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야 ‘마지막 대부' 김근태의 정치실험
  • 오민수 기자 ()
  • 승인 1995.03.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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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과 통합으로 ‘제도권’ 진출 ‘국민회의’는 계속 가동…개혁 수혈 성공할지 관심

“박정희 정권이 유신 개헌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경제학 교수나 경제 관료가 되었을 겁니다. 대학에 들어갈 때부터 막연하게나마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로 유학가 경제학을 공부해서 국민을 계몽해야겠다는 순진한 생각을 갖고 있었죠.”

 야권 통합의 한 축으로서 재야의 제도 정치권 진입에 ‘막차’를 탄 김근태씨는, 개인적으로 자신의 인생 행로가 어긋나기 시작한 계기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정권욕에서 찾는다. 대학 3학년 때인 67년 이미 서울대 상대 대의원회 의장으로서 학생운동권 지도자로 떠올라 있었지만, 그가 본격적으로 민주화운동에 몸을 던진 것은 유신 정권의 출범과 시기를 같이한다.

 공안 당국의 관찰 대상 목록에 이름을 올려놓은 지 28년. 그동안 숱하게 감옥을 들락거리면서 김씨가 겪은 ‘몸고생’은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고문 기술자 이근안 경감이 김씨에게 가한 여덟 차례 전기 고문과 두 차례 물 고문은,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던지며 세계적인 인권단체들의 시선을 묶어 두었다.

 재야운동의 대부로 성장한 그가 드디어 재야 세력을 끌어모아 민주당과 야권 통합을 이루어냈다. 협상 과정에서 따낸 지분은 10%. 김씨가 이끌던 재야 세력을, 현 정치권에서 무시할 수 없는 정치 세력으로 변모시킨 것이다. 김씨 자신은 2월24일 민주당 전당대회를 통한 부총재 추대와, 8월 전당대회에서의 당연직 부총재 자리를 보장받았다. 제1 야당 지도부의 일원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재야 · 정치권 양다리 걸치기 새 모험

 김근태씨는 민주당과의 통합에도 불구하고 재야 단체인 ‘통일시대 민주주의 국민회의’(국민회의) 조직을 그대로 유지할 계획이다. 김씨는 이미 평민력과 민주연합 등 재야 세력이 개혁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정치권에 진입했다가 재야와의 관계도 멀어지고 정치적으로도 독자 세력을 구성하지 못한 전례를 주시해 왔다. 그는 과거 재야 출신 정치인들이 하나의 힘으로 묶이지 못한 원인은 조직을 허물고 입성함으로써 정치적 자양분을 제공하는 토양에서 스스로 뿌리를 거두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래서 김씨가 이끄는 국민회의는 한 발은 제도 정치권에 담그고 나머지 한 발은 재야 조직으로 활동하는, 새로운 정치 실험을 감행하게 된 것이다.

 첫 시험대는 이번 지방자치 선거이다. 성공 여부는 공천권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정치권 진출을 희망하는 범개혁세력이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하느냐에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민주당내 지분 10%는 결코 작지 않은 힘이다. 지구당위원장으로 치면 20여석이고 대의원으로 치면 6백명에 달한다. 지방자치 선거 공천과 당직 배분에서도 그에 상응하는 힘을 행사한다. 국민회의에게 지분 10%란 경제 용어를 빌리면 ‘종자 돈’인 셈이다. 얼마든지 새끼를 칠 수 있다. 그러니까 국민회의는 정치권을 향한 ‘재야의 관문’ 역할을 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계파 갈등에 찌든 민주당도 새로운 피를 수혈하는 셈이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이다. 우선 국민회의에 그만한 인적 자원이 없다. 김근태씨는 “결코 우리 식구만으로 자리를 채우지는 않을 것이다. 약50%정도는 엄격한 심사를 거쳐 다양한 분야 인사들에게 문을 열어놓을 것이다. 하지만 당장 그런 인적 자원을 개발하기는 어렵다. 천천히 서로 신뢰의 기반을 쌓아가면서 추진할 문제이다”라고 말한다. 국민회의는 ‘김근태의 우군’으로 끝나지 않고 명실상부한 정치권내 개혁 세력으로 성장할 목표를 세워놓고 있다.

 김근태씨는 야권 통합을 통해 국민회의의 지도자로서, 그리고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다져온 상징적 무게에 대한 대접을 섭섭하지 않게 받았다. 그러나 이제 김씨는 재야 시절 겪은 몸 고생 못지 않은 ‘마음 고생’의 길로 접어들었다. 얽히고 설킨 민주당 계파 갈등 사이에서 김씨가 운신할 폭이 지극히 협소하기 때문이다. 김씨도 “운동 논리와 현실 정치의 논리는 다르기 때문에 당분간 학습 기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국민회의도 자칫 잘못하다가는 야당 내의 계파 정치 논리에 휘말릴 가능성을 경계하고 있다. 당장 민주당과 국민회의, 그리고 이종찬 의원의 새한국당 사이에 벌어진 야권 통합 논의 과정에서도 이런 가능성이 일부 드러났다.

