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총장은 ‘지자제 연기’ 밀사?
  • 서명숙 차장대우 ()
  • 승인 1995.03.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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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역 개편’ 발언, 시점·배경 싸고 의혹 증폭

김덕룡 민자당 사무총장은 일명 ‘쟉꾸(지퍼)’로 불린다. 그만큼 과묵하다. 웬만해서는 입을 떼지 않는다. 처신도 신중하다. 그래서 그는 야당 의원들로부터도 ‘진지한 정치인’이라는 평가를 받는 보기 드문 여권 인물이다. 이렇듯 과묵한 김총장이 지난 14일 입을 열었다. 그동안 지방자치 선거에 대비한 정치권의 준비가 너무 부족했고, 선거가 끝나면 기득권 때문에라도 더욱 상황이 어려워지므로 이제라도 행정구역 개편 문제를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논리였다.

 마치 김총장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민자당 소장 의원들도 행정구역 개편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제기했다. 당초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김총장의 문제 제기를 가볍게 일축했던 이춘구 민자당 대표와 김윤환 정무장관조차 급기야 공론화 할 필요성을 인정하는 쪽으로 딸려갔다. 김총장은 여권에서 ‘뜨거운 감자’로 여기는 행정구역 개편 논의를 일단 공론화의 장으로 옮겨 놓는 데 성공한 것이다.

 김총장은 물론 정부·여당의 모든 관계자들은 한결같이 ‘행정구역 개편 논의’와 선거 연기는 무관하다는 논리를 견지하고 있다. 선거전에 고칠 수 있는 부분(행정구역 조정, 기초단체 정당공천제 폐지 문제, 5개 특별시와 광역시의 구를 준자치구로 바꾸는 문제)은 선거전에, 시간이 많이 걸리는 부분(행정 단계 축소)은 선거 후에라도 고치는 방법을 이번 임시국회에서 진지하게 논의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정가에서는 김총장의 문제 제기가 6월 선거를 전제로 한 문제점 보완에 그치는 것인가에 대해 강력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김총장을 두고 지자제 연기 밀명을 띤 ‘특사’라는 의혹이 끊이지 않는 것이다. 특히 안기부가 선거 연기를 검토한 문건을 작성한 사실이 최근 폭로된 것도 이같은 의혹을 부채질하는 요소이다.

 

김대통령 순방 전 전격 선언설도

 이같은 의혹이 나오는 첫째 배경은, 김총장 발언의 강도와 문제 제기 시점이 예사롭지 않다는 점이다. 김총장은 일부 고위 당직자들의 완곡한 반대와 만류에도 불구하고 14일 이후 무려 닷새 동안 이 문제를 확대·증폭시켰다. 청와대는 김총장에게 아무런 제동도 걸지 않았다. 3, 4선 의원이 즐비한 여권에서 재선 의원으로서 총장에 기용된 데다 오랜 공백 끝에 당에 돌아온 그로서는 청와대와의 ‘긴밀한 교감’ 없이는 감히 생각하기 힘든 과감한 언행이라는 것이 주변의 관측이다.

 또 당초의 문제 제기 역시 ‘고칠 것이 있다면 이제라도 고쳐야 한다’ ‘정치권이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습이 부족했다’는 등 매우 포괄적인 것이었다. 이는 행정구역 개편에 대한 김총장의 문제의식이 ‘선거 전에 고칠 것만 고치는’ 수준에 머무는 것은 아님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심지어 민주계의 일부 소장 의원들은 지도부 방침과는 달리 ‘2, 3년이 걸리더라도 제대로 고쳐놓고 지방자치 선거를 실시해야 한다’고 노골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두 번째 배경은, 그동안 김대통령이 현재의 행정구역을 획기적으로 개편해야 할 필요성과 함께 지방자치 선거에 대해 극히 회의적인 견해를 간간이 표명해 온 점이다.


 세 번째 배경은, 민자당 당직 개편 직후부터 정가에 ‘대통령의 지자제 연기 선언’설이 끈질기게 나돌았다는 것이다. 대통령은 외국 순방에 나서기 전에 전격 선언을 할 것이며, 그 내용은 지방자치 선거와 관련한 사항이 되리라는 것이었다. 심지어 국민투표를 제의할 것이라는 꽤나 구체적인 방법론까지 담은 소문이 정가에 널리 유포됐다. 이런 상황에서 김총장의 발언과 함께 민자당의 공론화 움직임이 나온 만큼 야권은 이를 순수한 ‘행정적인 고민’이 아닌 대통령 선언을 뒷받침하기 위한 ‘사전 정지 작업’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실제로 김총장의 문제 제기를 계기로 민자당과 언론은 마치 오랜 건망증에서 벗어나기라도 한 듯이 일제히 현재 행정 조직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거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야권은 ‘연기 음모’에 대한 의혹이 말끔히 가시지 않는 한 행정구역 개편을 둘러싼 어떤 논의에도 응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하고 있어서, 김총장은 임시국회에서 야권으로부터 집중 공세를 받을 가능성이 크다.
徐明淑 차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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