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변화 의미 풀고 있다”
  • 정리·정희상 기자 ()
  • 승인 2006.05.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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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수경이 말하는 ‘감옥생활 3년5개월’/《시사저널》독점 게재


 

임수경양의 방북은 고착된 분단의식을 뒤흔든 큰 충격이었다. 정권교체기의 특사로 가석방된 임양이 감방에서의 사색과, 그 기간에 바뀐 세계에 대한 생각을 술회했다. <편집자>

  4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작가로서 성장하고 싶어한 여대생이었다. 그러나 스무살 나이를 채운 이후 나는 네 번의 생일을 교도소에서 혼자 맞이해야 했다. 직접적으로는 1989년 6월30일 오후 1시30분 평양 순안비행장에서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고서부터 전개된 46일 간의 행적 때문이었다.

  46일의 방북기간중 나는 전대협 대표 자격으로 수많은 축전행사에 참석했지만 내내 머리 속을 맴돈 생각은 판문점을 통한 귀환이었다. 당시에는 남북의 젊은이들이 분단장벽을 허무는 상징으로써 판문점 통과는 역사적 당위가 돼야 한다는 생각 하나만 가졌기 때문에 휴전협정 국제법 등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7월27일 휴전협정 체결 36돌을 맞아 판문점 통과를 시도했다. 판문점을 향한 행진 도중 남측 반응을 담은 보도자료를 보니 ‘사전구속영장 발부’ ‘정전협정 위반, 안받아들일 것’ 등 긴장된 내용뿐이었다. 판문점 통과를 불허하겠다는 얘기를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던 북한도 그제서야 포기할 것을 적극 종용하기 시작했다. 북측은 “통일각 문 밖에 나서면 총을 쏠지도 모른다”며 나에게 잔뜩 겁을 주었다.

  드디어 8월15일 아침이 밝았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두손을 맞잡고 한발짝씩 남으로 향하는 문규현 신부님과 나에게 유엔군 소속 김모 소령이 메가폰을 들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돌아가라”는 경고를 계속 보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호주머니에서 주민등록증을 꺼내 보여주며 ‘대한민국 국민’임을 강조했다. 유엔군측 일행은 체념한 듯 “걸어갈 필요 있냐. 봉고차 타고 가자”며 우릴 차에 싣고 2km 남쪽에 있는 멸공관으로 향했다. 이미 도착해 있던 안기부 수사관들은 문신부님과 나를 분리해 몸수색을 벌인 후 대기시켜 둔 헬리콥터 2대에 각각 나눠 태웠다. “우린 법정에서 만날 것이다”라는 문신부님의 위로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를 태운 헬기는 이륙했다.

  이후 3년5개월이라는 짧지 않은 감옥생활 중 나는 자신의 행위를 수없이 되돌아보았다. 그러나 나의 방북활동에 대한 총체적 평가를 스스로 내리기에는 아직 때가 이르다고 판단한다. 지금은 지나간 사건이 되었지만 결국 민족통일 운동사에서 제대로 평가되고 자리매김해야 할 사안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단기적으로는 6공 들어 나의 방북이 정부 간의 교류물꼬를 트는데 결과적으로 적잖은 압력이 되었다고 보며 이는 지난 3년 간의 남북관계가 그대로 보여준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점은 “철없이 북한에 들어가 그들에게 이용당했다”는 일부의 시선이었다. 이는 방북 당시 내 나이가 어렸다는 사실을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북한 체류 기간 중 여러 결정을 개인적으로 처리하지 않았고 통일운동에 어긋나게 행동하지도 않았다. 나는 북한에서 단신이라는 어려운 조건에서도 비교적 당당하게 행동했다고 자부한다.

  다만 방북결과가 본의 아니게 공안정국을 초래해 민주화운동세력에게 위축을 준 사실만은 겸허하게 인정하고 싶다.

  추억으로 간직하기에는 너무 커다란 고통이었던 3년5개월의 수감생활은 안기부 연행 직후 서울대학병원에서 시작됐다. 89년 8월15일부터 사흘간 이 병원 12층에서 조사받은 나는 “병원에서 신사적으로 대해주니까 제대로 불지 않는다”는 안기부측의 추궁을 받은 끝에 곧이어 남산 안기부 지하 수사실로 옮겨졌다. 이때 그들은 기자들을 따돌리기 위해 강제로 남장을 시킨 채 팀장이 손목을 잡고 황급히 비상계단을 통해 나를 이송했다.

