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월 후유증 枯葉劑환자
  • 박성준 기자 ()
  • 승인 1992.03.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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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림서 오염… 정부“戰傷아니다” 발뺌

 지난 2월15일, 서울 둔촌동 국립보훈 병원에 거동이 매우 불편한 환자 한 사람이 입원했다. 환자의 이름은 李一熙씨. 올해 49세로 충남 공주 출신인 이씨가 병원에 입원한 이유는 오랫동안 얼굴에 이상한 반점이 생기고 몸무게가 줄어들며 다리가 마비되는 등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렸기 때문이다. 이씨가 이 병을 앓기 시작한 지는 벌써 24년 전, 그가 베트남전쟁에 참가하여 남부 퀴논지방의 푸캇산 지역을 중심으로 베트콩과 대적할 때부터다.

 밀림에 들어가 작전을 수행하고 돌아온 어느 날 얼굴에 땀띠 비슷한 것이 돋고 몸이 무거워 움직일 수 없자 이일병은 위생병에게 간단한 치료를 받았다. 그 뒤 별탈 없이 정상적인 군생활을 마치고 68년에 귀국해 제대했다. 이씨의 신상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때부터였다. 몸무게가 자꾸 줄어들며 다리에 마비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몸무게 반쯤 줄고 하반신 마비
 귀국 당시 75㎏이었던 이씨의 몸무게는 현재 43㎏. 문자 그대로 피골이 상접해진 그는 “그나마 붙어 있는 살이 남의 살처럼 느껴지고 피부에 아무런 감각도 없다”며 고통을 호소한다. 또 사라졌던 땀띠도 다시 번지기 시작해 이씨의 왼쪽 얼굴은 붉은 빛깔의 커다란 반점으로 완전히 뒤덮인 상태이다. 병원을 여러 군데 돌아다니고서도 끝내 병명을 알아내지 못한 이씨는 자신의 병이 “베트남전 당시 작전지역에서 접촉했던 ‘에이전트 오렌지’ 때문에 생겼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추측한다.

 다이옥신. 일명 ‘에이전트 오렌지’로 불리는 이 물질은 원래 농사에 사용하기 위해 미국의 한 화학약품제조회사가 개발한 枯葉劑의 일종이다. 독극물로 알려진 비소보다 3천배 이상의 독성을 지녔으며 인체에 들어간 뒤 5~10년이 지나면 각종 암과 신경계 마비를 가져오는 발암물질이다. 독성 때문에 사용이 금지됐던 에이전트 오렌지가 고엽제로 사용된 곳은 베트남. 베트콩이 은신처로 이용하는 밀림을 초토화하기 위해 62년부터 71년까지 미국이 쏟아부은 에이전트 오렌지는 약 4만 드럼을 이르는 것으로 알려진다.

 지난 20여년 동안 철저히 숨겨져 왔던 고엽제의 부작용이 최근 이씨의 입원을 계기로 국내에서 크게 부각되고 있다. 오랜 병고에 시달리는 참전용사들이 잇따라 나타나고, 당사자들을 중심으로 진상을 명확히 밝히고 대책을 세우라는 소리가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매복 나갔다 올 때마다 전우들 가운데 허물이 벗겨지고 피부병이 생기는 사람이 있었다. 작전지역의 나무와 풀이 모두 누렇게 말라 죽어있는 모습을 자주 목격했는데 전우들은 미군이 고엽제를 공중살포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베트남 전쟁 때 대표적 전투지역인 투이호아 부근에서 작전을 수행했던 李光壽씨(45)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증언한다. 현재 서울 정릉4동 단칸 셋방에서 10여년째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누워 지내는 이씨도 에이전트 오렌즈 후유증으로 의심되는 환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씨는 고엽제가 살포된 지역을 수시로 드나들었을 뿐 아니라 울창한 풀숲에서 적의 공격에 대비해 자신이 직접 고엽제를 뿌리기도 했으나 “그것이 병을 가져오리라곤 꿈에도 몰랐다”라고 덧붙인다.

 이씨가 앓고 있는 병은 원인 모를 소변불통증과 전신쇠약증. 한때 머리에 심한 가려움증을 느꼈으나 곧 만성화돼 가려움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자신의 병이 줄곧 몸에 박힌 탄피 때문인 줄로만 믿고 있던 이씨는 탄피제거수술을 하고 난 뒤에도 병이 낫기는커녕 오히려 악화되자 에이전트 오렌지에 혐의를 두게 되었다. 방광이 차오를 때마다 찌르는 통증으로 하체가 마비되기도 하는 이씨는 현재 부부생활도 포기한 채 고무호스를 이용해 소변을 빼내고 있다.

