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체 청사진’ 게놈의 비밀
  • 대덕 · 남문희 기자 ()
  • 승인 1992.03.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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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 에이즈 연구 획기적 전기 … ‘휴고’ 계획, 2005년에 생명신비 푼다

 충남 대덕연구단지내 한국과학기술원(KAIST) 생화학연구실. 흰가운을 입은 10여명의 대학원생들이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연구주제는 생명체의 청사진이라고 불리는 ‘게놈(Genome)'. 세포에서 염색체를 분리해 작은 조각으로 잘게 자른다. 전기 泳動 장치로 이 조각들을 다시 분리해 효소 반응을 시킨 다음 두개의 판유리 사이에 있는 젤(Gel)에 얹는다. 전기장을 걸면 작은 조각들은 아래에, 큰 조각은 위에 위치한다. 여기에 레이저 빔을 쏘아 그 결과를 컴퓨터로 분석하면 생명 현상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세포의 염기서열을 파악할 수 있다.

 지도교수는 생명과학과의 姜昌遠 교수.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한 그는 11년 동안 컬럼비아대학과 뉴욕주립대학 연구소에서 분자생물학과 유전공학을 연구하다 6년 전에 귀국했다. 귀국 당시 미국에서는 게놈연구 사업이 막 시작되려던 때였지만 국내 여건은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그동안은 유전자발현연구에 주력하면서 인체게놈연구에 대해서는 이의 추진을 위한 분위기 조성을 위해 노력해왔다. 게놈 연구, 그 중에서도 인체의 게놈에 대한 연구는 한두 사람의 힘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요즘 초조하다. 최근 선진국들 사이에서 자신들의 연구성과에 대해 지적소유권을 주장하려는 움직임이 강하게 대두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의 신국제질서 속에서 대두되고 있는 기술패권주의 움직임이 이 분야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미국 국립보건원(NIH)에서는 인간의 뇌세포에서 일부 발견해낸 cDNA의 염기서열에 대해 특허를 신청했다. 인류공동의 자산인 인간의 생명현상에 대해 특허를 인정 할 수 없다고 일부 학자들이 반발하고는 있지만 특허가 인정될 것이라는 게 지배적인 분위기다. 그렇게 될 경우 아직 본격적인 연구에 착수조차 하지 못한 우리같은 후발국은 상당히 큰 타격을 입을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초조감을 강교수만 느끼는 것은 아니다. 현재 선진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인체게놈연구의 심각성에 대해 인식하고 있는 관련 과학자들 전부가 느끼고 있는 불안감이다. 국내에서는 1990년 분자생물학 · 유전공학 · 생화학 · 의학 등에 종사하는 1백여명의 학자들이 모여 ‘한국인체유전자연구회(회장 고려대 농화학과 李世永 교수)’를 조직했지만 정부의 연구비지원이 전무하다시피 해 본격적인 연구는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현재 식물게놈 연구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포항공대의 南洪吉 교수는 “학자들 중에는 주머니 돈을 털어서라도 당장 연구에 착수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절박한 분위기가 팽배해 있다”고 말한다. 미국 MIT에서 쥐의 게놈에 대해 연구하다 지난해 9월 포항공대로 자리를 옮긴 申喜燮 교수도 초조함을 느끼기는 마찬가지다. “인체 유전자의 숫자가 아무리 많다해도 언젠가 바닥이 드러날 것은 분명하다. 선진국들이 전부 연구해 특허를 내버리면 그때 가서는 하고 싶어도 못하게 된다”고 한다.

 인간의 세포 핵에는 아데닌(A) 구아닌(G) 티민(T) 시토신(C) 등 일종의 유기화학물질인 네 개의 염기가 서로 나선형적인 구조로 연결되어 있는 DNA가 있다. 세포 하나에는 약 30억개의 염기 쌍이 존재하는데 이 전체를 인체게놈이라 한다. 인체게놈이란 30억개 염기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인간의 유전정보나 생명현상은 이 네가지 종류의 염기가 서로 어떤 순서로 결합되어 있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이 염기들의 서열을 모두 밝혀내면 모든 생명현상에 대한 탐구가 가능해진다.

