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은 풍요, 자금은 빈곤
  • 김상익 차장대우·장영희 기자 ()
  • 승인 1992.12.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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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기업 지원 처방전은 3백가지 이상, 하루 29개 업체 문닫아


 


한국의 중소기업 문제에 관한 한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라는 격언은 통하지 않는다. 대통령이 중소기업의 상업어음을 무제한 할인하라고 특별히 지시할 정도로 중소기업을 살리겠다는 정부의 의지는 굳지만 하루 평균 29개의 중소기업이 부도를 내고 쓰러지고 있다.

중소기업을 육성할 구체적 정책이 마련되지 않아서 그런 것도 아니다.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 수단은 너무 많아 혼란스러울 지경이다. 올해도 중소기업을 지원하기 위한 처방전은 숱하게 쏟아졌다. 종전에 있던 것도 3백여가지나 된다. 그럼에도 한 중소기업 사장은 정부의 정책 부재를 원망하는 유서를 남긴 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같은 모순이 생겨나는 주된 원인은 책상머리에서 나온 정책 입안자의 생각과 기업이 처한 현실이 따로따로라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대통령이 어음할인을 특별히 지시했다고 하지만 수만개에 이르는 영세 제조업체에겐 ‘해당 사항이 없기 때문’이다.

제도만 문제되는 것은 아니다.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의 실태 조사에 따르면 60% 가량이 ‘지원 제도를 알지 못해’ 혜택을 못받는다. 3백가지가 넘는 ‘그림의 떡’을 ‘입 안의 떡’으로 바꾸게 할 수 있는 대책이 나오지 않으면 정책의 풍요 속에서도 ‘굶주림’에 시달리는 중소기업의 도산 행렬은 계속될지 모른다.

 

경영 성과 계속 떨어지는 중소기업

정부는 80년대 들어 중소기업을 육성 지원하는 데 적극 나서 각종 지원 수단을 마련했다. 지난 10여년간 중소기업이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날로 커졌다. 종업원 5인 이상 3백인 미만의 중소기업은 90년 현재 6만7천6백79개로 전체 제조업체의 98.3%를 차지한다. 고용 인원은 61.7%, 생산량은 42.7%, 부가가치 비중은 44.3%에 이른다. 중소기업이 총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9.9%(91년말 현재)이다. 중소기업을 경제의 ‘개미군단’이라 부르는 데 손색이 없다.

이같은 양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질적으로는 오히려 뒷걸음질쳤다. 한국생산성본부가 분석한 바에 따르면 대기업 1개 사와 비교할 때 중소기업 1개 사의 경영 성과는 개선되기는커녕 오히려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소기업 1개 사의 생산량 평균치는 80년 4억2천3백만원에서 89년 9억7천4백만원으로 늘었다. 반면 같은 기간중 대기업 1개 사의 생산량은 2백30억원에서 6백91억으로 3배 가량 껑충 뛰었다.

대기업 1개 사의 생산량을 1.00으로 고정할 경우, 중소기업 1개 사의 생산량은 80년 0.018에서 89년 0.014로 주저앉았다. 중소기업이 대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생산이 위축된 것이다. 매출액과 부가가치도 마찬가지인 것으로 분석됐다. 중소기업의 매출액 대비 경상수익률은 88년까지 대기업보다 높은 수준을 유지했으나 89년부터 역전되었다(69쪽 표 참조). 이같은 통계들은 중소기업의 속병이 얼마나 깊은지 말해준다. 중소기업이 전면적 위기를 맞고 있다는 말은 과장된 것이 아니다.

중소기업이 위기를 맞게 된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다. 우선 중소기업 자체의 문제를 들 수 있다. 개인기업이건 주식회사(전체의 30%)이건 중소기업은 일반적으로 조직의 힘에 의존하지 않고 사장 한사람의 경영 능력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

중소기업은행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중소기업 경영자가 자주 범하는 경영상의 오류는 무리한 사업 확장, 자금관리 소홀, 계획성 없는 경영, 과도한 외상매출, 불합리한 인사관리 등이다. 특히 종업원 2백인 이하 중소기업은 3개월 이상의 사업계획을 세우지 못하고 있으며, 판로 조사도 하지 않은 채 주먹구구식 경영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90년 현재 종업원 2백~3백명 규모의 튼튼한 중소기업은 7백84개(1.2%)에 불과하다.

