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 싫지만 투표는 한다
  • 서명숙 기자 ()
  • 승인 1992.03.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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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20~30대는 선거를 움직이는 ‘작은 거인들’이다. 전체 유권자의 56%를 차지하는 이들이 던지는 표의 향방은 선거판 전체의 형세를 좌우한다. 이들은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12대 총선의 ‘이변’과 13대 총선의 ‘여소야대’상황을 만들어냈다. 그런가 하면 지난 기초·광역의회 선거에서는 대거 기권사태로 ‘여권 압승’이라는 결과를 만들어주었다.

 정치불신과 냉소주의의 깊은 잠에 빠진 작은 거인들은 이번 총선도 외면하고 말 것인가. 아니면 기지개를 켤 것인가. 정치권에서는 여기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14대 총선을 목전에 둔 지금도 20~30대는 ‘정치’ 하면 부정적인 단어만 떠올릴 정도로 정치권에 대해 여전히 강한 불신감을 드러내고 있다. 많은 직업 가운데 정치인을 가장 덜 존경할뿐더러 사회적 기여도가 낮은 직업으로 여긴다. 과반수가 대통령 연두기자회견보다는 올림픽 축구경기를 보겠다 하고, 대통령 임기초자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우가 30%를 넘는다. 그러나 정치 불신심리는 국민 모두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인식하고 있다. 선거에는 가능한 한 참여하려는 의사를 갖고 있지만, 아직까지 뚜렷한 지지정당은 없다. 정치불신의 깊은 잠에서 서서히 깨어나고 있지만 그 적극적인 대안은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지난 2월14일부터 18일까지 5일간에 걸쳐 만20세에서 39세까지의 전국 젊은 유권자 6백30명을 대상으로 ≪시사저널≫이 조사전문기관인 ‘리서치 앤 리서치’(대표 노규형)와 공동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드러난 젊은이들의 ‘자화상’이다. 이번 여론조사는 종래의 전화면접 방식이 아닌, 직접면접 방식으로 이뤄졌다. <편집자>


 우선 20~30대는 정치를 극히 부정적인 이미지로 받아들이고 있다. ‘정치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정당 · 국회’를 연상한다는 응답자(16.7%)를 제외한 응답자 대부분이 혼란 부정부패 대권싸움 불신 권위주의 사리사욕 지역감정 정경유착 공작정치 등 부정적인 개념을 떠올린다고 답했다.

10명 중 4명 대통령 임기 몰라
 직업평가에서도 정치인이라는 직업은 젊은 유권자들에게 가장 지탄받는 직업으로 나타났다. ‘가장 존경하는 직업’으로 정치인을 꼽은 유권자는 가장 적어 3.2%에 불과했다. 반면 정치인은 ‘가장 존경하지 않는 직업’과 ‘사회적 기여도가 가장 낮은 직업’에서 68.4%와 43.3%로 두 부문 모두 1위를 차지했다. 이런 결과는 젊은층 사이에서 우리 정치와 정치인이 어떻게 자리매김되고 있는지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대구 · 경북 지역에서 ‘가장 존경하지 않는 직업’으로 정치인을 꼽은 응답자(76.8%)가 다른 지역에 비해 다소 높은 것도 특기할 만하다. 반면 교육자는 가장 존경하는 직업(55.9%), 사회기여도가 가장 큰 직업(56.5%)으로 인식되고 있어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평소 우리나라 정치에 관심이 있는 편인가’라는 질문에는 ‘있는 편’(47.6%)이라는 응답이 ‘없는 편’(34.4%)이라는 응답보다는 다소 높게 나타났다. 그러나 20~30대 유권자들의 10명 중 4명 정도는 대통령의 임기가 5년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으로 밝혀졌다. ‘현재 우리나라 대통령 임기기 몇년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5년’이라고 맞게 대답한 응답자는 61.6%에 그쳤다. 5년이라고 답한 응답자는 여자(57.6%)보다 남자가 다소 많았고, 사무 · 전문직(69.5%)과 학생층(68.0%)이 상대적으로 많은 반면 자영업(53.6%)에서는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정치가 더 이상 ‘가장 우위의 관심사’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향도 엿보인다. 대통령 연두기자회견과 한국 축구대표팀의 올림픽 출전경기가 동시에 방영된다면 ‘올림픽 축구경기를 시청하겠다’는 응답자가 과반수를 넘었다.