 현재 미국 일본 유럽 등의 선진국 사이에는 인체게놈의 염기서열을 밝혀내기 위한 초대형 국제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휴먼게놈프로젝트’가 그것인데 1990년 10월1일부터 시작해 15년 뒤인 2005년 9월30일까지 30억개 염기의 서열을 전부 밝혀내겠다는 계획이다. 이 계획을 위해 ‘인체게놈연구의 UN’이라고 일컬어지는 ‘휴고(HUGO)’라는 국제기구가 조직돼있고, 각국이 연구사업을 국책연구과제로 선정해 적극 지원하고 있다. 15년간 총 30억달러가 소요될 것이라는 연구규모의 방대함으로 인해 휴먼게놈프로젝트는 종종 원자폭탄 제조계획이었던 ‘맨해턴프로젝트’나 아폴로11호의 달 착륙을 가능하게 했던 미국 항공우주국의 ‘우주선계획’에 비교되기도 한다.

 이론상으로 보면 이 계획이 완료되는 2005년 9월30일은 인류 역사에서 아주 특별한 날이 될 것이다. 인간이 최초로 자신의 청사진을 손에 넣는 날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연구 결과가 인류의 미래에 어떤 방식으로 활용될지에 대해서는 아직 미지수이다. 최근 선진국들에서 부쩍 강화되고 있는 자국이기주의가 확대 될 경우 선진국들에 의한 인간 유전자 정보독점이라는 엄청난 현상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선진국들이 이 연구계획에 집착하고 있는 것은 예상되는 엄청난 결과 때문이다. 물론 2005년에 인체게놈의 30억개 염기의 서열이 모두 파악된다 해도 그 결과가 곧바로 생명 현상의 신비를 풀어주는 것은 아니다. 연구결과는 서울시 전화번호부 약 6백권 분량에 A.G.C.T 네 개의 알파벳이 어지럽게 나열된 컴퓨터 데이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 다음 단계의 연구를 위해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연구자료이다.

“인간 DNA 정복국가가 전 인류 지배한다”
 만약 기술수준이 발달해 한 사람의 염기서열을 1주일이나 한달 내에 밝혀내는 것이 가능해진다면 그것으로부터 알아낼 수 있는 정보는 실로 무궁무진하다. 혈우병 · 근육위축증과 같은 유전병의 원인 진단에서부터 암이나 에이즈 등의 불치병에 대한 연구가 획기적으로 진전될 수 있고 궁극적으로는 인간 개개인의 형질적 특성의 차이를 규명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생명현상 전체가 본격적인 연구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유전병을 예로 들어보자. 유전병에 걸릴 가능성이 있는 사람의 염기서열을 분석해보면 유전병의 원인이 되는 염기의 위치를 알아낼 수 있다. 이 정보에 의해 언제쯤 발병할 것인지 또 이 염기의 활동성을 약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를 연구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암을 특정부위의 세포가 무질서하게 성장하는 데서 오는 질병인데 그 원인은 아직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정상인의 염기서열과 암환자의 염기서열을 비교해보면 염기서열에 이상이 있는 부분이 암의 원인일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인간이 왜 인간다운가’는 철학의 근본문제이지만 자연과학적으로는 인간의 염기서열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왜 어떤 사람은 키가 크고 어떤 사람은 키가 작은가, 동양인과 서양인의 차이는 어디에서 연유하는가 등의 의문도 염기서열에 대한 분석을 통해 그 답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유전자 조작기술이 현재의 수준보다 엄청나게 발전할 것이라는 점을 가정한다면 미래에는 각 개인의 염기서열을 조작해 인간을 재창조하는 것도 가능해질지 모를 일이다. 따라서 개인의 염기서열이 공개되거나 나쁜 의도를 가지고 있는 세력의 손에 넘어갈 경우 심각한 문제가 대두될 가능성도 있다. 특히 유럽국가들은 이런 윤리적 사회적 문제를 심각하게 우려해 염기서열에 대한 연구와 병행하여 이의 남용을 금하는 법을 제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선진국들 간에 경쟁이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는 이유는 이 분야의 연구가 당장 돈으로 직결될 수 있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다. 일부분의 염기서열만으로도 의약산업이나 생명산업에 곧바로 응용될 수 있다. 특히 최근에는 염기서열 전체 중에서 단백질을 합성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진 cDNA의 염기서열을 우선적으로 밝혀내 상업화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단백질의 형성과정은 생명현상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인데 현재까지는 30억개의 염기 중 약 5% 정도가 이에 관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염기서열이 밝혀진 것은 그것의 약2% 정도이다.

