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인이 남긴 긍지와 치욕
  • 정희상 기자 ()
  • 승인 1992.03.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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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예들 ‘신독립선언서’ 선포 계획…민족대표 행적과 유족 현주소 추적

 오는 3월1일 파고다공원에서 기미년 3·1운동의 서막을 재현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73년 전 일제의 혹독한 식민지 지배에 항거해 거족적인 독립운동의 불길을 당겼던 민족대표 33인의 후예가 바로 그들이다. 3·1운동이 남긴 정신유산의 빛이 갈수록 바래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일부 유족들은 기미년 거사 당시의 비장감을 오늘에 되살리고자 73년만에 처음으로 새로운 ‘독립선언서’를 낭독, 선포할 계획까지 잡았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생존자는 한사람도 없다. 그날의 함성과 그 역사의 주역들은 모두 세월 속에 묻혔다. 그러나 직접 보고 느껴보지 못한 세대가 압도적으로 많은 오늘이기에 되살아나는 3·1운동의 숨결이 새롭다.

친일·북한 거주 5명 독립유공자서 제외
 물론 3·1운동의 發火者들이었던 민족대표 33인의 발자취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아직도 미완성형이다. 식민지시대·분단시대로 이어지는 현대사의 가시밭길 속에서 3·1운동은 굴절된 역사만큼이나 다양한 시각차를 가지고 해석돼왔다. 또 민족대표 33인이 그날 이후 꾸렸던 각기 다른 삶의 발자취가 민족사의 영욕을 그대로 되비쳐주고 있다. 33인 가운데 옥고를 치른 사람들의 행적을 더듬어보면 그들 중 일부는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할 당시 지녔던 민족애와는 얼마간 거리를 두었음이 확인된다. 어떤 이들은 아예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는 사실 자체가 부끄러울 정도로 훼절의 길을 걸었다. 그외에도 해방 후 월북 또는 납북된 몇몇 인사에 대해서는 또 다른 차원에서 공적인정이 금기시돼왔다.

 어쨌든 33인 중 5명은 현재 친일행위·북한 거주 등으로 독립유공자에서 제외됐다. 정부는 지난 1962년 우선 26명에게 대한민국장과 대통령장 두가지로 나눠 건국훈장을 주었다. 여기에다 지난 89년과 90년 3·1절에 각각 월북했거나 남북된 민족대표가 ‘해금’됨으로써 독립유공자 대열에 끼여 지금은 28명이 유공자로 인정된다.

 일부의 훼절에 대해 그리고 독립운동 전개 방식에 대해 역사학계 안에서 논란과 재조명 작업이 없지는 않으나 그들 33인이 한국 현대사에서 갖는 의미는 상징적인 것 이상임이 분명하다. 역대 헌법이 국가의 정통성을 3·1운동으로 거슬러 올라가 적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33인의 업적과 아쉬움이 만족의 수난사를 그대로 함축하기 때문이다.

 현재 33인유족회는 직계 장자를 정회원으로 하여 움직인다. 맨처음 유족회가 발족한 것은 1947년. 정부의 지원을 전혀 받지 못한 가운데 청계천 부근의 싸구려 사무실을 임대해 전전해왔다. 지금은 광복회 산하 유관단체로 흡수되었지만 정부나 광복회로부터 일절 지원이 없다. 33인유족회는 현재 퇴계로1가 삼선빌딩 별관 4층에 사무실을 두고 있으며 권혁방씨가 회장이다.

 권회장은 “독립운동가 집안은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있듯이 많은 유족들이 셋방에서 병마에 시달리며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다른 독립투사들과는 달리 33인의 경우는 3·1운도 당시 대부분 상당한 재산을 가진 각 종교계 지도자들이었으나 가산을 독립운동에 바치고, 일제의 감시와 탄압 속에서 차츰 몰락해간 내력이 공통점이다. 현재 보훈 혜택을 받는 유족은 절반 정도이다.

“그때 가해자는 지금도 가해자”
 이들 유족이 가장 가슴 아파하는 것은 지금까지도 친일파 또는 그 후손들이 사회 요직에서 득세하며 그들에게 따가운 눈총을 보내는 현실이라고 한다. 권혁방 회장은 “일제 때 가해자는 지금도 가해자입니다. 심지어 유족들이 연금을 지급받거나 지원건의서를 내기 위해 찾아가면 ‘누가 독립운동 하랬느냐, 그 많던 재산 거덜내고 왜 귀찮게 구느냐’는 등 모욕적인 말을 하는 사람도 있어요. 뒤를 캐보니 그 사람은 친일파의 후손이었습니다”라며 일제 잔재가 남긴 부정적 현실을 개탄했다.