역사의 고아’ 취급, 치료할 길 없어
 에이전트 오렌지로 고통을 겪는 사람은 이들뿐만이 아니다. 90년 파월유공전우회(회장黃文吉, 이하 전우회)가 미국에 설치한 지부의 도움으로 자료수집 등 국내 실태조사를 시작한 이래 전우회측에 보고된 고엽제 후유증 환자는 40여명에 이른다. 이들 대부분은 말초신경마비증에 걸려 평생을 병상에 누워 생계마저 막연해지거나, 지난해 12월4일 보훈병원에서 간암으로 숨진 李佑行씨(당시 48세)처럼 고엽제 부작용이 암으로 번져 사망하는 사례까지 발생하고 있지만 적절한 치료와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9월쯤 미국과 호주 지부에서 보내온 자료는 “이들 나라에서 이미 고엽제 문제로 베트남 참전 피해자들이 제조회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 일이 있고 이를 계기로 기금이 조성돼 환자 치료에 나섰다”는 내용이었다. 베트남 전쟁 당시 주로 후방지원의 형태로 참전했던 호주의 경우만 해도 5백50만 달러를 기금으로 모아 고엽제 환자치료에 활용하고 있다.

 이에 자극받은 전우회는 즉각 조사에 착수했으며 이후로 전우회측에 피해 사례가 줄을 잇기 시작했다. 이들의 호소는 대부분 “피부에 이상이 생기고 하체가 마비돼며 몸무게가 줄어든다”는 내용이었다. 때때로 이러한 증세와 더불어 암으로 고통을 겪는 사람도 나타났다. 피해사례를 분석한 결과 환자들 대부분이 베트남 전쟁 당시 고엽제가 대량 살포된 지역에서 활동한 병사들이었음이 밝혀졌다. 전우회 黃明浩 부장은 “조사가 진행될수록 이런 증세의 환자가 크게 늘 것”으로 내다본다.

 고엽제 후유증 환자의 존재를 확인한 전우회는 尹必鏞 명예회장(월남전 당시 맹호부대 사단장)을 중심으로 육군본부와 보훈처를 오가며 피해자를 구제할 방법을 찾기 시작하는 한편 미국의 고엽제 제조회사를 상대로 국제소송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참전용사들을 분개시킨 것은 고엽제 후유증 환자에 대한 관계당국의 철저한 무지와 무관심이었다. 보훈처와 육군본부는 각각 “보상해줄 기준이 없다” “전상 기록이 없다”며 발뺌했던 것이다. 더욱이 지난해 12월 대한참전전우회의 朴世直 회장이 “에이전트 오렌지는 정글의 열대병”이라고 엉뚱한 발언을 하자 전우회측은 분노가 폭발했다. 전우회 황문길 회장은 “알려질 만큼 다 알려진 사실을 함께 피흘렸던 전우가 그런 식으로 호도할 수 있느냐”라며 분개했다.

미국·호주는 기금 조성해 환자 치료
 현재 전우회측은 고엽제 후유증뿐만 아니라 다른 전상 후유증에 대해서도 피해자들이 보상받을 수 있는 길을 찾고 있다. 정확한 숫자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많은 참전 용사가 전상후유증으로 평생을 고통 속에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월남전 후유증으로 정신착란증에 시달리는 경기도 평택군의 鄭鐘道씨(48)는 이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이다. 비행기 소리가 들릴 때마다 “오뚜기(월남전에서 활약한 소형 헬리콥터의 별명)가 날아간다”라고 헛소리를 하며 발작을 일으키는 그는 발작 때 입은 여러 차례 화상으로 손가락 대부분이 뭉그러져 있고 온몸이 화상자국으로 얼룩진 참혹한 모습을 한 채 불우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은 정씨 말고도 부산의 한 정신요양원에 수용돼 있는 김태호씨 등 다수가 있을 것으로 추측되며 이들 중엔 최근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 자살한 사람도 있다.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마지막으로 철수한지 올해로 19년이 지났다. 최근 국방부가 종전 이후 처음으로 “파월군 전사자가 총 4천6백87명에 이른다”라고 공식 확인했지만 아직도 참전 용사들 사이에선 “사망자 수가 적어도 1만명이 넘을 것”이라고 반박하는 등 전사자 수에 대한 논쟁도 그치지 않고 있다. ‘자유의 십자군’에서 ‘역사의 고아’로 참전용사들에 대한 평가가 떨어진 가운데 당사자들은 “참전에 대한 평가와 참전자들의 명예회복등은 둘째치고 우선 전상 후유증 환자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라도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라며 정부에 관심을 촉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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