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소화 폭락 뒤에 미국의 ‘실리’ 있다
  • 남유철 기자 ()
  • 승인 1995.03.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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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지원안, 자국 안보와 투자자 보호가 목적

지난 1월31일, 새벽녘에야 겨우 잠을 처했던 클린턴 대통령은 자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일찍 일어났다. 의회가 멕시코 지원안에 동의하기를 주저하고 있는 가운데, 클린턴은 그날 멕시코 사태 해결을 위해 의회의 동의가 필요 없는 대통령 행정명령을 사용하기로 결심하고 있었다. 이미 국민 지지도가 땅에 떨어져 있는 처지에서 멕시코 금융 위기가 원만히 해결되지 않을 경우 재선에 대한 실낱 같은 희망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날 아침 봅 돌 공화당 상원 원내총무와 뉴트 깅리치 하원의장 등 의회 지도부는 급히 백악관으로 달려왔다. 의회 지도자들과 클린턴의 비상 회의 시각은 8시45분. 레오 파네타 백악관 비서실장과 로버트 루빈 재무장관, 샌디 버거 국가안보 보좌관 3명은 이 시각까지도 밥을 꼬박 새운 채 전화통에 매달려 있었다. 클린턴이 의회 지도자들과 담판하기 이전에 주요 관계국 정부 지도자들과 오늘 발표할 ‘계획Ⅱ’에 대한 협의를 끝내야 하는 초읽기에 몰려 있었다.

 의회 지도자와 참모 들에게 클린턴은 비장한 목소리로 “더 이상 시간이 없다”는 말을 꺼냈다. 멕시코 금융 위기가 미국의 안보 및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강조한 뒤 클린턴은 지원안을 바로 발효시키기 위해 대통령 행정명령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결심을 통보했다. 당시 멕시코 페소화의 폭락으로 빚어진 멕시코 금융 사태는 멕시코뿐만이 아니라 전세계 금융시장을 파국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멕시코 금융 위기는 단순한 경제 위기가 아니라 미국의 국가 안보와 직결된 문제임을 클린턴은 여러 차례 강조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멕시코에 대한 사상 최대의 국제적 지원금이 결정된 이 날의 백악관 회의를 추적한 영국의 유력 경제지 <파이낸셜 타임스>에 의하면, 이 비밀 회의에서 멕시코 사태 해결을 위한 계획Ⅱ에 반대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당파를 떠나 의회 지도자들은 멕시코 금융 위기의 심각성에 대해 클린턴과 생각이 같았다. 그러나 불법 이민으로 미국민의 감정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멕시코에 거액의 지원금을 의회가 가결한다는 것은 미국 의회 정치의 현실상 불가능 하다는 사실을 그들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IMF와 다른 나라에 320억달러 떠맡겨

 백악관에서 열린 아침 비상 회의가 비밀에 가려진 가운데, 11시 15분 클린턴은 워싱턴의 메리엇 호텔로 이동했다. 이 호텔에서 진행되고 있는 미국 주지사회의에서 클린턴이 연설하기로 예정 되어 있었다. 클린턴 참모들은 1초도 빼놓지 않고 백악관을 뒤지고 있는 언론의 허를 찌르기 위해 이미 일정이 잡혀 있던 주지사회의 연설문에 계획Ⅱ에 대한 내용을 넣기로 계획을 짰다.

 미국 주지사들이 전부 모인 주지사회의에서 클린턴은 멕시코 금융 위기를 5백20억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돈으로 잠재우겠다는 계획Ⅱ를 불쑥 발표했다. ‘멕시코 금융 위기는 미국의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급박한 문제이다. 그 촉박함 때문에 의회 지도자들은 내게 헌법이 부여한 대통령으로서의 비상 권한을 사용하라고 권고했다. 자금 지원에 참여할 관계국들과도 이미 협의를 끝냈다’는 요지였다.

 의회의 동의를 받아 지원금을 조성할 수 없을 경우 백악관은 행정명령으로 사태를 돌파한다는 계획Ⅱ를 이미 수립해 놓고 있었다. 다만 그 시기가 문제였다. 미국 언론들의 자평에 의하면 계획Ⅱ는 이라크 침공시 미국이 동원했던 기밀 작전의 경제판이다.

 계획Ⅱ에 의하면, 미국은 외환안정기금 중 2백억달러를 동원하고 나머지 금액은 주요 선진국과 국제통화기금(IMF)에게 떠맡기도록 되어있다(국제통화기금은 최근 한국 정부도 이에 협조해 달라고 통보한 바 있다). 이 안에 따르면 유럽과 일본을 비롯한 주요 선진국들은 약 백억달러를 출연하도록 되어있다. 출연하는 기술적 방식은 각국 중앙 은행의 중앙 은행이라고 할 수 있는 국제결제은행(BIS)을 통해서 단기 융자로 즉각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멕시코 지원안은 클린턴이 주지사회의에서 발표하는 순간까지 유럽 관계국과 ‘합의’되지 않았음이 최근 유럽 언론의 보도로 확인되고 있다.

