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압선病 역학조사 하라”
  • 박성준 기자 ()
  • 승인 1992.12.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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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시 ‘백납병’ 집단발병 사건…‘초고압철탑대책위’호소에 당국선 “근거없다”


 

특별히 아픈 구석은 없다. 전염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팔·다리 혹은 손목, 발목의 언저리 그리고 무릎, 가슴 등 신체 부위를 가리지 않고 곳곳에 흰 반점이 생긴다. 그대로 놔두면 이 반점은 귤이나 달걀만큼 커지기도 하고 처음 발생했던 부위를 벗어나 이리저리 옮겨다니기도 한다. 때로는 얼굴에도 그런 반점이 생겨 환자와 가족으로 하여금 신경을 쓰게 만든다.

백납병. ‘색소이상증’으로도 불리는 이 질병은 인체의 멜라닌 색소가 부분적으로 없어지거나 기능이 약화돼 피부색깔에 이상이 발생하는 피부병의 일종이다. 아직 정확한 발병원인이 밝혀지지도 않았고 완치되기도 힘든 백납병은 중증일 땐 혈관장애와 환부괴사 증상이 나타난다. 이 질병이 최근 경기도 구리시민에게 커다란 두려움을 주고 있다. 구리시 수택동 등 고압선이 지나가는 일부 지역에서 백납병 환자가 집단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백납병의 발병원인은 다름 아닌 고압선때문”이라는 충격적인 주장이 나왔기 때문이다.

 

백납병 환자 모두 고압선 주변에 살아

3년째 백납병을 앓고 있는 김인혜(8) 양의 어머니 홍수옥씨(36)는 이같은 주장에 동조한다. 인혜양이 백납병에 걸린 때는 지난 90년 겨울. “처음엔 얼굴에 흰 반점이 생기더니 차차 몸 전체로 퍼지기 시작하더군요. 걱정이 돼 병원을 찾았으나 의사들마저 원인은 잘 모르겠다고 했습니다”라고 홍씨는 경위를 설명한다. 현재 인혜양은 서울에 있는 한 피부과 의원을 다니며 치료를 받고 있지만 아직도 손목 팔 무릎 등 여덟 군데에 흉하게 반점이 퍼져 있는 상태이다.

홍씨는 처음엔 딸애의 병을 그저 그런 피부병 정도로 생각했으나 요즘은 생각이 달라졌다. “고압선 탓이 아닌가”하는 의심을 갖게 된 것이다. 현재 구리 시내에서 기름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홍씨 가족은 교문단지에 새로 아파트를 얻어 이사하기 전까지 4년 동안 고압선이 바로 지붕 위를 지나가는 곳에서 살았다. “당시에도 고압선에 대해 께름칙한 생각이 있었으나 막상 딸애가 병에 걸리고 보니 이젠 겁이 나는군요”라고 홍씨는 말한다.

“고압선에서 1백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7년째 살고 있다”는 가정주부 김모씨(46)도 그와 비슷한 처지다. 김씨의 일곱 살 난 둘째 아들이 백납병에 걸려 6개월째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다. 지난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 목욕을 시키다가 아들의 어깻죽지 한쪽이 다른 부위와 색깔이 다른 것을 우연히 발견하고 병원에 데려가 보니 백납병이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바로 이웃에서도 백납병 환자들이 나오고 있으며 그 가운데는 어른도 여럿 있다”고 밝힌 김씨는 “이대로 있다가는 더 지독한 병에 걸릴는지 모를 일 아니냐. 이사를 가든지 무슨 수를 내야 할 것 같다”하고 걱정한다.

92년 12월 현재까지 밝혀진 구리시의 백납병 환자 수는 16명. 이들은 모두 고압선 주변에 살고 있으며 그동안 짧게는 6개월, 길게는 3년 이상 병을 앓아 왔으나 흰 반점이 생기는 증세를 제외하곤 별다른 신체 이상이 없어 그럭저럭 생활해 왔다. 구리시에서 처음 백납병이 주목을 받게 된 계기는 이 지역 시민운동 단체인 경기동북부 시민운동실천협의회(이하 협의회. 회장 박수천)가 고압선과 관련 있을 것으로 보이는 질병을 조사하러 나서면서부터였다. 지난 7월 경기도 공영개발 사업단이 구리시내 교문2단지 택지조성사업을 하면서 예정지역을 지나는 15만4천 볼트짜리 초고압선을 아파트 단지에서 불과 17~30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 이설하겠다고 발표한 직후였다(지도 참조).

