苦海의 시대 관통한 ‘인간 탐구’ 대장정
  • 최원식(인하대 교수 … 문학 평론가) ()
  • 승인 1997.07.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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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 시인의 <만인보>에 부쳐/ 민족문학의 고전으로 ‘우뚝’

유신 체제의 어둠 속에서 온몸으로 절망과 희망의 드라마를 엮어갔던 70년대 사람들을 장대한 화폭에 교직한 고 은 선생의 <만인보> 출판을 기리는 이 자리에 참여한 것 자체가 저로서는 영광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구나 젊은 사람이 말 참예까지 하게 되니 송구스럽습니다. 아마도 이 시집의 의의를 밝혀 드러낼 선배 문인 평론가들께서 전부 오늘 모임의 초청인이 되시는 바람에 제가 대타로 나온 줄로 짐작합니다.

“고 은과 같은 시대에 산다는 행복”
  일찍이 고종은 다산을 읽다가 그와 시대를 함께 하지 못함을 한탄했다고 하는데, 우리처럼 문학하는 사람들에게 고 은 시인과 시대를 같이하고 있다는 사실은 하나의 축복입니다. 더구나 저 같은 평론가에게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평론을 만나지 못하는 작품은 외롭지만 작품을 만나지 못하는 평론은 더욱 쓸쓸합니다. 그런데 가끔 우리도 쓸쓸하고 싶다고 평론가들이 아우성을 칠 지경입니다만, 이는 문화의 즐거운 비명일 터입니다.

  <만인보>는 86년 11월 창작사에서 출간되기 시작했습니다. 아다시피 창작사는 창작과 비평사가 85년 12월 전두환 독재 정권에 의해 등록 취소되면서 전지식인적 항의 덕분에 86년 8월 아슬아슬하게 살아난 불구의 이름입니다. 창비는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분들이 앞장서서 항의 운동을 이끌었던 것을 깊은 감명 속에 기억하고 있습니다. <만인보>가 바로 갓 살아난 창작사에서 출간을 시작했다는 점에 유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고선생님도 이 시집 서문에서 이 점을 지적했습니다.

  ‘지난20년 동안 이 땅의 문학과 민족 현실의 엄정한 진로를 개척해온 창작과 비평사가 죽었다가 살아난 그 이름 두 자만이 남겨진 채 다시 일을 하기 시작하는 이토록 감회 깊은 판에 이 책이 나오게 된 점을 나는 마음속에 아로새기고 있다. 우리는 넓다. 우리는 그 무엇보다 더 길다.’

  이 시집의 출간에는 한 시대의 아름다운 동지적 연대가 빛나고 있습니다. 창작사라는 이 낯선 이름에 착잡해 하는 창비 사람들을 향해 ‘과비평’ 세글자는 나중에 찾아오자고 위로한 고선생의 말씀이 지금도 선명히 생각납니다.

  과연 6월 항쟁의 승리로 ‘ 과비평’ 세 글자를 탈환하여 창작사는 다시 창작과 비평사로 복구되고, 신군부의 폭압에 폐간되었던 계간 <창작과비평>도 복간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우리를 도도한 사람의 바다로 인도하는 이 시집의 세계에 이때의 두터운 연대 경험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리라고 짐작하는 것은 단지 저의 아저인수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럼 망망한 사람의 바다로 오묘한 항해를 계속하는 이 시집은 어떻게 태어났을까요? 시인은 이 시집 구상이 ‘8-년대 벽두 남한산성에서 떠올랐다’고 회고하고 있습니다. 유신 체제의 폭력적 재편 과정에서 조작된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남한산겅 육군 교도서의 엄혹한 옥중에서 시인이 오히려 공포 속에 얼어붙은 세상 사람들을 향해 따뜻한 살아 남은 치욕 속에서 <사기> 완성에 몰두한 사마천의 위대한 인간주의적 자각에 견줄 수 있을 만큼 눈물겹기조차 합니다.