 유럽의 주요 관계국 책임자들은 당시 뉴스를 통해 이 사실을 처음 알았다고 유럽 언론에 하나둘 고백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도 1백78억달러를 제공하도록 되어 있으나, 최근 이사국 중 일부는 사전에 전혀 협의를 받지 못했다고 반발하고 나섰다. 이라크 사태 때 엄청난 지원금을 내고도 걸맞는 예우를 받지 못했던 일본은 이번에도 아예 소외됐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멕시코 금융 위기는 94년 12월 1일 세디요 대통령이 살리나스의 뒤를 이어 멕시코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시작됐다. 집권당 대통령 후보 암살로 멕시코 집권당 제도혁명당의 집권 능력에 의문이 제기되면서, 외국 투자자들은 투자액을 급격히 회수하기 시작했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페소화로 가지고 있는 자산을 모두 달러화로 바꾸어 나가자 이미 외환보유고가 바닥 나 있던 멕시코는 페소화 환전을 중단해야 할 위기에까지 몰렸다. 한 나라가 환전을 강제로 중단하거나 환전 불능 상황으로 빠져드는 것은 개인으로 치면 파산 선고를 받는 것과 같다.

 멕시코 페소화의 폭락은 주식시장에서 외국인 투자자들의 투매로 이어졌다. 멕시코 주가는 금년 들어 무려 24.3%가 하락했고, 그 영향으로 세계 주요 증시가 동반 하락하는 현상을 보였다(74쪽 도표 참조). 오늘날의 금융시장은 전세계적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멕시코 금융 위기를 촉발하고 세계 증시나 외환시장을 흔들고 있는 외국인 자금의 정체는 대부분 개도국 증시에서 높은 수익을 노리고 뛰어드는 미국의 증시 투자기금들이다. 작년 한 해 멕시코 증시에 유입된 미국의 주식투자액은 무려 4백50억 달러에 달했다. 멕시코의 주가 폭락은 바로 이들 미국 증권회사와, 그들에게 돈을 댄 미국의 기관이나 일반 투자자가 손해를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유럽에서는 미국 증권 투자가들의 이익 보호가 미국의 안보 이익이고 세계 금융 질서를 수호하는 것이냐는 비난이 제기되고 있다.

 

힘의 논리 보여준 미국의 처방

 멕시코·태국·중국과 같이 새로이 개방을 추진하고 있는 개도국들, 이른바 ‘신흥 시장’에 투자하는 주식 상품은 최근 수년간 미국 투자자들에게 최고의 인기를 누려 왔다. 높은 경제 성장을 이룩하고 있는 이들 국가에 돈을 빌려주는 것이 가장 많은 이자와 수익을 내기 때문이다. 미국 증권가의 투기성 자금은 그 어느 나라보다도 멕시코에 집중되어 있었다. 유럽 언론이 미국의 멕시코 지원안에 대해 미국 증권가를 보호하기 위해 미국이 남의 나라 돈을 마음대로 끌어다 쓰는 꼴이라는 비판을 제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멕시코 사태를 보고 미국에서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는 경제학자인 하버드 대학 제프리 삭스 교수는 미국의 대외 경제정책의 ‘비도덕성’을 강도 높게 비판한다. 국제 경제의 안정과 발전이라는 명분을 내세운다면 금융 투기장으로 변해버린 멕시코보다 러시아와 동유럽에 금융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옛 공산국가들이 자본주의 체제하의 민주주의로 이행하기 위해 처절한 몸부림을 하고 있는데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과 국제통화기금은 단 1달러 지원도 아까워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도 미국 증권가의 이익이 걸려 있는 멕시코에는 5백20억달러라는 천문학적인 액수를 아낌없이 쏟아 붓는다는 지적이다. 삭스 교수는 “러시아와 동유럽은 미국 증권가 사람들의 이익과 아무 관계가 없다. 그것이 이들 국가의 불행이다”라고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삭스 교수는 유럽연합이 미국 증권가의 로비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미국 정부의 독선과 이기주의를 견제하지 못하고 있다고 동시에 비난하고 나섰다.

 클린턴의 멕시코 지원안이 발표된 이후 신흥 시장에 투입되었던 미국의 투자 자금은 뉴욕 증권시장으로 회귀하고 있다. 멕시코 사태를 계기로 일단 미국 투자자들이 신흥 시장을 위험스럽게 보기 때문이다. 해외에 투자되었던 미국자금이 뉴욕으로 돌아오면서 주요국 증시는 폭락하는 반면 뉴욕 증시는 오히려 달아오르고 있다(74쪽 도표 참조).

 그러나 멕시코에 대한 엄청난 지원 금액이 멕시코로 이동할 것을 계산한 외환 딜러들은 달러 하락을 예견하여 마르크화로 도피하고 있다. 마르크화가 오르면서 이탈리아와 같은 약세 통화가 폭락하는 후유증이 연쇄적으로 나타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멕시코 사태가 미국의 ‘독선적’ 처방으로 더 큰 후유증을 남길지 모른다는 우려가 서서히 제기되고 있다. 멕시코 사태는 큰 돈이 작은 돈을 삼키는 힘의 논리, 이른바 냉전 이후 처음 세계가 목격한 신국제경제 질서의 한 단면이다.

南裕喆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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