 지분 문제와 김씨의 부총재 보장 문제를 놓고 막판 협상을 벌이던 2월 중순, 민주당측 협상 대표인 신계륜 의원이 국민회의측에게 ‘8월 전당 대회 때 들어오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던 것이다. 애초에 8월 통합안은 협상에 임하는 민주당 전체의 입장이 아니었다. 민주당내 비동교동측은 그것이 동교동 쪽의 바람이었다고 해석한다. 최근 동교동은 내외문제연구회의 세력 확장 과정에서 챙겨줘야 할 사람이 많이 생겼다. 지분이야 앞으로 부실·사고 지구당 정리를 통해 조절한다고 하지만, 부총재 1석을 김근태씨에게 할애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은근히 자리를 기대하고 동교동 쪽에 줄선 민주당 중진 의원들의 심기가 편할 리 없었다. 그래서 일단 시간을 벌자는 속셈으로 8월 통합안을 떠보았다는 것이, 동교동을 제외한 다른 계파의 시각이다.

 민주당측 협상 대표의 제안에 국민회의측은 깜짝 놀랐다. 시간은 국민회의 편이 아니라는 점을 누구보다 국민회의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야권 통합은 지난해부터 끌어오던 사안이었다. 민주당내 당권 경쟁과 신민당 내분 사태로 야권 통합이 늦춰지는 상황은 국민회의측에게 결코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 국민회의 내부의 불만과, ‘결국 김근태는 동교동쪽 사람’이라는 나머지 재야의 비판을 잠재우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8월 전당대회로 통합 시기를 미룬다는 것은 치명적일 수 있었다. 2월 전당대회와 8월 전당대회에서 모두 경선을 하지 않는 부총재 자리를 보장받기로 합의함으로써 진통을 거듭하던 야권 통합 문제는 마침내 마무리되었다.

 

껄끄러운 시각 “김근태는 동교동 사람”

 김씨로서는 당장의 고비를 무난하게 넘겼지만 앞날이 순탄치는 않다. 민주당 각 계파가 국민회의를 보는 시각은 기본적으로 ‘동교동쪽 정서에 가까운 세력’이라는 점이다. 이런 시각이 생겨난 배경은 87년 대통령 선거 때로 거슬러올라간다. 당시 재야는 양김씨에게 후보 단일화를 촉구하는 세력과, 김대중 후보를 비판적으로 지지하는 세력으로 갈라져 있었다. 그때 감옥에 갇혀 있었던 김근태씨는 ‘비판적 지지 세력’을 대표했었다. 당시에 노출된 재야의 분열과 정치적 색깔은, 아직까지 재야 내부와 정치권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어쩌면 이러한 제도 정치권의 인식이 앞으로 국민회의의 정치적 입지를 축소하는 쪽으로 작용할지도 모른다.

 김근태씨도 자신을 동교동쪽 사람으로 보는 시각이 민주당에 엄존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민주당내 일각에서는 심지어 “김씨는 합리적인 사람일지라도 국민회의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 다수가 호남 출신이다”라고까지 얘기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우려에 대해 김씨는 “앞으로 충분한 토론과 정치적 합의를 중시하겠다. 우리한테 경각심을 갖도록 촉구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또 “때로는 내가 호남 출신이 아니라는 점을 다행스럽게 여기고, 또 이 점을 지나치게 강조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고 덧붙인다. 김씨는 경기도 부천 태생이다.

 그러나 끊임없이 한 쪽으로 줄서기를 강요하는 현실 정치 논리가, 국민회의 세력을 가만히 내버려 둘지는 알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한때 김근태·장기표 씨와 함께 재야의 40대 기수로 각광받았던 민주당 이부영 최고위원의 최근 행보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부영 최고위원은 지난 2월17일 민주당내 재야 세력이 결집한 개혁정치모임 의장직을 사퇴했다. 개혁모임은 12·12 투쟁과 전당대회 문제를 둘러싼 민주당계파 싸움에 휘말려 심한 내부 분열을 거듭해 왔다. 이부영 최고위원의 의장직 사퇴는 개혁모임이 더 이상 독자적인 정치 세력으로 기능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 나온 것이다.

