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의 연극배우 가로채기
  • 고명희 기자 ()
  • 승인 1992.03.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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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차별 스카우트에 공연중단 잦아…대학서 ‘연극’‘영화’ 분리교육해야

 지난 21일 ㅈ대 연극학과를 졸업한 李柄住씨(29·극단 혜화 대표)는 요즘 정신이 멍멍하다. 재학중 20여 작품을 연극무대에 올리느라 출석일수가 모자라 무려 9년 만에 졸업장을 손에 쥔 감격 탓이 아니다. 자신이 만든 극단 ‘혜화’에 쏟아지는 방송사들의 불빛이 너무 눈부시기 때문이다.

 예삿일이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김씨는 얻어맞는 기분도 든다. 창단공연작품인 ‘돈키호테’의 연극으로서의 가치는 들러리에 불과할 뿐 대부분 ‘스타 탄생’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는 것이다. 추상록씨(돈키호테 역)는 ‘빨간 피터의 고백’으로 유명한 연극인 故 추송웅씨의 아들이어서 KBS-1TV의 <문화가산책>에서 촬영해 갔다. 27세이지만 성장이 멈춘 탓에 128㎝의 키와 童顔을 간직한 ‘한국판 양철북’ 지춘성씨(산초 역)는 SBS-TV의 장애자 프로 <사랑의 징검다리>에서, 또 91년 미스코리아 선인 염정아씨(알돈자 역)는 MBC TV 드라마 <우리들의 천국>에 이은 연극무대에의 데뷔라는 점에서 <쟈니윤 쇼>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밤샘으로 모자란 연습을 벌충하여 26일부터 시작하는 공연준비를 끝낸 이씨는 이제는 스타를 빼앗길 것 같아 또 애가 탄다. 출연 배우가 텔레비전 드라마에 전격발탁되어 연장공연을 할 수 없는 일이 연극계에선 심심찮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 사례는 지금까지 3천여 졸업생을 배출한 우리나라 연극영화과의 고질적인 문제를 드러내는 단면이다. 최근 급격히 높아진 영화나 연극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에 비하면, 각 대학 연극영화과의 수준은 극히 미흡한 단계에 머물러 있다. 연극과 영화의 개념이 혼돈된 상황에서 연극무대를 영화계의 손짓을 기다리는 정거장쯤으로 격하시키는 일들이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교육부의 교육정책이 삐걱거릴 때마다 유난히 그 파편이 연극영화과에 떨어진 데에도 주요 원인이 있다. 鄭用琢교수(한양대)는 “현재의 연극영화과들이 처음부터 연극영화과로 출발하지는 않았다”면서 이질적인 두 학과가 뭉뚱그려 만들어진 ‘연극영화과’는 문교부의 작품이라고 설명한다.

배우지망생 TV·CF에만 관심
 연극영화과를 만든 대학(4년제)은 59년 중앙대로부터 시작하여 동국대 한양대 등 모두 여섯 대학이다. 초기에는 각 대학마다 나름대로 성격이 뚜렷했으나 69년 문교부의 ‘유사학과 통폐합’조치에 따라 연극과로 출발한 동국대나 영화과로 출발한 한양대나 모두 ‘연극영화과’로 명칭이 바뀌었고, 그 이후 생겨난 단국대 청주대 경성대(부산)의 학과도 모두 연극영화과로 탄생했다(이중 중앙대는 87년 안성 캠퍼스가 문을 열면서 연극과와 영화과로 분리했다).

 정교수는 또 82년 대입학력고사의 예체능 계열 커트라인 폐지는 연극영화과의 질적 저하를 가져왔다면서 연극영화과의 입시경쟁률이 82년을 기점으로 급격히 높아진 것을 구체적인 증거로 내세운다. 영화진흥공사에 따르면, 4년제 대학 연극영화과 신입경쟁률은 80년에 6.2, 81년 4.6에 불과했으나 82년에는 무려 전해에 비해 두배 이상 늘어난 10.9를 기록했으며 86년 15.4, 90년 17.3으로 해마다 기록 경신을 거듭하고 있다(92년의 경우 아직 공식적인 통계치는 나와 있지 않지만 최고 경쟁률은 단국대의 27.5). 즉 그 어느 학과보다도 ‘재능’이 선행되어야 하는 연영과가 요행심리로 넘보는 ‘만만한 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정교수는 “서울지역 대학교의 정원동결은 역설적으로 교수의 동결을 가져와 부실한 강의를 초래하고 말았다”고 개탄한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겉으로는 연극과 영화의 실기와 이론을 두루 섭렵할 수 있다고 내세우고 있지만, 실지로는 그 어느 하나도 충실하지 못한 채 어정쩡한 상태에 머무는 것이 연극영화과의 현주소라는 진단이다.

 정교수는 “연극과 영화를 분리해야 한다는 주장은 이미 학자들 사이에선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을 뿐 아니라 두 분야가 이론과 실기를 따로 세분해야 한다는 것에까지 나가 있다”고 지적한다.

 대학이 실기(배우 연기지도)와 이론을 모두 맡기보다는 연기지도는 전문양성소에 일임하고, 지금까지 제대로 정립되어 있지 않은 각 분야의 개념부터 출발하여 이론의 틀을 잡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金錫萬 교수(중앙대)는 “연극의 경우 개념정립부터 새로 하여 전통적인 의미의 굿·짓·놀이를 수용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현재 우리나라 연극은 서양의 사실주의 연극 위주로 연구되어 봉산탈춤·판소리 등 전통 연극은 연구 핵심으로부터 빗겨나 있다는 지적이다.

 영화의 경우 최근 이론과 실시를 겸비한 감독들이 충무로에 새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어 고무적이긴 하나, 영화개념의 폭을 넓혀야 할 것으로 지적된다. 영화평론가 유지나씨(파리7대학 영화기호학박사)는 “고등학교 교육을 바랄 수야 없겠지만 대학에서는 영화 개념의 폭을 넓힐 필요가 있다”고 한다. 세계적으로 영화예술이 발달한 프랑스에서는 영화를 예술과 고고학 혹은 문학이나 철학 기호학 등 인접 학문과 함께 다루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인 데 비해 국내 상황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대학에서의 연기교육은 절대적이라는 주장도 있다. 감독이 시키는 대로 인형처럼 연기하는 것과, 영화 속의 인물로 자신을 재창조하는 작업은 다르다는 것이다. 영화감독 김수용씨(청주대 교수)는 “문제는 단순히 용모만을 믿고 배우가 되려 하는 철부지들이다. 지난 입시에도 지원자의 80%가량이 영화와는 거리가 먼 아이들이었다”면서 매년 증가하는 입시경쟁률은 속빈 강정일 뿐이라고 전하기도 한다.

 영화연극계에서는 “광범위한 토론의 장을 마련하여 연극영화과의 위상을 새로 정립해야 한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영화와 연극이 ‘한지붕 두가족’인 바에야 과감한 수술이 필요하며, 이론과 실기 역시 동상이몽인 바에야 분리가 불가피하다는 지적이다.

 ‘나의 사랑 나의 신부’로 영화계에 데뷔한 李明世 감독은 새학기 강의를 앞두고 고민에 빠져 있다. 대학에 들어오자마자 탤런트시험이나 광고모델시험에 응시하여 스타가 되고자 할 뿐 연기력 다지기는 뒷전인 신입생들에게 연기교육에 앞서 정신교육을 어떻게 시켜야 할지 벌써부터 난감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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