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업계, 조마조마 호황
  • 남유철 기자 ()
  • 승인 1992.03.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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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주량 사상 최고지만 “일본이 설비 증설하면 하루아침에 사양길”

 조선업계가 91년 한해 동안 벌어들인 36억달러의 수출실적은 최악의 무역적자로 찌들던 한국경제에 내린 한줄기 단비였다. 이 바람에 사양산업으로 매도돼왔던 조선업이 전망있는 업종으로 갑자기 뒤바뀌는 극적인 반전을 연출했다. 이런 호황이 한동안 지속될 것이라 보는 견해가 있는 반면, 단비란 오래 내리지 않는다고 비유하며 한때의 호황으로 보는 전망도 만만치 않다. 한국의 버거운 경쟁국인 일본이 이런 호황을 놓칠세라 새로운 대응책을 강구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90년대 들어 세계 조선업이 호황을 누리는 데 힘입어 국내 조선업도 작년 하반기부터 주문이 쏟아져 들어왔다. 지난 연말 현재 수주량은 5백43만t(총톤수)을 기록, 사상 최초로 5백만t을 넘어섰다. 이것은 90년 대비 24%가 늘어난 톤수이고, 금액으로 보면 무려 53%가 증가한 55억6천만 달러에 이른다. 80년대 후반 노사분규가 가장 극심했던 조선업을 골치아픈 사양사업으로 보던 정부도 “이제는 조선업밖에 없지 않느냐”며 시각을 바꾸고 있는 것 같다고 업계의 한 임원은 말한다.

일본서 일감 넘쳐야 한국 차례
 대개 10년 주기로 움직이는 조선경기가 90년 들어 세계적 호황국면으로 돌아선 것만큼은 틀림없다. 그러나 세계 조선경기의 부침이 심한 만치 이같은 회복세가 곧 우리 조선업의 ‘화려한 부활’이라고 보기는 아직 이르다는 게 전문가들의 조심스런 전망이다. 오히려 향후 10년간의 호황기를 통해 국내 조선업이 일본을 따라잡지 못한다면, 중국과 같은 후발 조선국에 밀려 90년대의 호황을 끝으로 영원한 사양길에 접어들지도 모른다고 경고한다.

 “우리 조선사업은 호황의 광채에 가려 이면의 어두운 그림자를 잊고 있다.” 낙관론에 일침을 가하는 한국조선공업협회 李相國 전무이사의 지적이다. 현대중공업 선박사업본부 鄭在英 이사도 “호황을 누릴 거라고 하는데, 미국이나 유럽경제의 흐름으로 봐서 그다지 밝지만은 않다”는 견해를 보였다.

 국내 조선산업의 구조적 특성을 살펴보면, 유례없는 호황에도 불구하고 장미빛 전망만을 가질 수 없는 이유가 분명히 드러난다.

 조선은 해운산업의 수요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주문생산이다. 배를 주문하는 것은 엄청난 투자이므로 주문자는 생산자가 제시하는 여러 조건을 고려해 세계에서 가장 경쟁력이 뛰어난 조선소에 발주하게 된다. 이때 “기술이 1차적인 결정요인이 된다”라고 서울대학교 金曉哲 교수(조선공학)는 지적한다.

 최근에 증가하고 있는 국내 조선업체의 수주실적도 국제경쟁력 향상으로 얻은 수확으로 볼 수 없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고백이다. 즉 일본이 먼저 일감을 확보하고 난 후, 넘쳐나는 물량이 한국 몫이라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과의 월별 수주량(도표 참조)을 보면, 일본의 수주량 증가 때 한국의 수주량은 감소하고, 한국이 수주하는 시기에는 일본의 수주량이 감소함을 알 수 있다. 선박의 경우 가격보다 품질을 중시하기 때문에 “일본의 수주가 넘쳐나야 우리에게 온다”고 서강대 全埈秀(해운 경영학) 교수는 설명한다.

 70년대 초 세계시장에 진출한 이후 80년부터 한국은 일본의 뒤를 이어 건조량에서 세계 2위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하지만 기술 경쟁력이나 생산성에서 일본과의 실질적 격차는 크기만 하다.