 민족사의 영욕을 온몸으로 안고 있는 33인유족들이 긍지와 부끄러움을 어떻게 소화하며 살아가는지 그 현주소가 궁금하다.

 孫秉熙 : 33인 중 15명을 차지한 천도교측 수장. 3년 징역형을 받고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1940년 눈을 감았다. 딸만 다섯을 두었으나 모두 사망했다. 셋째딸 고 손용화씨는 소파 방정환의 아내이기도 하다. 2남3녀를 둔 손여사는  셋째딸 방영화씨를 33인중의 한사람인 나용환의 아들 나경덕씨와 결혼시켰다. 유족끼리 결혼한 경우는 이들밖에 없다. 현재 손병희의 직계는 대가 끊긴 셈이다.

 李昇薰 : 3·1운동 당시 기독교측의 수장이었다. 1906년 105인 사건에 연루돼 4년 동안 옥고를 치렀는데 3·1운동으로 다시 3년형을 받았다. 한때 <동아일보> 사장을 역임했으며 그 뒤 고향인 평북 정주에서 항일운동을 계속하다 1930년 67세를 일기로 작고했다. 유족으로는 증손부 이옥순 여사와 고손 이기대 이기남 형제가 서울 용산구 한강로 1가 59번지 셋방에 살고 있다.

 韓龍雲 : 불교 대표로 3·1독립선언서의 공약 3장을 썼다. 3·1운동과 관련 8년 간 옥고를 치렀다. 수감 중 민족대표 33인에게 내란죄로 사형이 언도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아 33인 중 일부가 동요하자 한용운은 감방 안의 변기통을 내던지며 “독립운동을 하고도 살줄 알았더냐. 너희들과 같이 일을 꾸민 게 부끄럽다”며 호통을 쳤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출옥 후 주옥 같은 문학활동으로 독립의지를 키워갔다. 말년에는 가난과 중풍에 시달리며 몇푼 안되는 원고료로 연명했다. 1944년 서울 성북동 심우장에서 끝내 해방을 못보고 눈을 감았다. 대처승이었던 그에게는 외동딸 한영숙씨가 있다.

 權東鎭 : 구한말 함안군수와 육군 참령을 거쳐 개화당에 들어갔다. 1882년 임오군란 때 일본으로 망명, 손병희를 만나 천도교에 입문했다. 3·1운동으로 3년형을 살고난 후 신간회 부회장으로 광주학생운동에 가담했다가 다시 1년을 감옥에서 살았다. 1947년 타계한 그는 유족으로 증손 권혁방씨를 두고 있다. 33인유족회 회장이 권씨는 보훈혜택도 전혀 못받는 가운데 경기도 안양시 석수2동 셋방에서 산다.

 權秉悳 : 1894년 동학혁명 때 손병희와 함께 6만 군중을 이끌고 관군과 싸웠으나 패하자 천도교에 입문했다. 3·1운동으로 2년간 옥살이를 하고 나와 천도교 감사원장, 선도사 등을 역임했다. 47년 타계했다. 손자 권오상씨가 경기도 광명시 하안동 주공아파트 304동 1403호에서 살고 있다.

 金秉祚 : 33인 중 유일하게 일경에 체포되지 않은 사람이다. 서명 후 밀사역을 맡아 상해로 떠났기 때문이다. 그대로 망명객이 되어 임시정부 상임이사, 사료편찬위원 등을 지냈다. 이 기간에 《독립혈사》를 간행해 옥살이중이던 33인 대표의 고통을 담았다. 해방 후 북에 머물렀다는 이유로 유공자 포상이 안되다 1990년 3·1절에야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유족으로는 아들 김행식 목사가 경기도 화성군 봉담몀 상1리 76-3에서 산다.

 金完圭 : 한일합방 후 천도교에 들어가 3·1운동에 가담했다. 2년 동안 옥살이를 한 후 천도교 도사직을 맡은 그는 일제의 온갖 협박 속에서 민중 계몽운동에 전념했다. 49년 타계한 그의 유족으로는 손자 몽한씨가 있다. 서울 성동구 행당동 340-81번지에 사는 몽한씨는 매월 나오는 얼마간의 연금에 의지해 힘겹게 산다.

