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계에 ‘소사장제 주의보’
  • 허광준 기자 ()
  • 승인 1992.12.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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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백여 업체 노조 와해…기업주엔 생산성 향상·구인난 해결·노조 무력화 ‘1석 3조’


 

시계나 가전제품에 쓰이는 수정진동자와 발진기를 생산하는 ㅅ전기(서울 구로공단)의 노동조합은 최근 조합원 수가 급격히 줄어 어려움을 겪고 있다. 89년 3월 처음 조합이 결성될 때는 전체 종업원 1천3백명 중 조합원이 1천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지금은 조합원 수가 85명밖에 안된다. 계속되는 불황과 인력난으로 종업원 수가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최근 이 회사의 노조원이 급격히 줄어든 것은 소사장제 때문이다.

최근 이 회사 생산직 사원 1백50여명은 사직서를 내고 다른 회사로 옮겼다. 그러나 이들은 여전히 예전의 작업장인 ㅅ전기로 출근한다. 공장 작업장 식당 기계까지 ㅅ전기에 있을 때 쓰던 것이다. 달라진 것은 자신이 속한 회사 이름과 ‘사장님’뿐이다.

이들은 원래 회사에서 분리 독립된 소사장 회사로 들어간 것이다. 이 회사에 소사장제가 도입된 것은 지난 9월이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7개 공정이 독립 기업으로 분리되고 해당 노동자는 이동 명령을 받았다. 노조는 이에 대해 반대 입장을 밝히고 소사장제 도입을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아울러 노사협의회를 소집해 이 문제를 논의하자고 요구했다. 그러나 회사측은 “소사장제는 경영이 어려운 상황에서 기업을 유지해갈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므로 추진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며 계속 확대해 나갔다. 반대하는 종업원은 다른 부서로 이동시키고 신입사원을 뽑아 독립기업으로 보내는 방식을 썼다.

 

업계 “중소기업 경영난 개선에 특효”

10월 초 노조는 파업에 들어갔다. 14일 동안 계속된 이 파업에서 노조위원장을 비롯한 핵심간부 4명이 해고됐다. 파업중에도 작업장에서는 칸막이를 치고 공정을 독립시키는 작업이 진행됐다. 그대로 파업을 계속하다가는 노조가 와해되는 결과밖에 없었다. 노조는 모기업이 직영하는 공정을 일정 정도 유지하고 충원을 통해 적정한 수준의 종업원 수를 유지할 것을 요구하는 선에서 소사장제 도입을 수용했다. 결국 생산부문 여섯 개 과 가운데 5개 공정만 모기업 직영으로 남고 나머지 20개 공정은 모두 주임이나 반장 조장 출신의 소사장에게 넘어갔다.

불황으로 기업 사정이 어렵게 되자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소사장제가 최근 활발히 도입되고 있다. 이 제도는 같은 사업장 안에서 일하던 반장 등 고참직원이 생산라인이나 공정의 일부를 사장으로부터 떼어 받아 ‘소사장’으로 책임지는 방식이다(《시사저널》 158호 기사 ‘중소기업 버팀목 소사장제’ 참조).

소사장제는 작업라인을 독립시켜 소단위 책임으로 운영함으로써 생산성이 향상되고 만성적인 구인난도 동시에 해결하는 효과를 거둔다. 실제로 건축자재를 생산하는 ㄹ사는 소사장제를 도입하고 나서 생산량이 70%나 늘었다. 보일러를 만드는 중소기업인 ㄱ사는 소사장제를 시작한 지 1년 만에 한달 생산량이 3백대에서 7백대로 늘었다.

무역협회 등 업계에서는 소사장제가 중소기업의 기반을 강화하고 제조업의 경쟁력 강화를 꾀할 수 있는 새로운 경영 형태이며 특히 산업구조 조정기에 있는 우리 경제 상황에 적합한 제도라고 평가한다. 생산성 향상과 더불어 이 제도의 큰 매력은 ‘눈엣가시 같은’ 노동조합을 아예 와해시키거나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종업원이 작은 기업으로 분산되어 고용형태가 변하므로 모기업의 노동조합은 인원 감소로 자연 고사하고 만다.

