적인 장면을 몇 차례 목격했다. 하지만 기자는 점차 그런 일방적 보도에 큰 의문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현지에서 본 고베 시민들의 무표정한 모습이 그런 의문을 갖게 했다. 예를 들어 이번 한신 대지진의 진도는 처음에 6이라고 발표됐다가 7로 수정됐다. 하지만 지진을 직접 체험한 고베 시민들에 따르면, 피부로 느낀 진도는 그 두배가 넘었다고 한다.

또 지진 첫날부터 고베 시 일대에는 끊임없이 여진이 휘몰아쳤다. 자기 목숨도 지키기 어려운 상황에서 남의 집을 털고 이웃 상점을 약탈할 여유가 있었겠는가. 이번에 지진과 화재로 폐허가 되다시피 한 고베 시 나가다 구 출신 다카미 유이치(高見裕一) 중의원 의원은 TV 아사히와 가진 인터뷰에서 관재(官災)와 지재(地災) 대문에 피해가 더 컸다고 주장했다. 관재란 관료들의 부처 이기주의 대문에 지진 대응이 늦어졌다는 뜻이고, 지재란 지역 주민들의 비협조 대문에 인명 피해가 늘었다는 얘기다. 그는 집에서 잠을 자다 지진을 겪었다고 한다. 다행히 큰 부상은 없었기에 폐허가 된 주택지에서 인명 구출 작업을 벌였으나, 지나가는 젊은이들이 멀거니 바라볼 분 작업을 거들려는 사람은 없었다고 한탄했다.

물론 39초 간의 지옥 같은 격진이 그런 무관심을 유발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 의미에서 지진 초기 단계에서는 고베 시민들이 남을 돕거나 해칠 기력조차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좀도득 극성, 상점 약탈하기도

실제로 복구작업이 개시된 1월19일 이후 고베 시에는 온갖 유언비어가 떠돌기 시작했고, 좀도둑이 늘어나 주민 스스로 자경단을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일본 언론들은 그즈음 한국의 한 일간지가 보도한 ‘72년 전 6천명의 동포를 살해한 일본인들이라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는 표현을 인용했다. 물론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유언비어는 없었으나, 외국인 절도단이 나타나 가재도구를 훔쳐가고 있다는 헛소문이 그 무렵부터 떠돌기 시작했다.

1월21자 <아사히 신문>은 이런 좀도둑이 성행하기 때문에 주민들이 자경단을 조직하기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또 <주간 아사히> 최근호는 지진 발생 1주일 동안 도난 사고가 3백54건 있었다고 보도하고, 실제 도난 건수는 그 몇배에 달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주간 문춘> 또한 지진 발생 이틀 뒤인 1월19일 나가다 구에 있는 24시간 편의점 ‘로손’이 주민들에게 약탈당하는 사진을 실어 충격을 주었다.

일본인들의 질서 의식을 강조하는 보도에도 현실과 거리가 먼 점이 없지 않다. 물론 질서 정연하게 보이는 피난소 생활, 정· 관· 재가 일치단결하여 복구 작업을 펼친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지만 교통 체증으로 재해가 확대되었다는 사실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소방차와 자위대· 구호물자 수송 차량이 교통 체증으로 제 구실을 못했다는 비난이 많다. 일본 공영방송 NHK는 지진 발생 첫날 한 트럭 운전사와 가진 인터뷰를 방영했다. 그 트럭 운전하는 한신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지진이 발생하자 그는 방향을 고베 시로 바꾸었다. 지진 현장을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호기심 때문이었다. 이런 ‘야지 우마(불구경꾼)’ 때문에 오사카에서 고베 시로 들어가는 2호 국도는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가 10시간 이상 걸리는 머나먼 길로 돌변했다.

 

일본의 ‘4대 신화’ 무너지다

그뿐 아니다. 고베 시 인근 오사카 후(府) 지사는 지진 발생 이틀 후 고베 시민들을 이렇게 매도했다. “쌀과 부엌이 있으면 스스로 밥을 지을 수도 있는데 그들은 그럴 마음이 없다.” 더욱이 오사카 시장은 “피난민들이 전부 오사카로 밀려오면 곤란하다”며 이른바 혼네(속 마음)를 공개 석상에서 피력했다.

KAL기 격추 사건 등을 집중 취재한 유명한 논픽션 작가 야나기타 구니오(柳田邦男)씨는 최근 발매된 <제군> 2월호에서, 이번 지진으로 일본의 안전 신화 3개가 무너졌다고 지적했다. 즉 간사이(關西) 지방에서는 대지진이 일어나지 않는다. 일본의 고속도로는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다. 신칸센은 아무리 큰 지진에도 끄떡없다는 신화이다.

하지만 이런 물리적 안전 신화보다 더 큰 타격을 입은 것은 일본 관료들이 우수하다는 ‘관료 신화’이다. 통산성 관료시절 석유 위기를 예언한 것으로 유명한 작가 사카이야 타이이치씨는, 천재가 인재로 변한 것은 일본적 ‘잔토이즘(철두철미주의)’탓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일본의 안전 대책이 기준주의, 즉 어떤 기준을 정해 놓고 그에 따르도록 하는 관료 통제 방식이어서 지진으로 인한 피해가 훨씬 커졌다고 주장한다. 반대로 ‘비용 대 효과’나 안전 효율을 중시한 확률주의 행정을 펼쳤다면 ‘지진대책 선진국’으로서 희생자를 5천여 명이나 내지는 않았으리라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분명히 일본 관료 집단은 어떤 기준이나 목표가 정해졌을 때 이를 꼼꼼히 수행한다는 점에서 우수하다. 그러나 이런 기준이나 목표가 없으면 방향 감각을 잃은 거북이나 마찬가지다. 지진이 발생하자 일본 관료들은 편람이나 전례를 찾다가 귀중한 시간만 허비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정치인도 마찬가지다. 구조 대책이 늦어짐으로서 피해가 늘어났는데도 아무도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다. 와타나베 미치오(渡邊美智雄) 전 부총리는 자위대가 좀더 빨리 출동했더라면 수백명은 더 구조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작가 카렐 반 월프렌은 <일본 권력구조의 수수께끼>에서 ‘책임을 공유한다는 일본적 시스템은 곧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시스템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지진 발생 두달 전에 출판한 <인간을 행복하게 하지 않는 일본이라는 시스템>에서, 일본의 시스템은 국민을 조종하는 데 가장 세련된 시스템에 불과하다고 지적하고, 일본 국민은 오로지 그런 시스템의 유지· 확대를 위해 존재할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번 지진으로 일본이라는 신화는 크게 무너졌다. 경제 번영과 더불어 부풀어 오른 자만심의 결과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일본의 지진에서 얻을 유일한 교훈은 ‘자만심은 곧 큰 재앙을 가져온다’는 사실이다.

- 도쿄· 蔡命錫 편집의원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