주민들은 처음엔 단순히 “땅값이 떨어질 우려가 있고 주택가에 너무 가까이 있으면 안전사고의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고압선을 주택가에서 될 수 있는 대로 멀리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공영개발사업단의 고압선 이설공사 용역을 맡은 한국전력은 이를 일언지하에 거부했다. “우리는 용역을 맡았을 뿐 이설을 검토할 권한이 없다”라는 이유였다. 협의회는 지난 70년대에 설치된 이 고압선에 분명히 문제점이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이를 뒷받침할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그 결과 알아낸 것이 지난 91년 경기도 김포군 양촌면과 경기도 고양시 항동동 사례. 34만5천 kw짜리 고압선이 들어설 예정이던 양촌면에서는 기존의 고압선이 지나는 곳에서 농작물과 가축이 원인 모르게 죽어가는 괴변이 자주 일어나 주민의 고압선 철탑 가설 반대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최근 공사가 진행중인 경기도 고양시 항동동도 비슷하다. 주민들이 공사반대를 위한 대책위원회까지 만든 이 지역에는 손상철씨네를 비롯해 고압선이 지난 곳을 따라 쌍둥이를 출산한 가구가 유난히 많다. 지역 주민들은 “한동네에 쌍둥이 가구가 일곱집이나 있다면 이상한 일 아니냐”하며 그것이 고압선의 영향인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고압선 전자기장 유해성은 입증된 사실”

협의회 사무실에 백납병을 호소하는 소리가 줄을 잇기 시작했다. 협의회측은 접수된 사람의 거주지역을 분석해 본 결과 백납병 환자가 고압선이 지나는 지역에서 집중 발생하고 있는 뚜렷한 현상을 발견했다(지도 참조). 협의회는 또한 올봄 구리중학교에 다니던 학생이 백혈병으로 사망했다는 소문을 듣고 고압선으로 인한 발병이 아닌가 의심하여 진상을 추적중이다. 협의회측은 현재 학생의 신원과 그 학생이 살던 지역을 수소문하고 있으나 아직 구체적인 증거를 잡아내지 못한 상태이다.

구리시 주민들은 집단행동에 들어갔다. “철탑 가설을 범시민적으로 거부하자”는 구호 아래 초고압철탑반대범시민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를 구성하고 시와 공영개발사업단, 한전측을 상대로 싸움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주민들은 이미 지난 12월초 고압선 주변 지역주민에 대한 역학조사를 실시할 것을 구리시에 요구했다. 협의회 회장으로서 공대위 위원장을 맡고 있는 박수천씨(39)는, 지난 87년 인근 미금시에서 직업병 환자를 ‘중풍환자’로 몰아 진상을 은폐하려 했던 원진레이온 사건을 예로 들며 “문제가 생긴 주민에 대한 정밀한 역학조사를 실시하고 기존 철탑 설치 계획을 전면 수정하는 등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주민들의 불안감이 날로 확산되고 있는 반면 경기도와 구리시는 여전히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택지개발사업상 불가피하다”며 이설계획을 수정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당국은 ‘의견제출’을 요청받은 대한피부학회가 구리시측에 회신한 답변내용을 내세우고 있다. 답변서의 실무를 맡았던 서울 가톨릭 성모병원 조백기 박사(피부과)는 “어떤 근거로 백납병을 주장하는지 정확한 상황이 파악되지 않아 일단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임’이라는 회신을 보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주민들의 상상이 전혀 터무니 없다고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실정이다. 현재 공대위 측으로부터 자문을 의뢰받은 서울 성수의원 원장 양길승씨는 “고압선 영향으로 인한 질병 발생 사례가 더러 있었다. 피부병과 고압선의 관계를 입증할 만큼 구체적인 사례가 보고된 예는 아직 없지만 고압선의 전자기장이 인체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입증되고 있는 만큼 주민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건강권과 환경권은 헌법에 명시된 국민의 권리이다. 구리시민들은 ‘주택 2백만호 건설’ 사업의 일환으로 추진 중인 교문지구 택지조성사업의 혜택보다 헌법에 명시된 건강권의 권리가 보장되기를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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