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 캐던 작업복 청바지 금보다 비싸도 ‘불티’
  • 이철현 기자 (leon@sisapress.com)
  • 승인 1996.09.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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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금 도금·다이아몬드 장식까지···업계 “고가일수록 잘팔린다”

 
청바지는 젊음과 반항의 기호다. 60년대에 우드스톡이나 몬테레이 같은 대규모 록 페스티벌에는 청바지와 청재킷을 입은 학생과 히피 들이 수만명씩 몰려들어 기성세대가 생산한 ‘파괴와 대량학살’의 기호를 고발했다. 그고발은 반전,반핵, 평화와 평등,여권신장 요구로 구체화 했다. 50년대에 단순히 젊음의 상징이었던 청바지는 이때 록음악과 결합하면서 평화와 진보의 상징으로까지 확장 되었다.

 그러나 청바지는 90년대 중반 한국에서 ‘변질’을 거듭하고 있다. 국내에 청바지 패션이 확산되면서 청바지가 가진 반항의 기호는 사라지고 ‘천민 자본주의’의 상징으로 전략하고 만 것이다.

미국·일본 비해 3~5배 비싸

 몇가지 근거를 들어보자. 다른 나라에 비해 한국의 청바지 값은 지나치게 비싸다. 미국에서 평상복인 청바지가 한국에서는 백화점에 비치해야 잘팔리는 고급패션의류가 되었다. 그렇다고 미국과 비교하여 원단이나 디자인이 뛰어난 것도 아니다. 국내 업체의 물류비용이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제조 원가의 4~5배가량으로 판매 가격이 책정된다는 것은 문제다.

 경기도 성남에 사는 박선영씨(42·주부)는 최근 중학교 3학년인 아들과 함께 청바지를 사러 다니다 10만원이 넘는 데 놀라살 엄두를 내지 못했다, 박씨는 ‘이 옷 아니면 안 입겠다고 버티는 아들의 요구에 은행에서 돈을 더 인출해 아들이 원하는 청바지를 살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했다. 결국 박씨는 11만원을주고 산 청바지와 근처 시장에서 3만원에 산 남편의 양복바지를 들고 집으로 돌아갔다.

 최근에는 15만원대 국산 청바지가 나오기도 하고, 30만원을 호가하는 이탈리라 베르사체 청바지가 수입되어 시중에서 팔리기도 한다. 문제는 청바지 가격이 터무니 없이 비싼데도 수요가 계속 는다는 점이다. 청바지 시장은 최근 몇 년 사이 총 1조 3천억원 규모로 급팽창하면서 국내외 브랜드 40개가 각축을 벌이고 있다. 국내 청바지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리바이스 청바지는 세계다른 나라들과 비교하여 수입원가는 똑같아도 판매가격은 비교가 안될 정도로 한국이 높다.

 ‘소비자 문제를 연구하는 시민의 모임’이 지난 1월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미국산 청바지가 국내에 수입되면 미국 판매가의 3배까지 뛴다. 리바이스 청바지 판매장에서 리바이스 501브랜트 바지하나가 9만5천원에 팔리는데 미국에서는 40달러(3만2천원)에도 못미친다. 가격이 높은데도 판매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 한국리서치가 올해 초에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리바이스는 95년 하반기동안 가장높은 상표 인지도(27%)와 판매율을 보이고 있다.

 리바이스사의 입장은 국내 사업 환경상 어쩔수 없다는 것이다. 리바이스 코리아의 홍보를 대행하고 있는 액세스의 구희성씨(25)는 “한국내 물류비용이 엄청난 데다 업체간 경쟁이 치열하여 광고비가 너무 많이 든다. 필리핀과 한국에 수입되는 리바이스 청바지의 원가가 같다고 하더라고 판매관리비용이 지나차게 높아 결국 소매값이 2배 이상 되는것이다”라고 말했다.