  북한의 지령을 받고 잠입탈출했다는 점과 금품을 수수했다는 점을 혐의로 뒤집어씌우려는 수사관들에 맞서 길고도 고통스러운 싸움이 시작됐다.

  수사당국이 지령수수로 지목한, 북한 조선학생위원회가 전대협측에 보낸 ‘청년학생축전 초청장’은 바로 대한적십자사가 받아 전대협에 제공한 문건이었다. 후일 재판 과정에서 증인으로 출두한 대한적십자사 전위연 사무총장의 증언이 이를 뒷받침했다.

  그외 혐의사실은 방북활동 당시 국내외 언론에 보도된 내용이라 다른 공안사건과는 달리 비교적 쉽게 수사가 진행된 편이었다.

  안기부 수사관들은 이따금씩 내가 조사받는 110호실을 가리켜 “이 자리는 서경원 문익환 김현희 이수근이 조사받은 곳이다”라며 “나가거든 110동지회나 만들어라”고 말했다.

  안기부는 김현희와, 월북했다가 재탈출한 영화배우 최은희씨 그리고 조승군·김은철·동영준 씨 등 이른바 ‘귀순 북한 유학생’을 잇따라 면회시켰다. 극도의 공포와 긴장 속에 심신이 탈진상태였던 나는 수사관들 손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고 싶은 본능적 생각만으로, 그들의 면회를 시간때우기로 받아들였다.

  면회 의도는, 북한이 싫어서 탈출한 사람들이 북한 실상을 들려주면 내게서 정치적으로 ‘의외의 소득’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계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김현희만 빼고는 나름대로 진지하게 그들을 대했다. 비록 내가 안기부 피의자로 있으나 남한 국민으로서 최소한 그들을 손님으로 만나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김현희와 대화를 적극 피한 이유는 그가 당국 주장대로 대한항공 폭파범이라면 불쾌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구속 대기중이던 내게 “차 끓여줄테니 집에 놀러오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귀순 유학생들에게는 같은 젊은이로서 내가 주로 얘기를 많이 했고 ‘충고하는’ 식이었다. 그들은 북한정권을 신랄하게 비판했는데 나는 그에 관해 “당신들이 그렇게 생각하면 북한주민으로서 김일성 정권을 물러나게 했어야지 가장 안전지대인 남한 품으로 와서 떠드는 것은 기본적인 자세가 아니다”라고 맞섰다. 분단국가의 젊은이로서 그런 식으로 맞대면해야 했던 비극을 그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유학생 중 두명은 외대에 편입한 것으로 들었다. 개인적으로는 지금 그들을 다시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다.

  서울구치소에서의 첫 1년은 조사와 재판 등으로 거의 정신없이 보냈다. 구치소 내에 양심수가 많아 외로움은 별로 없었다. 1심에서 10년을 선고받고 항고심에서 다시 5년으로 확정판결을 받았으나 형량에 그리 연연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내 관심은 선고량보다는 나의 행위에 대한 유·무죄 여부에 있었고 역사는 나에게 무죄를 입증해주리라는 확신을 가졌다.

  그러나 청주여자교도소로 이감된 후로는 사실 외로움의 고통 속에 한동안 우울증에 시달려야 했다. 그곳에서는 내가 유일한 시국사범인 데다 독방에서만 줄곧 생활했기 때문이다. 차츰 마음의 안정을 찾아가면서 비로소 세상과 단절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독서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1천2백여권의 책을 읽을 수 있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그러나 책을 마음놓고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신설 여자교도소라서 교도관들이 대부분 내나이 또래였기 때문에 웬만한 일은 마찰 없이 넘어갔으나 서책 반입은 끝끝내 나를 괴롭혔다. 신문·잡지의 경우 나나 우리 가족이 관련된 기사가 실린 곳은 어김없이 색연필로 지워진 채 전달됐다. 또 책자도 통일관련 서적은 원칙적으로 불허했다.

  고위급회담 때 어머니가 사진에 찍혀 <한국일보>에 났는데 어머니 사진을 검은 사인펜으로 북북 그어서 들여보냈을 때는 견디기 힘든 모욕감으로 담당자에 항의해 사과를 받아낸 일도 있었다.

  교도소 생활에 힘을 불어넣어준 것 가운데 하나가 구속 직후 결성된 ‘임수경후원사업회’이다. 학교 친구들은 물론 국민학생부터 할아버지에 이르기까지 수백명의 회원이 가입해 번갈아 편지를 보내는가 하면 면회도 자주 와 주었다. 그밖에 국내외 인권단체들도 끊임없이 나의 석방운동을 벌인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나약해지려는 스스로를 추스릴 수 있었다.

