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만에 고개든 원폭 투하 ‘책임론'
  • 김승웅 특파원 ()
  • 승인 1995.03.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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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통신

 45년 7월, 포츠담 회담에 참석한 트루먼 대통령에게 본국에서 긴급 전문이 날아들었다. 뉴멕시코 주 앨라모고르도에서 실시한 원폭 실험이 성공적이라는 낭보였다. 실험결과는 가공할 수준이었다. 폭발 지점에는 지름4백m짜리 구덩이가 분화구처럼 패었다. 폭탄을 달아맸던 철탑은 1Km 밖으로, 사람 대신 놓아둔 인형들은 10Km 밖으로 사라졌다는 보고였다.

 그 날 트루먼의 일기는 감격과 전율로 가득차 있다. ‘지구 역사상 가장 무서운 폭탄을 발명한 셈이다. (성경의) 예언자가 말해온 불의 심판이 도래한 것인지도 모른다.’

 또 원폭 투하 장소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로 최종 확정된 날의 일기는 자칫 후세에 고개를 들지도 모를 원폭 투하 책임론까지 염두에 두고 쓴 것이 분명했다. ‘전쟁장관 스팀슨에게 명해 군사 목표물은 (일본) 지상군과 해군일 뿐, 민간인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그들이 아무리 야만적이고 무자비하며 광란적이라 하지만, 목표물은 역시 군사적인 것만을 대상으로 국한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두번째 대목을 후세는 기록자의 자기 기만으로 본다. 트루먼은 독일 전선의 드레스덴 시 폭격과 마찬가지로 일본 전선에서도 인구 밀집 지역을 의도적으로 골랐기 때문이다.

 

B29 전시 계획에서 발단

 트루먼은 그래야 일본측으로부터 무조건 항복을 받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전황으로 미루어 군인과 민간인을 구분하려 했다는 대통령의 기록은 가식일 뿐이라는 것이 학계의 지배적인 분석이다.

 종전 50년을 맞아 요즘 미국 전역이 때아닌 원폭 논쟁에 휘말려 있다. 미국의 원폭 투하가 징치(懲治)였느냐 만행이었느냐 하는 논쟁이다. 투루먼의 우려가 적중한 것이다. 논쟁은 ‘에놀라 게이’ 전시 계획에서 발단했다. 에놀라 게이는 45년 8월6일 히로시마 상공에서 원폭을 투하한 B29 폭격기의 이름이다. 조종사의 어머니 이름에서 따 명명된 에놀라 게이의 동체를 워싱턴에 있는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측이 종전 50주년 기념 사업의 하나로 항공 우주 박물관에 전시하려 했던 것이다.

 미국재향군인회와 여러 평화 단체들이 이 계획을 반대하고 나섰다. 진주만 기습을 당한 것은 미국인데, B29를 전시하면 미국이 개전 책임자처럼 보일지 모른다는 것이 재향군인회가 반대한 이유였다. 재향군인회의 우려가 상당 부분 적중했음은 일본의 언론들이 에놀라 게이 전시를 환영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폭격기 전시 계획은 결국 무산됐다. 그러나 논쟁은 문제의 핵심 부위로 옮아갔다. 원폭 투하의 당위성 여부가 50년 만에 논란거리로 등장한 것이다. 논쟁 가운데 새로운 사료는 별로 없다. 새롭다면 사안을 보는 시각이다. 원폭 투하를 보는 미국의 시각이 과거의 인도적 또는 종말론적 시각에서 벗어나, 원폭 사용이 불가피했다는 실용적인 방향으로 바뀌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원폭 불가피론 우세

 ‘만약 원폭을 투하하지 않았다면’이라는 전제로 예일 대학의 제임스 밴드벨드 교수(정치학)가 개진한 논리가 특히 눈길을 끈다. 일본은 지금의 남북한과 마찬가지로 남일본과 북일본으로 나뉘었을 공산이 크다는 논리다. 전쟁이 45년 8월을 넘어 11월쯤 끝났다면 소련군의 홋카이도 진주는 불을 보듯 뻔했다는 것이 밴드벨드 교수의 주장이다. 그의 주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 소행으로 미루어 소련이 한반도를 차지했을 것이라는 논리로 발전한다. 원폭 투하가 없었던들 미군 상륙부대가 규슈를 거쳐 도쿄 평원에 진격하기까지 고전을 면치 못했을 것이 분명한데 이 3~4개월은 스탈린이 한반도를 전부 적화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는 것이다.

 스탠퍼드 대학의 바톤 번슈타인 교수(국제정치)는 트루먼의 어록을 인용하는 실증적인 방법으로 원폭 불가피론을 펴고 있다. 트루먼은 원폭 투하 3일 후 미국 그리스도교회 연방회의에 다음과 같은 서한을 보냈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나는 심한 좌절을 겪었습니다. 그들(일본)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란 철저한 반격밖에는 없습니다. 짐승을 다룰 때는 그 짐승을 먼저 짐승으로 대접하지 않고서는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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