 아다시피 <사기>의 획기성은 역사 속에 부침하는 많은 인물의 열전을 역사 서술의 중심에 두었다는 점입니다. 이를 통해 사마천은 궁중의 권력 투쟁사로 시종하는 기존 사서들과 달리 역사를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진정한 드라마로 만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무서운 격절 속에서 두터운 군중주의가 열렸다는 이 역설은 우리를 숙연하게 합니다. 마치 공복 직후 이쾌대의 역동적 <군중도>와 이응로 화백 만년의 따뜻한 추상의 <군중도>를 볼 때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이 두터운 군중주의가 몰개성적 집단주의로 떨어지지 않은 점에 이 시집의 진정한 매력이 있습니다. 그 수많은 인물의 파노라마에서 그들 모두가 쉽게 투과되지 않는 개성을 내뿜고 있는 점은 장관입니다. 각자성불. 천하의 중생이 자기 생긴 대로 자기 자리에서 각기 부처를 이루는 경지가 이 시집 속에 생생히 구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고선생이 82년 출옥한 그 이듬해 결혼과 함께 안성으로 낙향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합니다. 시인은 시골 농민과의 속 깊은 친교를 통해서 70년대의 전투적인 정치 시대에 다소 추상화한 민족과 민중 관념을 일ㄹ거에 넘어섬으로써 <만인보>의 민중을 육체를 가진 살아 있는 이간으로 재탄생시켰던 것입니다.

  저는 최근에 박혜숙 교수의 논문을 통해서 김여의 <사유악부>라는 연작시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18세기 말~19세기 초 함경도 부령으로 유배간 김 여는 그 지방민의 생활사를 2백90편의 연작시로 노래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박교수가 <사유악부>가 흡사 <만인보>를 읽는 듯하다고 평한 것입니다. 물론 고선생은 이 작품을 읽은 바 없겠지만, 이처럼 시대를 넘어 끊어진 문학 전통이 다시 살아나는 일을 목격하는 일은 정말로 흥미로운 일입니다만, 이 점에서도 <만인보>의 문학사적 위상이 종요롭습니다. 그런데 <만인보>는 지방의 구체적 민중 체험을 ‘사람에 대한 끝없는 시적 탐구’로 들어올렸다는 것이 의미심장합니다. 문학과 정치의 힘겨운 통일에 한 걸음 성큼 다가선 <만인보>는 이미 우리 민족 문학의 고전입니다.

기억의 순수성 보존해야 할 책무 ‘엄중’ 
  10년 여에 걸친 인간에 대한 시적 탐구의 대자정이 드디어 70년대 사람들에 미쳤습니다. 오늘 이 자리는 시인에게 영감을 제공한 70년대 사람들이 함께 모여 시집 출간을 기념하는 매우 희귀한 문학적 현장이 되고 있습니다. 그와 함께한 시대의 고난과 한 시대의 축복이, 한 시대의 절망과 한 시대의 희망이, 그 모든 기억들이 따라와 이 자리를 아우라(aura)로 둥그렇게 감싸고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옛날을 돌아보기 위해 이 자리에 온 것이 아닙니다.

  이 기억의 잔치는 시인의 말대로 ‘개인적인 망각과 방임으로 사라질 수 없는’ ‘진실의 기념’이 되지 않으면 아니됩니다. 우리 사이에 분열이 있었다면 그 분열을 넘어서, 우리 내부에 타락이 있었다면 그 타락을 넘어서, 우리 사이에 갈등이 이었다면 그 갈등을 넘어서, 기억의 순수성을 보존 할 책무가 엄중합니다.

  문민 정부 4년 만에 개혁이 좌초할 위기를 맞이 한 오늘날 전국민적 허탈감을 기화로 수구 복귀를 노리는 기도를 막고, 더 나아가 21세를 맞이할 새로운 인간 공동체를 재창출하는 일이야말로 70년대 사람들에게 헌정된 <만인보> 출간을 기념하는 진정한 보람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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