 羅龍煥 : 23세 때 동학에 입문한 후 천도교로 개종해 3·1운동에 참가했다. 2년 동안 감옥살이를 한 후 천도교 포교사업에 주력하다 1936년 병사했다. 유족인 외아들 경덕씨는 앞서 밝힌 대로 손병희의 외손녀와 결혼했다.

 羅仁協 : 19세에 동학에 들어갔다가 3·1운동을 맞았다. 2년 동안 옥고를 치른 후 천도교 교사활동을 하며 민족운동을 벌였다. 1951년 병사. 아들 상윤씨가 경기도 고양군 일산읍 25-109에서 살고 있다.

 朴東完 : 기독교도로 3·1운동 당시 경기 지방의 시위를 주도한 그는 2년형을 살았다. 출옥 후 신간회 상임감사를 지냈다.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1923년 하와이로 망명해 해외 애국지사들 사이의 연락을 맡아 활동하다 1941년 병사했다. 현재 손자 재상씨가 서울 마포구 연남동 562-48번지에서 월세로 방 두칸을 얻어 노모와 함께 살고 있다. 그동안 재상씨가 과외 공부를 가르쳐 생계를 꾸려왔다. 노모 최선옥씨가 요즘 허리를 다쳤으나 보훈 혜택을 못받고 집에서 가료중이다. 다행히 재상씨는 2월27일 한양대 의대를 졸업해 3월부터 보훈병원 인턴으로 일하게 되었다.

 白龍成 : 불교 대표. 법명은 용성진종대사. 16세 때 출가했으며 해인사 스님들의 봉기를 주도했다. 3·1운동으로 1년6개월을 감옥에서 살았다. 불교정화 및 대중화에 힘써 서울시내에 최초로 포교당을 세웠다. 대각사를 창건한 뒤 60여종의 불경 어록과 저술을 남겼다. 1940년 대동아전쟁 소식을 듣고 피를 토하며 열반했다. 속세의 직계손은 없으나 4촌 동생의 손자인 종호씨와 그 부인 정복덕행보살이 서울 종로구 봉익동 2번지 대각사에 살고 있다. 불교의 법자계통으로는 현재 대각사 주지인 불심도문스님(속명 임윤화)이 손자이다.

 朴準承 : 29세 때 천도교에 입문한 뒤 3·1운동 당시 임실 남원 장성 등 호남의 민중봉기를 주도했다. 2년형을 받고 복역 중 21년 옥중에서 고문을 당해 죽었다. 33인 중 옥사한 사람은 그와 양한묵(전남 화순) 두사람이다. 현재 전북 정읍군 산외면 평사리 노은 357-1에 손자 기수씨가 밭농사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朴熙道 : 33인 중 이갑성과 함께 31세로 최연소자였다. 3·1운동으로 2년 복역 후 잡지《생활사》를 창간해 주필로 독립사상을 고취시키다 다시 1년11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이때부터 그는 사람이 변했다. 잡지 《동광》의 주간으로 있으면서 친일의 길로 돌아선 것이다. 이 죄로 48년 반민특위에 회부됐다. 51년 사망한 그는 1남1녀를 두었으나 아들 순도씨는 치욕을 못이겨 미국으로 이민갔다. 현재 딸 순실씨가 서울 성북구 정릉 160-7번지에 살고 있다.

 申錫九 : 기독교 대표. 3·1운동으로 2년6개월을 살다 나와 1938년 7월 신사참배 거부로 옥고를 치렀다. 45년 5월 전승기원예배거부로 감옥에 들어갔다가 해방을 맞았다. 1949년 감리교 북한지역 총책임자로 기독교 민주당을 결성해 활동하다 1949년 이른바 ‘진남포 4·19사건’으로 검거돼 1950년 10월 평양에서 처형당했다. 현재 손자 성균씨가 대구시 중구 대봉동 167-3에서 산다. 그는 6·25 전 북한에서 취득한 교사자격증으로 교직에 종사했으나 자격을 박탈당해 1959년부터 법무사 일을 보고 있다.