 이런 경향은 ‘신문을 볼 때 어느 면부터 주로 보는가’라는 질문에 사회면(34.9%) 정치면(19.8%) 경제면(11.9%) 문화면(11.6%) 체육면(10.2%) 의 순으로 응답한 데서도 확인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두가지 해석이 엇갈린다. 우선 정치적 좌절감이 낳은 정치 무관심증으로 해석할 수 있다. 민주당의 한재야 출신 인사는 “70~80년대의 젊은이들은 삶의 스트레스를 정치행위로 해소했다. 그러나 80년대말부터 진행된 개량화 과정 이후 굴절되고 왜곡된 정치현상에 대한 젊은이들의 대응양식은 무관심과 냉소로 바뀌었다. 불만은 커졌지만 그것을 해소할 수 있는 통로가 없어졌기 때문이다”라고 분석한다. 그러나 이 현상은 동시에 젊은 세대가 정치일변도의 관심에서 벗어나 다원화된 가치관과 의식을 추구하는 긍정적인 변화를 보이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한편 한국 정치에 대한 만족도 측면에서는 ‘불만족’이 81.7%로 10명 중 8명 정도가 현 정치에 대해 강한 불만족을 표시했다. 그리고 그 원인을 거의 전적으로 정치권에 돌리고 있다.

“연두회견보다 올림픽축구 중계 보겠다”
 ‘국민들 사이에 정치불신과 정치 허무주의가 팽배하게 된 근본 원인’으로 정치인들의 부도덕성(51.9%), 당리당략 · 계파간 이익때문(32.7%) 등 정치권 내부의 문제가 압도적으로 거론됐다. 다만 소수 의견으로 국민 개개인의 책임(5.9%), 정치인들의 부정적인면을 과장보도한 언론 책임 때문(4.9%), 정치자금 때문(0.5%)이라는 의견이 나왔을 뿐이다.

 불신의 근본 원인이 정치인의 부도덕성에 있다고 여기는 젊은 유권자들은 정치권과 정치인의 도덕성 회복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정치발전을 위해 가장 우선 되어야 할 일’(복수 응답)로 정치인들의  도덕성 회복(50.6%)을, ‘정치인이 가장 우선적으로 갖추어야할 자질’로 청렴결백(63.7%)을 으뜸으로 꼽았다. 정치적 판단 기준이 정치적 이념이나 정책 능력보다는 도덕성에 모아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20~30대의 상당수가 정치불신 현상이 정치발전을 위해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는 자각증상을 보이고 있다. 우선 ‘정치불신 현상으로 인해 이익을 보는 집단’으로 젊은 유권자의 절반 가량이 정부 여당(51.0%)을 들었다. 특히 학력이 높을수록(중졸 이하 41.2%, 고졸 이하 47.3%, 대졸 이상 58.0%) 이런 응답률이 높아지는 경향을 보였다. 또 ‘정치불신 현상으로 가장 손해를 보는 집단’으로는 국민 모두(54.6%)라는 반응이 가장 많았다. 결국 젊은 유권자의 절반 가량이 ‘정치불신 현상은 국민 모두에게 손해, 정부 여당에게 유리’하다는 인식을 보이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정치불신의 깊은 잠에서 깨우난 젊은 유권자들은 투표장으로 달려갈 것인가. 우선 지난해 6월 광역의회 선거 당시 투표했는가를 물어보았다. 54.3%의 응답자들이 ‘투료했다’고 응답, 최대허용오차 ±3.9%를 감안하면 지난해 광역의회 선거의 20~30대 전체 투표율 52.2%(내무부 집계)와 비슷한 수치를 나타냈다.

 이 질문에 이어 14대 총선에 참여할 것인가를 물었다. 전체 응답자의 60.6%가 14대 국회의원 선거에 ‘투표할 예정’이라고 응답했고, 21.1%가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고 응답했다. 투표 의사를 밝힌 응답자 중 상당수가 ‘투표는 정치참여의 한 방편이고’(44.5%), ‘중요한 선거이므로’(31.4%) 이번 총선에 참여하겠다고 밝힘으로써 이번 선거에 의미를 부여했다.

 반면에 ‘투표하지 않겠다’는 적극적인 기권의사를 밝힌 응답자는 8.3%로써 이들은 불참이유로 ‘현 정치행태가 싫어서’(34.6%)와 ‘마음에 드는 인물이 없어서’(21.2%)를 들어 여전한 정치불신 심리를 반영했다.

 특기할 점은 지난해 광역선거 당시 기권했다고 밝힌 응답자 가운데 44.4%가 이번 총선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점이다.

