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속에 핀 생명의 봄
  • 이문재 기자 ()
  • 승인 1995.03.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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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이제 미디어를 타고 온다. 겨울의 도시 속에 있는 우리와, 입춘·우수·경칩·춘분 사이에는 카메라와 종이, 전파와 화면이 있다. 기상 예보를 보면서 내일의 날씨를 오늘 먼저 체감하듯이, 우리는 매체를 통해 봄을 미리 겪는다. 그리하여 실제로 봄이 왔을 때 우리는 봄을 만나지 못한다. 매체는 늘 앞질러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실·실제 앞에서, 혹은 위에서 늘 미끄러진다. 매체는 미끌미끌하다.

 봄(春)을 ‘보다(視)’라는 동사와 연결지으려는 마음은 끝말 이어가기 수준의 상상력에 불과하지만, 매체 환경(올해는 케이블 텔레비전 원년이다)의 급격한 ‘진화’를 둘러보면 봄을 ‘보다’의 동명사형으로 고집하고 싶어진다. 매체는, 우리 각 개인 실존들의 존재론적 시력과 사회·역사적인 시야(올해는 세계화 원년에다 광복 50주년이다)를 차단하기 때문이다. 매체는 보여준다는 명분으로 보여주지 않으려는 속성이 있다.

 카메라는 표면이 순해지고 있는 얼음의 표면을 포착한다. 얼음은 물의 정지이지만, 그 정지는 멈춤이 아니고 기다림이다. 물의 기다림인 얼음의 내부에, 연초록의 메아리가 갇혀 있다. 틈이 생겨나고 있다. 생명이다. 풀뿌리다(올해는 실질적인 풀뿌리 민주주의의 원년이다). 그러나 저 봄인 생명은, 우리의 두 눈이 아닌 카메라와 지면으로 ‘중계’되고 있다.

 생명인 봄은 지면과 카메라를 넘어, 그 너머를 보라고 말한다. 미디어의 거품을 걷어내라고 들리지 않는 음성으로 속삭인다. 생명을 간접 체험하지 말라는 것이다. 가뭄을 보고, 지방자치제 원년을 보고, 케이블 텔레비전 시대를 보고, 광복 50주년을 보고, 세계화를 보고, 그리고 저것들을 보고 있는 자신을 보라는 것이다. 유념해야 할 것은, 저것들을 보는(부정하거나 반성하거나 수용하는) 눈은 결국 언제나 각 개인이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보아야 할 것을 마땅히 볼 때, 그 때 진정한 봄, 새로운 봄이 온다. 아직은 겨울이다.
李文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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