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세꺾인 ‘이슬람 천국’의 꿈
  • 파리·진철수 유럽지국장 ()
  • 승인 1992.03.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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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리에 검거선풍…회교근본주의자들, 게릴라 전투로 대응 조짐

 “우리가 선거를 중단시킨 것은 민주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였다.” 지난 2월16일 외국 특파원들과 회견하는 자리에서 알제리 지도자 모하메드 부디아프 국가최고회의 의장이 한 말이다. 이말은 민주주의를 짓밟고 강권정치를 펴는 사람들이 흔히 흘리는 궤변의 되풀이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궤변이라고 단정해 버리기에는 알제리의 상황이 너무 착잡하다.

 알제리 정국이 급전직하로 악화하기 시작한 것은 작년 12월26일 총선거의 1차 투표가 실시되었을 때이다. 이 선거에서 원리주의 회교신자들의 정치조직인 이슬람 해방전선(FIS)이 예상밖의 대승을 거둔 것이 탈이었다. 집권당인 민족해방전선(FLN)은 15석 밖에 못 얻었는데 반하여, FIS는 거뜬히 1백88석을 차지했다. 의석수가 4백30석인 회의에서 다수당이 되기 위해서는 2차 투표에서 불과 28석만 더 얻으면 되었다.

 알제리 독립전쟁의 주역인 FLN은 30년간 일당통치를 펴오다가 2년전에야 비로소 복수정당제를 도입하였으며, 이번 총선거를 통해 민주화의 길로 나가려던 참이었다. 선거 결과에 불만이 있더라도 존중하는 것이 민주주의 도리이다. 그러나 FIS의 반대세력이 지적하듯이 FIS가 알제리도 이란처럼 ‘이슬람 국가’가 될 것을 주장하고 있는데 문제가 있다.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회교 통치체제를 지지하는 세력에게 정권이 넘어가도 그것이 민주절차에 의해서라면 상관없다는 말인가.

 아무도 시원한 답변을 하기 힘든 이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알제리 군부는 2차 투표예정일을 며칠 앞둔 1월11일 쿠데타를 단행했다. 2차 투표는 취소되고 13년간 집권해온 샤들리 벤제디드 대통령은 물러났다. 대통령 권한은 5인 국무위원회가 대행키로 되었다. 30년간 모로코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노정객 부디아프를 불러들여 국무위원회 대표로 앉혔다. 그러나 실권자는 군부를 대표하는 국방장관 칼레드 네자르 장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디아프의 공식지위는 6명으로 구성된 최고안보위원회라는 기구의 멤버이다.

 FIS측은 군부의 강경자세를 경계하여 정면 충돌을 피하고 신중한 자세를 보였다. 그러나 전국 각처에서 FIS계 청년들과 군인들 또는 경관들이 충돌하는 사건이 산발했다. 지난 2월9일 군부는 치안유지의 목적을 내세워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국제사면위원회의 보도에 따르면 약 2주일 간에 민간인 70명이 사망했으며 약 5백명이 부상했다고 되어 있다.

민간인 70명 사망, FIS계 청년 강제수용
 FIS계 성직자들에 대한 검거 선풍이 불어 적어도 40명이 잡혀들어갔다. 부디아프는 또 FIS계 청년들 약 6천명이 강제수용되었다고 직접 밝혔다. 이들을 수용하기 위한 집단 수용소가 알제리 남부 사하라 사막 쪽 다섯 군데에 설치되었다. 이들의 수용기간은 1년쯤 될 것이라고 보도되고 있다.

 부디아프는 앞으로 2년 내에 선거가 다시 실시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 각처에 불고 있는 민주화 바람에 따라 아랍 국가로서는 드물게 시도된 알제리의 민주주의 실험이 일단 수포로 돌아간 것만은 틀림없다.

 알제리는 면적이 2백38만㎢ 되는 비교적 넓은 나라지만 85%가 사막이어서 경지면적은 많지 않다. 그러나 석유뿐 아니라 가스도 보유하고 있어 천연자원은 풍부한 편이다. 문제는 국제 원유가격이 떨어진 데다가 FLN의 30년 사회주의 정책 밑에서 경제발전이 별로 이루어지지 못한 데 있다.