“총선 참여” 60.6%, ”결정 못했다“21.1%
 이런 결과는 이번 선거의 투표율이 다소 높아질 것이라는 예측을 가능케 한다. 그러나 조사가 선거를 한 달여나 앞두고 실시된 만큼 그 폭이 어느 정도일지는 유보적이다. 투표율이 상당히 높아지느냐 다소 높아지는 선에서 머무르느냐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고 응답한 21.1%의 태도 변화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에서는 20~30대 투표율이 75%를 넘으면 다시 한번 여소야대 바람이 불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 반면, 민자당에서는 정치권 불신으로 70% 이상은 안될 것으로 자신하고 있다.

 그러나 젊은 유권자들은 특정 정당에 대한 특별한 지지 심리를 보이지 않고 있다. 신당들의 잇따른 출현 이후 조사가 행해졌는데도 응답자의 과반수(62.5%)가 ‘지지 정당이 없다’고 밝혔다. ‘후보자를 결정할 때 어떤 점을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겠는가’라는 질문에도 인물 됨됨이(60.2%)를 보겠다는 응답이 단연 으뜸이었다. 소속 정당(13.0%) 공약 · 정책(23.8%) 고향(0.8%) 집안관계(0.3%)를 기준으로 삼겠다는 응답자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먹고 안찍는’ 냉정한 이중성
 금품선거에 대해 20~30대는 독특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만약 후보 또는 선거운동원이 금품이나 향응을 제의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에 ‘받기만 하고 찍어주지는 않는다’가 45.2%에 달해 젊은 유권자의 이기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이중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어 ‘단호히 거절한다’와 ‘거절할 뿐만 아니라 선관위에 고발한다’는 응답은 각각 27.0%와 11.1%로 나타났다. 이밖에 소수 의견으로 ‘후보자에 따라 다르다’(6.7%), ‘모르겠다’(8.4%)가 제시됐다.

 금품의 위력을 믿는 후보자들이 기대하는 ‘받고 찍어준다’는 응답은 1.6%에 지나지 않았다. 종래의 ‘막걸리 세대’ ‘고무신 세대’와는 유권자 의식이 완전히 달라졌음을 반증하고 있다.

 ‘받기만 하고 찍어주지는 않는다’는 의식은 금품의 위력을 무력화시킴으로써 장기적으로 금품선거를 사라지게 만드는 바람직한 유권자 전략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젊은 세대가 정치권과 정치인들에게 엄격한 도덕성을 요구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여기에서 ‘가치판단의 이중성’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20~30대의 현실적인 정치인식은 다른 데서도 드러난다. ‘민자당 대통령후보 확정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소’로 대통령의 지명(35.1%), 당내 지도부의 합의(21.6%)가 거론됐다. 노태우 대통령이 연두기자회견을 통해 거듭 강조한 ‘당내 경선’을 꼽은 응답자는 8.6%에 그쳤다.

지역감정, 주위에선 별로 못 느껴
 한편 한국의 20~30대는 한국 정치의 질곡이자 병폐인 지역감정을 어떻게 느끼는가. ‘우리 사회에 전반적으로 존재하는 지역감정의 정도’(매우 심하면 10점, 전혀 없으면 0점)는 평균 7.0점으로 지적됐고, 매우 심하다는 10점이 20.5%로 가장 많았다. 반면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일터에서의 지역감정의 정도’는 평균3.3점으로 낮게 나타났고, 전혀없다는 0점이 24.3%로 가장 많았다.

 결국 20~30대가 관념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지역감정과 실제 피부로 느끼는 지역감정의 차이는 매우 크다는 이야기다. 그 격차가 인식과 현실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인지 혹은 세대간 차이에서 오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젊은 세대에세 지역감정이 세습되고 있지 않다는 희망적인 징후를 읽을 수 있다.

 이들은 남북통일 문제도 매우 낙관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을 보였다. 56%의 응답자들이 (5년 이내 11.6%, 10년 이내 44.4%) 10년 안에 남북통일이 이뤄질 것으로 내다보았다. 남북통일 이후의 체제로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절충체제(53.2%)를 으뜸으로 거론함으로써 기성세대와는 다른 인식을 보였다. 절충체제에 이어 남한식 자본주의 체제(43.5%)가 손꼽혔고, 북한식 사회주의 체제를 거론한 젊은 세대는 2.9%에 불과했다.

 흔히 20~30대 유권자들을 가리켜 총선이라는 거대한 태풍을 움직이는 ‘태풍의 눈’이라고 한다. 이 태풍의 눈이 어디로 그 방향을 틀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시사저널≫ 여론조사는 이들 젊은 유권자들이 정치권에 대한 강한 불신감 속에서도 불신 심리가 어느 누구에게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새로운 각성에 이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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