 일본 아사히 신문에서 발간하는 월간 ≪아사히저널≫지 1월31일자는 현재 미국과 일본 사이에서 전개되고 있는 DNA 연구경쟁을 커버스토리로 다루고 있다. ≪아사히저널≫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미 · 일간의 연구경쟁이 ‘세계종말전쟁’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평가한다. 이 전쟁이 여타의 전쟁과 다른 것은 “인간의 DNA를 정복하는 국가가 앞으로 전 인류를 철저히 지배하는 것이 가능해진다”는 점이다.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미국 국립보건원의 게놈연구 책임자인 제임스 왓슨은 주로 일본을 겨냥해 “경제력 규모에 상응할 정도의 연구비를 내놓지 않은 국가에 대해서는 연구성과를 배분하지 않겠다”고 선전포고를 한 바 있다. 또 노벨상 수상자인 미국의 월터 길버트 박사는 “게놈관리회사를 만들어 염기서열과 염색체 지도에 대한 상권을 주장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 전쟁의 최대 피해자는 우리 같은 중진국들이 될 것이다”라고 강창원 교수는 말한다. 선진국들은 그동안 축적된 연구성과가 있기 때문에 서로 협상을 벌여나가는 것이 가능하다. 또 후진국들은 유네스코나 HUGO에서 계획중인 연수프로그램에 참여해 연구성과를 전수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경제력 규모에 상응한 연구 기여’를 전혀 못하고 있는 우리는 나중에 연구성과의 배분과정에서 철저히 소외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나중에 교섭력을 확보하기 위해선 “지금이라도 빨리 우리만의 독특한 분야를 선정해 연구 성과를 올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게 강교수의 주장이다.

 관련 전문가들에 따르면 우리 과학자들의 기술 수준도 이미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해있다고 한다. 또 몇몇 분야에서는 뚜렷한 성과를 내고 있기도 한다. 전문가들은 올해 상반기부터 연구에 착수할 경우 연말 정도에는 한두 신체부위의 염기서열을 밝혀내는 것도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나 역시 연구비 조달이 가장 큰 문제이다. 강창원 박사의 계산에 의하면 우리는 30억개 염기 중 30분의 1에 해당하는 염기를 15년 동안 총 1억달러 정도의 예산으로 진행해나가는 것이 적당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정도는 안되더라도 몇 십억원만 지원돼도 연구에 착수할 수는 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연구비 마련이 막막한 형편이다. 대덕에 있는 유전공학연구소측은 최근 과학기술처에 휴먼게놈사업과 관련한 연구계획서를 제출했다. 현재 과기처에서 추진중인 G7프로젝트의 국책연구 과제에 포함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전망은 그리 밝지 못한 것 같다. 과기처의 G7프로젝트는 당장 상품화가 가능한 분야에 우선권을 부여하고 있는데 휴먼게놈프로젝트는 당장의 상품화보다는 원천 기술의 개발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휴먼게놈프로젝트’는 강교수 등 몇몇 젊은 과학자들을 중심으로 올해 상반기 중 국내에서도 본격적으로 시작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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