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 현상’ 소설위기의 대안인가
  • 이문재 기자 ()
  • 승인 1992.03.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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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작가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번역 잇달아…한국문단 ‘무시’ ‘경탄’ 논란

 현대 일본의 대표적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43)의 소설이 조용한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국내 독서시장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조용한 반면, 최근 2년 간 번역된 6권의 소설집이 특히 30대 전후의 젊은 시인 소설가 평론가들 사이에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것이다. 계간 ≪세계의 문학≫이 이번 봄호에서 ‘이성의 퇴조와 후기현대소설’을 특집으로 다루면서 하루키 소설을 조명하고 있는 데서 보여지듯이, 이데올로기의 몰락과 ‘본격문학’의 위기 앞에서 주저하고 있는 한국문단과 출판계에서 하루키를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89년 문학사상사에서 유유정 교수(한양대?일문학)의 번역으로 ≪상실의 시대≫(원제 ≪노르웨이의 숲≫)와 ≪댄스?댄스?댄스≫(1?2권)가 나온 이래, 김춘미 교수(고려대?일문학)가 모음사에서 하루끼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오후의 마지막 잔디밭≫을 우리말로 옮겼고, 같은 출판사에서 박은주씨가 ≪양을 둘러싼 모험≫을 냈다. 또한 청하출판사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서계인씨의 번역으로 펴냈다. 하루끼 소설의 출간 붐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문학사상사에서는 4월 중에 하루키의 단편집을 묶을 예정이고, 모음사에서는 김난주씨 번역으로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상?하권)를 올 여름 안으로 내놓을 참이어서, 하루키 소설은 30대 문단이란 울타리를 벗어나 곧 독자들의 ‘바다’로 나아갈 것으로 보인다.

 79년 처녀작인 중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군상≫지의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데뷔한 하루키는 줄곧 일본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87년에 선보인 장편 ≪노르웨이의 숲≫이 발간 즉시 3백50만부가 팔려나가면서 현대 일본 문단의 대표적 작가의 자리에 올랐다. 지금까지 일본에서 나온 그의 소설집은 1천2백만부가 넘게 판매되었으며 미국을 비롯한 14개국에서 번역되고 있다. 지난 연말 미국의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하루키가  “일본에서 거둔 성공을 미국에서 되풀이하고 있다”고 소개한 바 있다.

 계간 ≪현대시세계≫(91년 겨울호)에 소개된 미국의 출판 전문지 ≪퍼블리셔스 위클리≫와의 인터뷰에 의하면 그는 20대 초반에 창작을 포기한 뒤 한동안 글쓰기는 잊고 지냈는데, 와세다대를 졸업한 후 “사무실에서 일하는 것이 싫어서” 동경에서 약 7년 동안 재즈 클럽을 운영했다. 미국소설을 좋아하는 하루키는 “일본인을 위한 일본소설은 어떤 면에서는 편협하다”고 위 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밝히고 있다. 로마 아테네를 거쳐 현대 미국에서 살고 있는 하루키는 그의 희망대로 국제적인 작가가 되어 있다. 그 내용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가장 일본적이면서 동시에 전혀 일본적이지 않다. 현대적이고 국제적이다”라는 독후감이 많은 것이다.

일본 ‘全共鬪세대’화 한국의 30대
 1970년 전후를 대학에서 보낸 하루키는 일본에서 이른바 全共鬪(전학공투회의)세대로 불린다. 국내 젊은 작가들이 그의 독자가 된 여러 이유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의 세대론적 자리이다. 사회변혁운동으로 들끓던 일본의 68년, 그때 대학생이었던 하루키는 그 시절을 ≪뉴스위크≫지에 이렇게 털어놓았다. “나는 심정적으로 좌익에 동조했지만 어떤 그룹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당신이 만일 독립적이길 원한다면 정치적일 수 없을 것이다”.

 “전공투는 여러 요인을 내포하고 있지만 그 궁극적 의미는 전후 체제와 그 가치관의 소멸에 있다고 본다. 우리는 그 소멸을 긍정적으로 수용할지 부정적으로 수용할지의 문제로 개별적으로 혼란했었고, 그 때문에 분열되고 압살당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1970년이라는 시점에서 순간적으로 냉동되어 버렸던 것이다”라는 하루키의 회상은 그 20년 뒤인 90년대, 30세 안팎의 한국 ‘운동권세대’에게 적지 않은 공명을 남긴다.