중소기업 내부의 취약성은 ‘주는 떡’도 못 얻어먹는 결과를 낳는다. 한 예로 91년 12월에 개정된 조세감면규제법은 4개의 특례를 베풀고 있다. 제13조는 중소기업이 투자를 계획할 경우 사업용 자산 총액의 20%를 필요경비로 미리 인정하고 4년 뒤에 세금을 납부할 수 있도록 했다. 그만큼 신규투자 부담을 덜어주자는 것인데 이같은 특례를 이용하는 기업은 많지 않다. 종업원 30~40명 규모의 중소기업 1백여개사의 세무업무를 대행하는 한 세무사는 “대부분의 중소기업이 투자계획서·투자완료보고서·세액공제 신청서 등 복잡한 서류를 작성할 인력이나 능력을 갖추지 못해 그같은 혜택은 엄두도 못내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우수 인력을 확보하기 어려운 중소기업은 무역업무를 몰라서 엉뚱한 피해를 보기도 한다. 대기업과 하청관계를 맺은 중소기업은 대기업으로부터 수입 원자재를 공급받아 부품을 제조·납품하고, 대기업은 이를 조립·생산해 수출하는 경우가 많다. 원자재를 들여올 때 대기업은 관세를 문다. 이 관세는 원자재를 공급받는 중소기업에 떠넘겨진다. 대기업은 수출하면서 수입할 때 낸 관세를 환급받는다. 관세를 최종적으로 부담한 쪽은 중소기업이기 때문에 돌려받은 관세는 마땅히 하청업체에 돌아가야 하지만 대기업이 입을 씻는 경우가 적지 않다.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 金政洙 조사부장은 “요즘에는 중소기업에도 무역업무를 아는 사람이 많아 관세를 돌려받기도 하지만, 대기업이 관세를 돌려줄 때 어음을 끊어주기 때문에 이래저래 피해를 보기는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환율 지식이 없어 손해보는 경우도 있다. 대기업은 중소기업과 계약을 하면서 원화가 절상되면 납품 단가를 원화로 표시하고, 절하되면 달러로 표시해 환차익을 챙기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때 중소 하청업체는 환자손을 고스란히 떠안게 된다. ‘대기업과의 협력 강화’는 정부의 중소기업지원정책의 단골 처방이지만 현장에서 벌어지는 이같은 사례는 협력이라는 말과 거리가 멀다.

게다가 중소기업은 지난해부터 산업구조조정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이에 따라 노동집약적 산업에 집중된 중소기업 가운데 일부는 사양산업으로 몰릴 만큼 경쟁력이 크게 떨어졌다. 또 국내외 경기침체로 인해 상품이 안 팔리게 되자 도산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우리나라에만 있는 중소기업 전담은행

정부는 중소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8개의 법률에 근거해 모두 3백가지가 넘는 지원수단을 내놓고 있다. 특히 금융지원은 외견상 막대한 규모로 이루어진다. 그런데도 중소기업이 자금난으로 여전히 시달린다면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중소기업 전담은행(중소기업은행·국민은행·동남은행·대동은행)을 설치하고 중소기업 의무대출비율이라는 제도도 마련했다. 대출 증가액의 일정 비율을 중소기업에 반드시 대출해야 한다는 규정을 금융기관에 걸고 있는 것이다. 담보능력이 부족한 중소기업을 위해서는 신용보증기금과 신용기술보증기금을 설치해 신용대출이 가능하도록 했다. 92년 9월 말 현재 중소기업에 대한 신용보증 금액은 8조5천5백억원(잔액 기준)에 이른다. 또 올해 들어 7천5백억원의 특별자금을 조성했고 상업어음할인활성화대책도 나왔다. 금융기관 지원뿐 아니라 구조조정기금·창업기금 등의 재정 지원도 이루어진다.