 FIS가 12월 선거에서 대승한 최대요인도 경제부진에 있었다. 실업률은22%, 인플레는 연간 2백%. 인구 2천5백만명 중 75% 가까이가 30세 미만인 상황에서 청년층의 실업률은 곳에 따라 40%에 달하고 있다.

 FLN의 마르크스주의 노선에 싫증난 유권자들을 끌기 위해 서구식 민주주의나 사회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야당들도 생기긴 했지만, 실의에 찬 유권자들의 가슴에 열기를 불어넣어주는 원리주의 회교세력의 힘은 날이 갈수록 클 수밖에 없었다. 또 작년 걸프 전쟁을 계기로 아랍 민족주의가 자극받은 것도 FIS에 대한 지지도를 높여놓았다.

 한편 12월 선거에서 FIS를 지지한 유권자들이 모두 ‘이슬람 국가’ 건설을 희망하여 투표한 것은 아니며, 그중 상당수는 집권당의 경제 실책과 부패에 항의하는 뜻에서 최대 야당인 FIS에 표를 던졌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뿐 아니라 알제리의 회교신자들은 이란이 ‘시어’파인 것과 달리 ‘수니’파여서 덜 과격한 편이며, FIS는 사기업의 자유를 인정하며 중소기업 육성에도 관심이 있다는 것을 표시하고 있으므로 만약 집권할 경우에도 과거의 이란처럼 과격한 반서방 정책으로 일관할 것인지는 의문이라는 관측도 있다.

“언제까지 민주주의를 뒤로 돌려야 하나”
 그러나 알제리의 FIS도 근본적으로는 원리주의 회교운동이 가지고 있는 종교 우선주의의 테두리 안에 있는 것은 틀림없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인연과 지리적인 관계 때문에 프랑스의 문화적 영향이 적지 않은 알제리에서 만약 FIS가 집권한다면 특히 여성차별 정책이 큰 저항대상이 될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민주주의도 원하고 경제발전도 원하는 회교신자들의 고민은, 알라신의 가르침에 따라서 통치를 해야지 그렇지 않은 자는 비신자요 배반자요 불의의 사람이 된다고 코란에 규정되어 있는 점이다. 이점을 강조하는 원리 주의대로라면 회교도들은 미래를 토론할 자유를 잃게 된다고 이들은 말한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는 언제까지 뒤로 돌려놓고 기다리게 해도 좋다는 이야기냐고 이들은 항의한다.

 FIS 인사들에 대한 검거 선풍이 계속되자 요즘 알제리에서는 턱수염을 깎아버리는 남자가 제법 늘어나고 있다. 짧게 줄인 바지, 흰모자와 더불어 긴 턱 수염은 FIS 지지자들 간에 제복처럼 유행해온 스타일이었다. 한 영국 특파원은 어느 이발사가 하루 평균 다섯 명의 수염을 깎아주고 있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결국 FIS계 사람들이 변장을 함으로써 지하운동으로 전환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한편 부디아프는 “권력을 남용하는 부패분자”를 정부에서 내몰았다고 기자들에게 말했으며 실업자대책을 위한 외국의 경제원조를 요청할 계획이라고도 언급했다. 탄압만으로 난국이 타개될 수는 없고 경제사정의 개선이 시급하다는 것을 집권층도 알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렇지만 정부의 강압정책에 대한 FIS의 반발이 도시 게릴라적인 작전으로 나타날 조짐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비상사태가 선포된지 몇시간 안에 수도 알지에의 전통지역인 ‘카즈바’에서는 파출소가 습격당해 경찰관 6명이 살해되었다. 또 수제폭탄들이 시내 주요 건물 앞에서 터진 사건도 일어났다. 법무성, 미국 대사관, 프랑스 총영사관 등이 목표였다.

 현재로서는 FIS계 청년들 중에 훈련된 게릴라는 없지만, 탄압과 투옥이 계속될 때 산발적인 항의가 본격적인 게릴라 전투로 양상을 바꾸게 되지 않으리라고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알제리 상황이야말로 시한폭탄에 비유할 만하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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