 하루키가 전공투세대라고 하지만 그의 소설이 어떤 정치성을 띠고 있지는 않다. 소설의 분위기는 지나치게 탈정치적이다. 전공투 이후 일본은 엄청난 속도로 후기산업사회, 도시사회로 이행한 것이다. 전공투에의 상실감이, 도시에의 급속한 진입이 하루키를 내부, 즉 존재론에 침잠하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루키는 일본 ≪문예춘추≫와의 인터뷰에서 정치의 계절이었던 60년대와 혼란의 도가니였던 70년대를 지나 고도자본주의사회로 접어들면서 모든 가치관은 전도되었다고 밝히면서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든 살아남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조했다. ≪댄스?댄스?댄스≫에서처럼 선과 악, 전위와 후위가 사라진, 구조가 허물어진 도시 속에서 ‘나’를 찾아가는 것이다.

 ≪바람의…≫ 해설을 쓴 김춘미 교수는 하루키의 세대론적 풍경을 조감한 뒤 그의 소설을 도시문학으로 규정짓는다. 하루키의 소설들은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살아가는 일본의  ‘도시 3세대’의 일상을 경쾌한 문체와 대화로 담아내는 것이다. 김교수는 그의 도시문학을 “일본의 전통문학과 단절된 지점에서 미국문학의 영향 아래서 구축된 것”으로 파악하고 “애당초 그리워 해야 할 고향도 환상 속의 유토피아도 존재하지 않는” 도시 3세대들의 삶은 “관능에의 예민함과 덕성의 마비”로 특징지워진다고 해석한다. 정보화 사회?영상미디어 세대인 이들은 외부 세계에 대해 능동적이지 않다.

도시인의 투명한 상실감과 가벼움의 철학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학생이거나 자유직업을 가진 아웃사이더들이다. 도시의 아파트에서 혼자 요리하며 음악을 듣고 언제나 책을 읽는 주인공들은 20세 연하의 여인들과 만나거나 쌍둥이 여자와 동거하고 고급 콜걸을 상대하지만 심각하지는 않다. 거리를 두는 것이다. 또한 주인공들은 모두 ‘자살’에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그의 소설들은 죽음 뒤에 남겨진 자의 살아가기 혹은 살아남기이다. ≪상실의 시대≫ ≪1973년의 핀볼≫ ≪바람의…≫는 사춘기에 자살한 여자들이 끊임없이 주인공의 삶을 간섭한다. 김정란 교수(시인?상지대)는 ≪세계의 문학≫ 특집에서 “하루키의 글쓰기는 죽음과의 글쓰기”라고 해석한다.

 가벼움의 철학은 하루키 소설의 취향에서 정밀하게 드러나는 바, 대중문화의 기호를 수시로 동원한다. 그는 1961년이라고 말하는 대신 “리키 넬슨이 ‘헬로 메리 루’를 노래한 해”라고 쓴다. 핀볼이라는 오락기구?재즈음악?진보적인 팝뮤직?옷차림과 음식 등에 대한 빈번한 묘사는 그의 소설로 하여금 ‘일본’을 떠나게 한다. 국제적이고 대중적이다. 또 재치있는 대화와 서정적인 문체, 특이하면서도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소설을 더욱 가볍게 하지만 그 가벼움은, 김정란 교수에 의하면 “소멸과의 싸움, 존재의 의미화를 지향”하면서 “놀라운 상징성과 깊이”를 가지고 있다.

 이에 앞서 평론가 이남호씨(고려대 교수)는 한국소설은 독자들의 대중적 감수성을 발견하지 않는 한 그 생명을 잃을 것이라면서 ≪소설 동의보≫과 하루키, 그리고 밀란 쿤데라를 참고할 것을 권유한 바 있다. 그러나 평론가 남진우씨는 하루키와 쿤데라가 모두 상실감에 바탕하고 있지만 하루키 쪽이 허약하다고 말한다. “쿤데라가 사물의 핵심을 꿰뚫어 보는 깊이와 해박함을 보여주면서 자기 운명과 대결하는 정직성을 드러내는 반면, 하루키는 세련미는 있지만 삶에 대한 진정성이 부족하고 제스처가 많다”고 비판한다.

 하루키의 영향을 받아 쓰여진 국내 작품들이 있다는 평론가들의 지적이 있는 가운데, 하루키 소설에 대한 반응들은 여러 갈래로 나오고 있다. 시인 이상희씨는 하루키 소설이 “우리 사회가 소설에 대해 갖고 있는 엄숙주의와 권위주의를 깨뜨릴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한다”고 긍정적 시각을 보이면서도 “그의 소설은 정신성보다는 예술의 에피타이저처럼 보인다”고 지적한다.

 하루키 문학에 대한 평가는 ‘무시’와 ‘경탄’이 서로 엇갈리고 있지만, 80년대가 ‘냉동’되어버린 이때, 전망이 세워지지 않는 지금, 젊은 작가들은 이 후기산업사회를 어떻게 직조해내 독서대중과 만날 것인가를 두고 고뇌하고 있다. 이즈음의 하루키 논란이 그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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