이같은 지원이 이루어진 결과 올 9월말까지 은행의 총대출금 72조9억여원 중 중소기업에 대출된 것은 41조원에 이른다(56.3%). 상공부의 한 관계자는 “어쨌든 많은 돈이 중소기업에 돌아가지 않았느냐”하고 반문하며 “중소기업에 대한 자금 지원이 적은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중소기업이 은행돈을 얻어쓰기는 작년보다 더 어려워졌다. 지난해 9월말 은행의 총대출 중 중소기업에 대한 대출 비중은 59.1%로 금년 9월보다 2.8% 포인트 높았다.

담보를 요구하는 금융관행은 정부의 강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자금의 효율적인 공급을 가로막는다. 돈장사를 하는 은행은 돈 떼일 것을 염려해 부동산 등 담보를 확보하려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중소기업은 담보능력이 크게 부족하다. 결국 중소기업지원 자금은 장래가 유망한 중소기업보다는 ‘안정되고 믿을 만한’ 일부 중소기업에 돌아갈 수밖에 없다. 한 중소기업인은 이같은 금융 모순을 다음과 같이 비꼬았다. “나는 은행대출 때문에 큰 곤란을 겪지 않는다. 은행 문턱이 높다지만 애당초 은행에 돈 빌릴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중소기업 의무대출 비율도 숫자 놀음에 의해 꿰어 맞춰지는 경우가 많다. 서울신탁은행의 한 간부는 “뚜렷하게 대기업에 나간 돈을 빼고는 모든 대출을 중소기업 몫으로 쓸어넣고, 월말에 대기업 몫을 일시적으로 줄이는 등의 방법을 동원해 대출 실적과 관계없이 의무대출 비율을 짜맞춘다”고 말했다.

담보능력이 부족한 중소기업은 신용대출이 많아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재벌그룹 계열사와 달리 중소기업이 신용대출을 얻어내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 어렵다. 은행이 중소기업에 대한 신용대출을 꺼리는 데는 그 나름대로의 속사정이 있다. 한일은행의 한 지점장은 “어느 중소기업의 장래가 밝다고 해서 돈을 빌려주었다가 돈을 떼였을 경우 중대한 과실이 인정되면 변상 책임을 진다”고 털어놓았다. 중대한 과실이란 개념 규정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모호해 신용대출을 기피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은행은 아무래도 중소기업보다는 대기업을 선호한다. 큰 기업과 거래할 때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많기 때문이다. 거래 규모가 커 은행에 이익을 많이 안겨줄뿐더러 외환수수료 등 부가적인 이익도 생긴다. 은행 입장에서는 대기업이 중소기업보다 더 고맙고 중요한 고객일 수밖에 없다.

은행에서 큰 부작용 없이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이 비교적 잘 이루어지는 것은 상업어음할인(대출)이다. 중소기업은 대기업에 상품을 팔아 대개 현금보다는 3~6개월짜리 어음을 받는다. 중소기업은 당장 운전자금이 급하므로 만기가 안된 어음을 은행에서 일정액을 떼고 현금화한다. 은행들이 중소기업 어음할인에 ‘성의’를 보이는 것은 한국은행이 할인액의 70%까지 자동적으로 재할인해주기 때문이다. 이 자금의 금리가 7%로 낮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올들어 정부는 할인한도와 어음기간을 연장했다. 또 어음을 할인하려면 어음이 적격업체의 것이거나 할인을 받으려는 업체가 적격업체여야 가능한데, 중소기업에 대해서는 적격업체 평점(45점)을 대기업(50점)보다 낮추었다. 그렇다고 해도 적격업체로 선정된 중소기업체 수가 절반이 채 못되는 3만2천개에 불과하므로 ‘절반의 고통’은 계속되는 셈이다.