 申洪植 : 기독교 대표. 평양 남산현교회 목사로 있다 3·1운동에 뛰어들었다. 신사참배 거부로 여러 차례 옥고를 치렀다. 1937년 사망한 그의 유족인 손자 덕수씨는 서울 마포구 도화2동에 산다. 덕수씨는 네살 나던 때 부친 신대호씨를 여의고 고아원에서 자랐다. 교육을 받지 못해 막일을 하며 살아온 그는 요즘 조금씩 나오는 연금에 의지해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梁甸伯 :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로 있다 3·1운동에 가담했다. 2년 복역 후 목회산업에 전념했다. 105인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현재 손자 승유씨가 서울 도봉구 창3동 562-4에서 연금만 바라보며 살고 있다.

 梁漢? : 1898년 알본으로 건너가 손병희를 만나 동학에 입교했다. 1905년에는 이준 윤효정 등과 헌정동지회를 만들고 구국운동에 나섰다. 3·1운동으로 2년형을 받아 옥살이하다 서대문감옥에서 1919년10월 고문사했다. 유족으로는 손부 윤점순씨가 서울 송파구 잠실주공아파트 342-409에서 아들 양상승씨와 살고 있다. 교육청에 근무하는 상승씨는 양한묵의 고손자이다.

 吳世昌 : <한성순보> 기자로 출발한 그는 <만세보> <대한민보>등의 사장을 맡아 독립의식 고취에 힘썼다. 손병희 권동진 등과 친분을 맺으며 천교도에 입교해 3·1운동에 나섰다. 3년 복역하고 해방 후에는 <매일신보> <서울신문> 사장을 지냈다. 1953년 대구에서 사망한 그의 유족으로는 논노패션에 근무하는 손자 천득씨가 있다.

 吳華英 : 감리교 목사로 있다 3·1운동에 참가했다. 2년6개월의 옥고를 치른 후 목회활동에 종사했다. 6·25 때 피란을 가지 않고 서울에 있다 납북됐다. 그 때문에 유공자 인정이 안되다 1989년 3·1절에야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그는 1962년 병사했으며 조소앙등과 함께 북한의 평양 애국열사릉에 안치돼 있다. 광복회측은 지난해 11월 국립묘지에 위폐만 안치했다. 유족으로는 양자로 들어간 오응초씨(74년 작고) 슬하에 오영씨(의사)가 서울 강남구 방배동 877-3호에서 산다.

 劉如大 : 목사로 3·1운동 당시 의주에서 독립선언서를 뿌리고 오후 늦게 서울에 도착, 일경에 붙들렸다. 3월1일 서울과 동시에 일어난 의주만세운동은 대표적인 독립운동 사례로 꼽힌다. 2년 복역 후 교육과 선교사업을 하다 1937년 작고했다. 후손으로는 손자 효창씨가 충남 연기군 조치원읍 침산동 87-28에서 살고 있다. 효창씨는 교직에 종사해오다 지금은 보험회사에 나간다.

 李甲成 : 기독교 신자로 세브란스병원 사무원으로 근무하다 31세 때 33인에 끼였다. 2년6개월 동안 형을 산 후 상해로 망명했다. 해방 후 자유당 창당에 깊이 관여했고, 수많은 사회단체에서 중책을 맡았던 그는 33인 중 가장 장수했다. 1981년 작고한 그의 유족으로는 부인 최마리씨와 장손 재현씨가 있다. 둘째 아들 용희씨는 전두환 대통령 시절 통일원 장관을 지냈다.

 李明龍 : 기독교 대표로 105인 사건에 연루돼 3년 옥고를 치렀고 다시 3·1운동과 관련해 2년형을 살았다. 그후 미국으로 망명해 14년을 보냈다. 해방 후 여러 사회단체 고문으로 있다 56년 병사했다. 후손으로는 서울 중랑구 면목동 349-3에 손자 태영씨가 산다.

 李鐘一 : 천도교 대표인 그는 보성사 인쇄소 사장을 독립선언서를 찍었다. 이로 인해 3년 복역하고 나왔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1925년 작고했다. 유족으로는 손녀 이장옥씨가 경기도 김포군 월곶면에 살고 있다.

 李鐘勳 : 1894년 동학혁명 때 이름을 떨쳐 천도교 장로가 되었다. 3·1운동으로 2년 복역하고 만주 간도 용정 등지에서 고려혁명위원회 활동을 했다. 1935년 병사했다. 손자 성문씨가 서대문구 북가좌2동 3-87에서 어렵게 산다.