청바지가 가장 많이 팔려 나가는 곳은 백화점이다 . 백화점 매장 운영비도 청바지 값을 올리는데 한몫한다. 백화점내 청바지 매장은 눈에 쉽게 띄고 목이 좋은 곳이다. 권리금 액수가 만만치 않고 백화점에 내는 판매 수수료도 상당하다. 일본 구라보사 청바지 개발 책임자인 요시다 기시이 과장은 생각을 달리한다. 청바지 원단을 개발하는 데만 백년이 넘은 구라보사의 기시이 과장은, 일본에서는 청바지 가격이 제조원가의 2배정도인데 한국에서는 4~5배로 턱없이 높다고 지적한다. 부동상 가격이나 임금이 한국보다 훨씬높은 일본시장에서도 최고급 청바지가 7천~8천엔(5만~6만원)선을 넘지않는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국내 청바지 전문 업체 태승트레이딩(대표 임우성)은 지난해 10만~14만원대‘닉스’라는 청바지를 선보이면서 급성장 하고 있다. 고가인데도 월매출액 70억원을 기록하리만큼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지난 8월에는 ‘292513=STORM'이라는 고가 브랜드도 출시했다. 94년 설립된 이 회사는 닉스 팬클럽을 구성할 정도로 소비자의 큰 호응을 얻으며 회사 설립 3년만에 1천3백50억원을 매출 목표액으로 잡고 있다.

 시장 선도 업체가 주도한 청바지의 고가화 추세는 경쟁 업체와 신규 업체가 경쟁적으로 제품 가격을 올리면서 가속화하고 있다. 소비자 수요 역시 이에 맞춰 변하고 있다. 한국리서치가 올해초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6만원대 청바지 시장이 급격히 축소되는데 반해 9만원 이상을 호가하는 프리미엄급 청바지 시장은 눈에 띄게 성장하고 있다. 95년 하반기를 보면 6만원대 청바지가 전체 시장의 3%를 차지했는데, 9만원 이상되는 청바지는 16%를 차지했다. 비싸려면 아주 비싸야지 어정쩡하게 비싸면 안팔린다는 것이 업계의 경험법칙인 셈이다.

 고가 청바지 시장이 급팽창하자 최근에는 호사스런장식을 곁들인 청바지도 출시되고 있다. 비싸야 산다는 소비자 심리를 파악한 의유 업체들이 앞다투어 고가 청바지를 내놓는 것이다. 청바지 단추에 다이아몬드를 박기도 하고, 옷의 이음새를 고정하는 리벳에다 백금을 도금하기도 한다. 태승트레이딩이 지난8월에 리벳에 백금을 입힌 ‘닉스 플래티넘’이라는 제품을 14만 3천원에 출시했고,지브이는 같이시기에 ‘베이직 플래티넘’이라는 제품을 11만 5천원에 내놓았다.

‘호화 청바지’ 주 소비자는 15~24세

 새로 고가 청바지 시장에 발을 들여놓은 업체도 있다. ‘좋은 사람들’(대표 주병진)은 지난9월 청바지 단추에 다이아몬드를 박은 ‘다이아몬드 버튼’이라는 제품을 내놓았다. 백금도금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이아몬드까지 동원한 것이다.

 얼핏보면 고소득 젊은 직장인을 프리미엄급 청바지의 주요 고객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한국리서치가 실시한 시장 조사 결과는 전혀 다르다. 리바이스 청바지의 남성 고객 가운데 절반 이상인 53&가 15~24세에 몰려있다. 여성고객은 42%가 15~24세에 몰려 있다.

 한국에서 15~24세라면 거의가 학생이기 때문에 무소득자들이다. 어떻게 이들이 10만원대 청바지를 사 입을수 있을까. <유한 계급론>을 쓴 미국 경제학자 베블렌은 ‘소득이 높은 계층은 필요에 따라 상품을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상품이 주는 사회적 위신을 구매하는 것이다; 라고 갈파한 적이 있다. 이른바 베블렌 효과. 다이아몬드나 백금 같은 상품은 그 효용보다 그상품을 지님으로써 자신의 사회적 위신을 과시할 수 있어 구매한다는 것이다.

 사실 청바지의 디자인과 소재는 업체 간에 뚜렷한 차이가 거의 없다. 과거 미국 광부들이 입던 작업복이 한국에 들어오면서 백금과 다이아몬드로 치장되어 돈 많은 사람들이 입는 바지로 둔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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