한국생산성본부 趙聖基 전문위원은 “정부의 정책적 지원은 능력이 부족한 중소기업에게는 피해로 작용하는 경향이 많다”는 견해를 밝혔다. 담보능력이 있거나 신용도가 높은 중소기업에 자금이 몰리기 때문에 정작 돈이 필요한 기업에는 지원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중소기업이라고 해서 무조건 지원하라는 것이 아니라 제도와 관행 때문에 살아남아야 할 기업까지 도산하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대기업 환영할 수밖에 없는 은행

결국 문제는 돈으로 귀착된다. 돈이 있어야 기술개발도 하고 구조조정 노력도 할 수 있다. 열악한 근무 여건도 돈이 넉넉해야 개선할 수 있다. 중소기업의 자금사정이 원활해지려면 현재의 금융구조부터 개선돼야 한다. 한국은행의 한 임원은 “은행들이 대출을 기피한다고 비난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이 원활하지 못한 것은 근본적으로 금융자금이 대기업에 편중돼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전체 제조업 가운데 종업원 3백인 이상 대기업은 1천2백개(1.3%)에 불과하다. 은행대출 가운데 중소기업으로 나간 것이 56% 남짓이고 가계대출이 10% 가량 된다면 나머지 34% 정도는 대기업 몫이다. 98명이 넘는 사람 앞으로 돌아간 떡이 절반이 넘는다고 해도 2명도 못되는 사람이 3분의 1을 차지한다면 불균형적인 분배가 아닐 수 없다.

조흥은행의 한 부장은 “유망한 중소기업에 돈을 꿔주고 싶어도 한정된 금융자금을 대기업이 이미 많이 갖고 있으므로 재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고 밝힌다. 산업연구원 백낙기 중소기업실장은 “대기업은 자기 신용으로 증권시장을 이용하거나 해외에서 채권을 발행하는 등의 방법으로 자금을 조달해야 한다. 그럴 때 중소기업에 자금이 돌아갈 여력이 생긴다”며 대기업에 편중된 여신이 시정되지 않으면 중소기업의 위기를 해소할 방법이 없다고 진단한다.

대기업의 여신편중이 해소되지 않는 것은 재벌의 소유 구조와도 관계가 있다. 신탁은행의 한 지점장은 “재벌이 증자 등의 방법으로 자금을 조달하면 지분율을 유지하기 어려워지므로 운전자금이든 시설자금이든 무조건 은행돈을 빌리려고 한다”고 말했다. 재벌그룹의 최고경영자들은 기업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기 위해 67%의 지분을 유지하려고 한다. 친인척 등 특수 관계인의 지분까지 합쳐서 지분율 67%를 확보한 그룹이 상당수 있는데, 이들은 지분율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증자 등의 자금조달 방법을 피하고 은행을 찾는다. 기왕에 지고 있는 은행빚도 되도록 갚지 않으려 하는 것이 재벌그룹의 속성이라는 것이다. 여신관리규정이 30대그룹을 통제하고 있으나 이 규정은 여신이 크게 늘어나는 것을 막는 힘을 발휘할 뿐이다. 재벌그룹 총수의 소유욕도 중소기업의 자금난을 가중시키는 원인이 된다.

 

역기능 더 많아진 관치금융

지난 60~70년대는 한국경제가 양적으로 급성장한 시기였다. 정부는 금융 등 모든 것을 틀어쥐고 성장만을 독려했다. 고도 성장기의 대기업 위주의 산업정책과 관치금융은 효율성을 발휘했지만 지금은 거꾸로 경제의 비효율성과 금융기관의 낙후라는 역기능을 드러내고 있다.

80년대 들어 경제의 저변을 형성하는 중소기업이 튼튼해지지 않는 한 국가 전체의 경쟁력이 확보될 수 없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이때부터 쏟아져나온 중소기업육성책은 이같은 인식의 산물이다. 그러나 대기업 위주의 산업·금융 구조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다면 중소기업육성정책은 기대한 만큼의 실효를 거두기 어렵다.


정부는 아직도 관치금융의 습성을 뿌리치지 못하고 있다. 돈줄을 쥐고 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권한이기 때문이다. 금융자금을 독차지하고 있는 기득권 세력의 반발도 엄청나다. 이처럼 왜곡된 금융구조가 개혁되지 않는한 중소기업의 자금난은 해소될 수 없다. 금융 기능이 정상화된다면 중소기업에 특혜를 베푸는 양 ‘의무대출’이니 ‘특별자금’이니 하면서 임시변통 대책을 내놓을 필요가 없다. 중소기업 문제는 금융구조를 수술하는 본질적 해결 방안으로 풀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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