 李弼柱 : 기독교청년회 초대 체육교사로 일하다 목사가 되었다. 3·1운동으로 2년 복역 후 신앙운동을 벌이던 중 1932년 병사했다. 손자 현기씨가 호주로 이민가 살고 있다.

 林禮煥 : 동학에 들어가 동학혁명 때 맹활약하다 천도교로 개종해 3·1운동을 맞았다. 2년 복역 후 고향 평안남도에서 민족운동을 계속했다. 49년 병사한 그의 유해는 북한에 있다. 후손인 증손자 종선씨가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 190-81에서 산다.

 鄭春洙 : 3·1운동 당시 감리교 목사로 함남 원산에서 만세운동을 지도했다. 1년6개월을 복역하고 나와 1934년에는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1백5일 동안 고문을 받았다. 그러나 결국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에 굴복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독립유공자에서 제외돼 후손들에게 한을 남긴 채 1951년 눈을 감았다. 유족으로는 아들 화세씨가 강원도 양구에서 살고 있다. 화세씨는 “부끄러워서 할 말이 없다. 해마다 3·1절만 오면 산속으로 숨는다. 이렇게 살다가 조용히 사라지고 싶다”고 한스러운 심정을 밝혔다.

 崔麟 : 33세 때 천도교에 들어가 3·1운동을 맞았다. 기미년 당시 독립선언서 초안을 작성했다. 그러나 그는 3년 동안 옥고를 치르고 나와 자진해서 변절의 길로 들어섰다. 1934년 중추원 참의, 1937년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사장, 1939년 임전보국단장을 지내는 등 친일의 선두에는 항상 그가 있었다.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됐으나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며 6·25전쟁 때 납북됐다. 유공자에서 제외됐음은 물론이다. 유족으로는 아들 둘이 있다. 장남 최혁씨는 몇년 전 사망했다. 차남은 판사를 지낸 법조인으로 요즘에는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崔聖模 : 감리교 목사로 33인 중 이필주를 만나 3·1운동에 가담했다. 황해도 시위를 주도하고 체포돼 2년을 감옥에서 지냈다. 출옥 후 만주로 망명, 독립운동을 했다. 8대 독자였던 그는 외아들을 낳아 9대째 독자를 남겼다. 그가 <조선일보> 기자를 거쳐 한독당에 몸담았던 최경환씨(60년 작고)다. 최씨는 슬하에 3형제를 두었으나 현재 막내 명기씨만 살아 있다.

 洪基兆 : 22세 때 천도교에 들어가 손병희와 손잡고 평안도 천도교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3·1운동으로 2년 동안 옥고를 치른 뒤 고향 평안도 용강으로 돌아가 독립운동을 계속하다 1938년 병사했다. 후손으로는 증손자 홍래준씨가 경기도 용인읍 김양장리 주공아파트 2동204호에 살고 있다. 홍래준씨는 “증조부님은 홍경래의 난으로 유명한 바로 그 집안 후손이시다. 그래서 대대로 과거에도 응시하지 못한 한을 간직하다가 동학운동과 독립운동에 나섰다”고 말한다.

 洪秉箕 : 역시 천도교 대표로 3·1운동에 가담했다. 2년 복역하고 나온 길로 고려혁명위원회를 조직한 뒤, 만주에 망명해 고려혁명당을 조직한 지사들을 만나러 가다 신의주에서 체포돼 3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1949년 작고했다. 유족으로는 손자 재웅씨가 닭튀김 장사로 노모를 부양하며 인천시 남구 동작골 아파트에 살고 있다.

 金昌俊 : 기독교 대표로 함경북도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1925년 항일 투쟁으로 유명한 영흥주재소 습격사건을 벌여 체포된 뒤 무기형을 선고받았다. 해방 후 사회주의 기독교 운동을 벌이던 중 6·25 때 북으로 갔다. 이런 연유로 그는 독립유공자에서 제외됐고 유일하게 기록과 가족사항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吉善宙 : 한국 최초의 목사로 3·1운동 때 서울에 늦게 도착, 총감부에 찾아가 자수했으나 무죄로 풀려났다. 33인 중 유일하게 무죄판결을 받았다. 이런 사정 때문에 그 역시 독립유공자에서 제외됐다. 유족으로는 증손자 길원철씨가 현재 강원산업 이사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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