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가수 가뭄’ 해갈이 보인다
  • 성우제 기자 ()
  • 승인 1995.02.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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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경 · 신효범 · 이은미 · 장혜진 실력파 ‘4인방’, 개성 무대로 ‘부흥 시대’ 예고

‘여가수 기근’. 몇 년 전부터 한국 대중 음악계가 떠안은 큰 고민거리의 하나이다. 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하면서부터 시작된 이 현상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 대중 음악계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여성들이 맥을 못추는 판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이승철·신해철·이승환·서태지·정석원 같이 80년대 중반부터 등장하기 시작해 대중 음악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이른바 ‘셀프 프로듀서’들 앞에서 여가수들의 입지는 더욱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80년대에 등장한 마돈나와 머라이어 캐리, 휘트니 휴스턴, 재닛 잭슨 등이 여전히 두드러진 활약상을 보이는 미국을 비롯해 대중 음악 선진국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이런 현상이 왜 유독 한국에서만 빚어지는 것일까.

 90년대 초반 대중 음악계의 한 특징으로까지 여겨지는 대형 여가수 부재 현상은 요즘 농구 경기장을 휩쓸고 있는 ‘오빠 부대’ 와 같은, 대중 음악의 오빠 부대에서 비롯하였다. 80년대 중반 컬러텔레비전 시대가 자리를 잡으면서 이른바 ‘비디오형 가수’ 시대가 열리자, 이 새로운 시대의 음반 시장을 장악한 세대는 10대, 그 중에서도 소녀들이었다. 음반 시장 판매고를 쥐고 흔드는 10대들은 ‘언니’ 보다는 ‘오빠’를 선호했고, 이는 음반 제작자들로 하여금 자연히 여가수를 기피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더구나 한국 여가수들은 남자 가수에 비해 취약점을 많이 안고 있다.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이 싱어 송 라이터가 없다는 것이다. 7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도 심수봉·노영심 이외에는 여성 싱어 송 라이터를 찾아볼 수 없다.

 

4명 모두 동갑에 대기만성형 만

“여가수들의 경우 남자 가수에 비해 제작비가 최소한 3천만원 이상 더 든다. 곡 쓸 능력을 가진 가수가 없어 곡에 대한 비용이 그만큼 추가되기 때문이다. 돈을 더 들여가면서까지 모험하는 것을 제작자들이 기피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동아기획 김 영 사장의 말이다. 싱어 송 라이터가 없는 것은 비용 문제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자기 성향을 잘 파악해 장점은 살리되 단점을 철저하게 버리는 아티스트로서의 능력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고사 직전에 놓일 듯하던 여가수들이 최근 되살아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어쩌면 ‘여가수 르네상스 시대’를 열지도 모르는 이같은 현상을 만든 주인공은 박미경이다. 지난해 11월에 발표한 <이유 같지 않은 이유>라는 빠른 리듬의 댄스 음악으로 올 겨울 각종 인기 차트 1위에 올라있는 박미경은, 이선희 이후 처음으로 음반 판매고를 20만 장 넘게 기록하며 신효범·이은미·장혜진 같은 ‘가창력’을 갖춘 여가수들이 빛을 볼 길을 터놓았다. 박미경·신효범·이은미·장혜진을 가리키는 ‘여가수 4인방’은 여러 면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우선 가수에게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자질인 노래를 잘한다는 점, 텔레비전보다는 라이브무대를 주 활동 공간으로 삼는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두 번째는 이들이 모두 동갑이고 서른 가까이 되어서야 빛을 보았다는 점이다. 이들은 음반 2, 3집을 내고서야 비로소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댄스 음악에 편향된 대중 음악의 인기판도에서 나름의 독특한 색깔을 보여 주고 있다. 박미경은 남성 못지 않게 힘있는 목소리를 구사하고 있으며, 신효범은 팝 발라드로 일찌감치 가창력을 인정받았다. 성인 취향의 음악을 추구하는 이은미는 라이브무대에서 가장 각광받고 있으며, 장혜진은 솔에서 록음악까지 다양한 장르를 소화해 내는 실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여가수 4인방도 싱어 송 라이터로서의 면모는 아직 뚜렷하게 보이지 못한다. 여가수 인기 시대의 물꼬를 튼 박미경도 90년대의 ‘히트 제조기’ 김창환의 디렉팅에 힘입어 성공이 가능했고, 1·2집에서 실패한 장혜진도 지난해 말에 발표한 3집은 김현철이라는 탁월한 음악 디렉터의 도움을 받았다. 여가수를 키워낼 만한 프로듀서 시스템이 아직 자리잡지 못한 것도 여가수 침체 현상에 또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주)라인음향 김창환씨는, 여가수 약세 현상이 실력 있는 가수가 없는 데서 비롯한다고 본다. 김씨는 “이들의 뒤를 이을, 노래 잘하는 가수들이 눈에 띄지 않아 제작을 하고 싶어도 못하는게 큰 문제이다” 라고 말했다.

 방송보다는 콘서트로 올 한 해 일정을 채워놓은 나이 든 여가수 4인방의 활약은 여가수 기근 현상을 금방 해소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들의 성공 여부에 따라 제작자들이 여가수의 음반을 제작하는 모험을 감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모험은 이미 시작되었다. 이소라·이희진 같은 작사·작곡·편곡 능력을 갖춘 젊은 여가수들이 올 봄에 음반을 내면서 ‘여가수 부흥’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成宇濟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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