 개혁모임 내부 분열은 87년 대선 당시 후보 단일화와 DJ 비판적 지지에 섰던 두 세력 간의 갈등에서 비롯됐다. 비판적 지지에 섰던 세력은 평민련 계열로, 당시 김대중 총재가 이끌던 평민당과 합쳤다. 후보 단일화에 섰던 세력은 민주연합 계열로, 나중에 신민당과 ‘꼬마 민주당’이 합칠 때 제도 정치에 진입했다. 무려 8년이 지났는데도 김대중 아·태재단 이사장에 대한 입장 차이가 고스란히 현실 정치권, 그것도 개혁 세력의 논리로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최고위원이 개혁모임 의장직을 사퇴한 배경을 김근태씨의 민주당 합류에서 찾는 시각도 있다. 김씨와 이최고위원은 87년 대선에서 다른 입장에 섰으며, 이후 재야가 분열을 수습해서 다시 건설한 전국민족민주연합(전민련)에서도 서로 다른 노선을 걸어왔다. 이부영 최고위원측은 “국민회의의 민주당 입당과 6월 지방자치 선거, 8월 전당 대회를 앞두고 개혁모임이 더 이상 정치적인 공동 운명체가 될 수 없다는 판단으로 의장 직을 그만두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부영 최고위원의 의장 직 사퇴는 구체적으로는 김대중씨의 정계복귀 움직임에 대한 반발이다. 동교동의 정치 구도에 대한 개혁모임 내의 호응을 더는 두고 볼 수 없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김근태씨로서는 민주당과 통합 선언을 하기도 전부터, 본의 아니게 민주당의 계파 정치 논리에 이름이 오르내린 꼴이다.

 한편 이기택 대표 쪽도 국민회의에 은근히 기대를 걸고 있다. 현실적으로 8월 전당대회에서 당권을 또 한번 장악하기가 쉽지 않은 이대표 진영은, 국민회의와 통합함으로써 민주당내 세력 관계가 재편되기를 바라는 눈치다. 앞으로 이대표 진영은 두 가지 전술을 구사할 것처럼 보인다. 우선 세대교체론 명분을 내세워서 국민회의의 개혁적 이미지를 자극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민회의가 정치적 성공을 거두려면 동교동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독자적 정치 세력을 모색하는 국민회의를 자극하는 식이다.

 

“양식있는 사람들에게 희망 주는 정치 하겠다”

 사실 동교동측은 그동안 재야를 나름대로 ‘관리’해 왔다고 자부한다. 동교동계 일부 인사들은 특히 김근태씨를 챙기는 데도 그가 서운해 하지 않을 정도로 노력을 기울여 왔다고 얘기한다.

 김근태씨는 87년 11월 부인 인재근씨와 함께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 수상자로 선정됨으로써 국제적인 인권운동가로 떠올랐다. 물론 김씨가 인권상을 수상한 것은 독재 정권으로부터 가혹한 고문을 당한 데다 집요한 회유를 뿌리친 대가이지만, 정치권에서는 조금 야박하게 해석하고 있다. 즉 김씨가 인권상 수상자로 선정되는 과정에서 국제적으로 발이 넓은 DJ의 입김이 작용했다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8월 전당대회처럼 정치적 입장이 표로 드러나는 결정적인 시기에 과연 김씨가 동교동과의 관계를 외면할 수 있겠느냐 하는 시각이다.

 이처럼 현실 정치권은 아직 정치 경험이 전무한 ‘재야 인사 김근태’에게 ‘정치적 김근태’로 변신하기를 성급하게 강요하고 있다. 상황에 따라 그러한 정치적 강요는 인연을 내세우기도 하고 명분을 내세우기도 한다. 정치인이 행동으로 결정해야 하는 시기에는, 정치적 색깔이나 노선은 무력해지기 일쑤다. 정치적 결정을 포장하는 논리는 나중에 세우면 그만이다. 더구나 재야 출신들이 아무리 이념적 깃발에 따라 움직이는 특성을 갖고 있다고 해도, 이제 그들에게조차 그 깃발은 약효가 떨어졌다. 종국에는 정치적 이해 관계를 따라가기 십상이다. 이는 개혁모임의 분열에서도 확인됐다. 그것이 현실 정치에서 확인된 논리다.

 국민회의는 현재의 정세를 개혁 대 보수나 민주 대 반민주 구도로 보지 않고, 냉전 수구세력 대 개혁세력의 대결 구도로 인식한다. 이는 이미 오래 전부터 김근태씨가 주창해온 논리이다. 그렇다면 김씨는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현실 정치권의 논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처신할 것이며, 자신의 정치 구상을 어떻게 펴나갈 것인가.

 김근태씨는 이렇게 말한다. “정치권의 호남 대 비호남 구도가 재야에서도 ‘아프게’ 반영되는 것이 현실이고, 이러한 연고주의가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다. 사실 국민회의에는 과거 군사 독재시절 어려운 일을 겪을 때마다, 호남 쪽으로부터 피난처와 재정 지원을 받았던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이것이 어느 정도 정서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본다. 결코 이 점을 무시하지 않는다. 그 점 때문에 사회의 양식 있는 인사들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면서도 기피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는 일이 내가 제도 정치권에서 해야 하고, 하고 싶은 일이다. 이들에게 희망을 제시하지 못하고서는 수평적 정권 교체는 고사하고 악순환이 거듭될 뿐이다.”

 마지막 재야 김근태의 정치 실험은 과연 성공할 것인가. 그가 재야와는 토양이 다른 제도권에서 ‘정치인 김근태’로서 확고히 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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