 

노동계 “노동환경 악화시키는 자본의 횡포”

위의 ㄱ사에서는 종업원 중 비조합원을 소사장제로 전직시키고 조합원에게는 기본급만 주고 일을 주지 않는 수법을 썼다. 결국 조합원은 스스로 소사장 업체로 옮기고 노조를 해산했다. 다른 ㅎ사의 경우 조합원이 계속 줄다가 간부 6명만이 남게 되자 전원 사퇴하고 노조를 해산했다. 어떤 회사에서는 노조간부가 소사장으로 ‘변신’하기도 했다. 소사장제는 다양한 형태를 보이지만 노동조합이 없어지거나 약화되는 현상은 같다. 이에 따라 한국노동자조합총연맹(노총)이나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등 노동단체는 노동운동을 위축시키는 소사장제에 대응하기 위해 부심하고 있다. 소사장제 도입으로 노조가 와해된 기업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아직 없지만 노동계에서는 이미 3백여 업체를 넘은 것으로 보고 있다.

노동단체들은 소사장제가 노동환경을 열악하게 만드는 자본측의 횡포라며 단호히 반대하는 입장이다. 이들은 이 제도가 ‘노동자들을 쥐어짜서 기업의 어려움을 해결하려는 방식’이라고 비난한다.

소사장제 실시로 늘어난 생산량은 작업시간의 증가와 노동강도의 강화로 나타난 일시적인 것일 뿐 결코 바람직한 방향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소사장제가 ‘일한 만큼 가져간다’는 성과급의 성격을 갖기 때문에 오랜 시간 강도높은 노동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처음에는 생산량이 눈에 띄게 늘고 노동자가 받는 보수도 전보다 훨씬 많아지지만 몇 개월만 지나면 그 한계가 드러나고 만다는 것이다. 장시간 노동이 계속되면 노동자의 노동력 자체가 황폐해져 생산 능률이 떨어지고 제품 불량률도 높아진다.

노동자들은 대체로 당장 임금이 더 많다는 점에 끌려 소사장제를 크게 반대하지 않으며, 오히려 노동자들이 소사장제 도입을 요구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들이 작은 기업으로 쪼개지면서 사원 복지가 열악해지고 각종 수당이나 퇴직금 산재보험 같은 혜택이 없어지므로 결국 노동조건은 더 나빠지는 셈이다.

 

“국가·기업 책임 노동자에 전가하는 것”

소사장 기업에 속한 노동자들의 고용이 불안정한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소규모 하청도급 기업인 소사장 기업은 경영난으로 모회사의 일감이 떨어지면 이내 경영에 어려움을 겪게 되고, 노동자들도 어려운 형편에 빠진다. 집단해고나 실직의 위험이 항상 존재하게 되며 이에 대한 노조 등의 방어막도 없다. 이 때문에 소사장제는 모기업의 어려움을 아래로 떠넘기려는 방식이라는 의심을 받는다.

전노협의 윤우현 정책위원은 “중소기업을 살리기 위한 국가정책이나 기업의 기술 투자 등 국가와 기업이 져야 할 책임을 노동자에게 떠넘기는 것이 소사장제”라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했다.

노동계는 소사장제 도입으로 노동조합이 와해되어 노동조건이 악화되는 데에 특히 주목한다. 구로노동연구소의 정범진씨는 “노동자의 힘은 단결에서 나오고 노동조합은 이를 보장해주는 유일한 장치이다. 소사장제는 노동조합을 무너뜨려 결국 노동자의 생활수준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는다”라고 말했다.

노동단체는 이에 따라 각 사업장에 대해 소사장제의 ‘본질’을 제대로 알리는 교육 홍보활동을 펼 것을 추진하고 있다. 또한 그간의 노조 활동이 임금 인상에만 치중, ‘노조=임금 인상 투쟁’처럼 잘못 인식됨으로써 임금이 인상되면 노조 자체의 존재 이유가 약해지는 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소사장제는 총액임금제와 더불어 93년 노동계에서 최대 논란거리로 떠오를 전망이다. 노총의 이정식 조사부장은 “단순히 고용형태를 바꿔 노동강도를 높임으로써 생산성 향상을 꾀하는 것은 산업구조 개선 방향에도 역행하는 전근대적 발상이다”라며 정부가 중소기업 중심의 경제정책을 펴고 각 기업이 기술·신제품 투자 규모를 확대하는 것이 근본적인 치유책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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