  구속중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를 접하면서 혼란도 많았다. 특히 소련의 쿠데타와 뒤이은 소연방 해체 소식에 가장 큰 충격을 받았다. 세계사의 변화를 어떤 의미로 받아들일지, 또 국내 민주화운동세력은 진로 문제를 어떻게 잡아나갈지 궁금증이 앞섰으나 신문·잡지 등 각종 매체를 통해 해석하기에 급급했다. 이 문제는 앞으로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공부해가면서 풀어야 할 숙제라 생각한다.

  90년 가을 남북고위급회담 때 북측 기자단과 수행원 일부가 불시에 서울 평창동 우리집을 방문했다는 신문기사를 보았다. 기사 옆에 실린 방문자 사진에는 뜻밖에도 낯익은 얼굴들이 눈에 띄었다. 내가 북한에 체류할 때 동행취재 관계로 친숙하게 지냈던 조선중앙통신 김명성 기자와 평양 중앙 TV 최 민 기자였다. 너무 신기하고 반가웠다. 신문들은 그들의 예고없는 방문에 대해 “서울 지리를 속속들이 알고 어려움 없이 찾아간 것은 치밀한 사전 각본에 따른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추측이다. 북한에서 그들과 헤어질 때 나는 두 기자에게 “통일되면 한번 놀러오라”며 집주소와 전화번호를 적고 약도까지 상세히 그려줬던 것이다.

  내 사건 이후 남북한 정부 차원의 대화가 진일보해 역사적인 남북 합의서 채택에 이른 소식을 들었을 때는 무척 반가웠다. 청년학생들의 피어린 통일운동이 드디어 양쪽 정부를 강제해냈구나 하는 내나름의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흐지부지되는 양상으로 변하자 실망감이 무척 컸다. 나는 그 이유를 남북한 양측이 대화의 순수성을 잃은 결과라고 생각한다.

  남한은 정권의 존재·유지를 위해 북방정책을 활용했기 때문에 필요에 의해 접근했다가 또 필요에 의해 정책의 일관성을 폐기했다고 본다. 북한 당국의 태도 역시 불만을 넘어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조선노동당간첩사건이 그것인데, 재판이 진행중이라 단언할 수는 없지만 만일 그 내용이 사실이라면 결코 바른 방법이라고 보지 않는다. 따라서 남북 양측 정부는 7천만 민족의 절절한 염원인 통일을 위해 보다 진실하게 접근할 것을 촉구하고 싶다.

  이번 크리스마스 특사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정국 분위기로 보아 대략 새 대통령의 취임식 전후에 석방조치가 있지 않을까 짐작했던 터였다. 그 때문에 가톨릭 신자인 나는 감옥에서 혼자 맞는 네 번째 성탄절을 자축하기 위해 12월24일 낮에 통닭을 시켜 굽고 있었다. 그때 느닷없이 교도관의 호출이 있었다. 가석방 조치가 내려졌다는 것이었다. 나는 법무부에서 내려왔다는 명단을 슬쩍 훑어보았다. 63세,58세 등 나이가 먼저 눈에 띄어 순간적으로 “장기수 할아버지들이 많이 석방되는구나”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어서 눈에 들어온 이름들을 확인하고서는 와락 불쾌감에 빠져들었다. 전경환 장병조 김재명 등 모조리 5공비리 관련자들이 아닌가. 게다가 알고보니 그들은 사면복권이고 문신부님과 나는 가석방이라는 것이다.

  솔직히 오랜 감옥생활에서 벗어나 꿈에 그리던 집으로 향할 수 있다는 기쁨을 누그러뜨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연로하신 문익환 목사님과 그밖의 수많은 양심수들을 두고 혼자만 나온 것 같아 죄송한 마음 금할 수 없다.

  새 대통령당선자는 자신이 약속한 ‘국민화합’을 위해서도 조속히 모든 양심수를 석방하기를 바란다. 아울러 1천만 이산가족의 고향방문 성사를 공약으로 내건 만큼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도록 보다 적극적인 통일정책을 펼쳐보일 것을 기대한다. 석방 이후 나는 그동안 감옥생활에 힘이 되어준 분들을 만나러 다니고 있다. 많은 분들이 내게 과분한 기대와 격려를 보내주어 어깨가 무겁다. 그분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더욱 열심히 살 것을 약속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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