 일본의 기술력은 지난 56년에 전통적 해운강국이었던 영국을 추월한 이후 어떤 나라도 따라잡을 수 없는 수준에 도달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金曉哲 교수는 “간단히 말하면 우리가 세계시장에 진출했던 70년대나 지금이나 일본과는 생산성이나 기술력에서 여전히 3배 이상의 차이가 난다”고 비교한다.

 국내건조 선박의 국산화율 역시 산정방식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평균 50% 정도라는 것이 지배적인 의견이다. “중요한 항해장비는 대부분 일본에서 수입하고 우리는 조립하는, 한마디로 용접이나 하는 정도의 수준”이라고까지 全埈秀 교수는 혹평한다

 일본이 조선 설비를 증설하면 비단 한국만이 아니라 미국과 유럽의 조선업계도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다. 최고의 기술력과 생산성을 가진 일본의 설비증설은 바로 일본의 세계시장 점유율 확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일본의 생산력 증강이 우리 조선업계에 미칠 파장의 강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수치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현재 세계 선복량은 4억3천만t. 이 가운데 15년이 넘는 노후 선박의 비중이 55%에 이른다. 대체 선복량을 향후 10년간 2억t으로 보면, 신조선 건조수요는 연 평균 2천만t이 될 것이라고 한국조선공업협회는 어림잡는다. 영국의 해상보험업자 단체인 로이드협회 자료에 따르면, 90년에 한국은 세계시장의 23.8%를 점유했다. 이에 비해 일본은 46.3%. 현재의 수주단가는 대략 t당 1천달러 수준이므로 세계시장 점유율 1%를 연평균 20만t 수주로 볼 때 금액으로는 2억달러에 이른다. 수요를 고정된 것으로 보고 일본의 시장 점유율이 확대된다면 한국의 손실은 얼마나 될까. 일본의 시장 점유율이 10% 증가할 때마다 우리에게는 선가금액으로 연 20억달러가 손실로 이어진다는 계산이다.

일본이 10% 늘면 한국은 20억달러 손실
 90년대의 호황이 정설로 굳어지면서 일본 조선업계의 대응은 숨가쁘게 빨라지고 있다. 최근 일본은 건조능력 확대를 위한 다각적인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일본 조선업계를 분석하고 있는 영국계 증권회사 바클레이즈 동경사무소의 리차드 고씨는 “설비증설을 위해 업계와 정부간에 구체적인 협의가 진행중이다”라고 전한다.

 80년대의 세계적 불황기를 거치면서 일본 조선업계는 생산성 극대화에 주력해 왔다. 일본 조선소는 사람을 보기 힘들 정도로 공정이 자동화돼 있다고 현지를 둘러본 사람들은 설명한다.

 리차드 고씨에 따르면 현재 일본은 94년까지의 조선물량을 확보했기 때문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조선업 분야 가맹국 (한국도 회원국) 간의 분쟁소지가 다분한 설비증대를 당장은 꾀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94년 이후 호황이 계속된다면 시장 점유율을 60%로 증대시키기 위해 현재 사용하지 않고 있는 설비를 손질해 조선능력을 넓힐 것이라고 전망한다.

 바클레이즈 동경사무소의 자료에 의하면 일본의 세계시장 점유율은 91년 상반기에 48.2%로 증가했다. “일본은 설비를 줄이는 대신 생산성을 향상시켜 통상마찰을 피해가는 반면, 한국은 생산성이 떨어지고 있는데도 공칭 설비규모가 상대적으로 커 가장 협조 안하는 나라로 국제사회의 눈총을 받고 있다”고 全埈秀 교수는 꼬집는다.

 한국이 일본의 뒤를 잇는 산업분야 가운데 하나가 조선이다. 그러나 일본과 우리의 거리는 멀기만 한다. 간격이 좁히는 방안은 호황기에 기술투자에 힘써 기술경쟁력을 높이는 한편, 덩치 큰 값싼 배보다 작지만 알찬 배를 만드는 전략을 착실히 펴 나가는 길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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