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가 민주주의 꽃피운다.
  • 강태진 (한컴퓨터연구소장) ()
  • 승인 1992.03.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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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2년 사이 국제정세는 빠른 속도로 변화에 변화를 거듭해왔다. 냉전시대의 상징이던 베를린장벽의 붕괴는 이제 아득한 옛 이야기가 되었고 소련이 종말을 고했다. 이렇게 전세계에 몰아치고 있는 민주화의 물결을 전파하는 데는 컴퓨터를 포함한 정보통신 장비들이 한몫을 했다. 소련 보수파의 쿠데타 실패 요인 가운데 하나로 미국 CNN의 현장감 넘치는 취재를 드는 사람이 많다. 이처럼 텔레비전은 국제정세에 큰 영향을 끼친다.

 그러나 텔레비전 네트워크라는 거대한 조직을 통한 정보의 전달 외에 컴퓨터와 관련장비를 이용한 새로운 형태의 ‘풀뿌리 정보통신’의 역할도 가볍게 볼 수 없다. 그래서 동유럽의 독재자들은 철저한 언론 통제 외에 컴퓨터나 복사기 등 검열되지 않은 의견을 대량 복사 배포하는 데 이용될 수 있는 기기의 사용을 적극 통제해왔다. 루마니아에서는 수동식 타자기까지 등록을 해야 했다. 도청하기 어려운 컴퓨터 통신을 통한 정보의 전달이 소련의 정세 변화에 얼마만큼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한 확실한 자료는 없다. 하지만 소련이 컴퓨터 소프트웨어 무단 복제의 천국이라는 점, 특히 복사기의 부족으로 복제된 소프트웨어의 매뉴얼이 디스켓을 이용한 ‘불온문서’의 배포는 활발했을 것이다. 중국에서도 작년에 공산당 서기 李鵬을 비난하는 내용을 담은 컴퓨터 바이러스가 유행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15세기에 구텐베르크가 활자를 발명하기 전에는 책은 돈과 권력을 쥔 자들의 전유물이었다. 활자의 발명은 책의 대량생산을 통해 정보의 소비를 소수의 손에서 대중의 손으로 옮아가게 했다. 오늘날 컴퓨터는 정보의 생산을 소수의 손에서 대중의 손으로 옮겨가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PC가 일반화되기 전까지 정보의 생산과 배포는 자본을 바탕으로 해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신문과 잡지를 누르고 가장 영향력있는 매체로 등장한 텔레비전은 더욱 엄청난 자본을 필요로 한다. 결국 정보의 소비는 대중화됐어도 대중이 소비하는 정보는 소수의 손에 의해 포장되고 가공되는 것이다. 그래서 권력을 쥔 자는 이런 소수의 정보 생산자를 손아귀에 넣는 것을 통치의 기본 전략으로 삼아왔다.

 하지만 이제는 컴퓨터와 고해상도 프린트를 포함한 1백만~2백만원대의 장비로 고품위의 인쇄물을 얻을 수 있다. 이러한 저가 ‘탁상출판’(Desk Top Publishing) 시스템을 이용해 발간되는 신문이 각 마을마다 나올 때 지방자치세가 꽃을 피울 것이며, 환경 문화 예술 어느 한 분야에 관심을 둔 보통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은 수백 수천 종의 잡지가 등장할 때 풀뿌리 민주주의가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누구나 신문이나 잡지를 낼 수 있을 때 생기는 부작용도 있겠지만, 이러한 인쇄매체의 홍수 속에서 각기 다른 의견을 견주어 스스로 판단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 또한 민주시민이 되기 위한 필수과정이다.

정보 생산의 민주화 가져온 ‘탁상출판’
 탁상출판 시스템이 기존의 정보전달 방법인 인쇄물의 제작을 손쉽고 경제적으로 만들어 줘 정보 생산의 민주화를 가져왔다면, 컴퓨터 통신은 이제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형태의 정보전달과 나눔의 방법을 제공한다. 컴퓨터 통신은 전자우편을 통해 원하는 사람과 정보를 손쉽게 주고받을 수 있게 하지만 각종 게시판을 통해 다수에게 정보를 신속하게 배포할 수도 있다. 또 같은 관심을 가진 사람들끼리 그룹 토의를 할 수도 있다. 실제로 2년 전 한 컴퓨터 통신 동호회에서 컴퓨터 한글코드에 대해 벌인 열띤 토론은 정부가 공업표준 한글코드를 개정하게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컴퓨터는 또한 점점 그 종류가 늘어나는 각종 데이터베이스 서비스를 통해 이전에는 방대한 정보 가공조직을 가진 정부와 대기업에서나 이용이 가능했던 정보들을 개인이 집에서 편히 받아볼 수 있게 해준다. 컴퓨터 통신은 정보 소비자가 동시에 생산자가 될 수 있다는 특성을 갖고 있으므로 각종 정부 시책에 대한 개개인의 의견을 미리 타진해봄으로써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훌륭한 도구로도 사용될 수 있다.

 활자의 발명이 종교개혁과 르네상스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처럼 컴퓨터와 같은 정보통신기기의 보급이 21세기 전세계에 풀뿌리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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