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후보들, 문화에 눈 떠라
  • 이재현(문화 평론가) ()
  • 승인 1997.07.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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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대선 후보들, 특히 경선에 나선 신한국당 주자들의 문화 부문 정책이나 공약을 보면 여러 모로 한심하기 그지 없다. 우선 대선 주자들은 다른 부문과 달리 문화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 정책다운 정책, 공약다운 공약이 없다는 것이다. 문화부문에서는 표가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해서인가?

둘째로, 그나마 무엇인가 말하고 있는 경우에도 주자들은 미리 입이라도 맞춘 듯이 보수적인 견해만을 드러내고 있다. 예컨대, 거의 모든 주자가 포르노 전용관 조차 반대한다. 그러나 포르노 전용관은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 그보다는 영화에 대한 검열을 찬성하느냐 아니냐가 우선이다. 등급제라든가, 등급 외의 처리, 독립 및 단편 영화에 대한 검열 폐지 등은 그 다음 순서에 해당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문화적 빈곤은 대선 주자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90년대는 문화의 시대라고 말들 하지만,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 문화 영역에 대한 인식이 낮다. 이렇듯 인식이 낮은 것은 아직까지 정치나 경제 쪽의 힘이 너무 세기 때문이기도 하며, 그와 더불어 문화 쪽에 투자할 만큼 사회적 잉여를 축적하지 못했다고 볼 수도 있다.

문화는 상상력 · 창조력 돋우는 사회간접자본
관점에 따라서는 문화를 일종의 사회간접자본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문화라는 사회간접자본은 다른 사회간접자본과 달리 직접적인 효과를 갖지는 않는다. 그 대신 사회 구성원의 상징적 상상력과 창조적 발상을 이끌어 내는 통로 구실을 한다. 문화라는 사회간접자본이 잘 구축되어 있다면 상상력과 창조력을 위한 물류비용이 엄청나게 절감되는 것이다.

물론, 문화 발전에서 정부가 차지하는 역할은 현재로서 매우 크다. 하지만, 문화 발전이 정부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문화발전에서 사회 구성원 각자의 문화 역량이 지니는 비중도 역시 다른 것 못지 않게 높다. 이때의 문화 역량은 좁은 의미에서는 문화 예술을 향유할 능력을 뜻하며, 넓은 의미에서는 자신의 삶과 세계를 나름의 가치 기준과 취향으로 바라보고 꾸려나가는 능력을 뜻한다.

좁은 의미와 문화 역량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을 재는 중요한 잣대 가운데 하나가 자생성이다. 예컨대, 요즘 '컬트'라는 말을 자주 쓴다. 컬트영화·컬트 뮤직·컬트 음료·컬트 광고라는 말이 쓰이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그런데 한국적 컬트의 문제점은 수용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생산자가 제멋대로 컬트라는 이름을 참칭하는데있다.

원래 컬트란 용어는 미국에서 '주류에서는 벗어나 있지만 일부 소수층이 열광적으로 숭배하는'영화. 특히 도심의 소극장이나 교외의 드라이브인 극장, 대학 강단등에서 상영된 심야 영화로서 10대 후반~20대 중반 저젊은이에게 어필한 영화를 뜻했다. 단적으로 말해 컬트란 용어는 수용자의 자발적 선택과 그 집합적 결과와 관련한 것이다. 이에 반해 한국에서는 생산자가 스스로 컬트를 자처한다.

키치로서의 컬트가 한국적 컬트
이렇듯 우리의 문화는 키티적 속성을 너무 강하게 지니고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기표만을 수입했을 뿐 기의나 혹은 기호가 놓인 맥락은 전혀 도외시한다. 겉보기만 그럴듯하게, 그것도 싸구려로 흉내내면서 치장하는데 그치는 것이 우리 문화의 속서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적 컬트란 아주 독특하다. 수용자는 가만히 있는데 생산자들이 모여서 제각기 '열광적으로'컬트라는 말은 가지고 떠드는 것, 즉 키치로서의 컬트가 한국적 컬트인 것이다.

한국적 컬트의 일화가 보여주는 것은 결국 우리에게 치명적으로 부족한 것 가운데 하나가 넓은 의미의 문화 역량, 즉 자기 나름으로 '삶의 양식'을 꾸려나가는 능력이라는 점이다. 즉, 피아노를 배우고 미술학원에 다님으로써 얻어지는 좁은 의미의 문화 역량도 중요하지만. 결국 문화 발전의 배후에서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넓은 의미의 문화역량이다.

넓은 의리의 문화 역량이 발휘되는 곳은 자식들의 교육과 부모들의 문화적 선택에서 이다. 내 자식이 불이익을 받더라도 촌지를 안 주는 것, 친구 없어 심심할지 모르더라도 3~4개 학원에 보내지 않는 것, 대학에 못 들어가거나 3류 대학에 입학하더라도 과외를 시키지 않는 것 등이다. 물론, 사회 구성원 각자가 넓은 의미의 문화 역량을 키우는 데에도 제도 개혁이 우선해야 한다. 교육 제도라든가 각종 문화 제도의 발본적 개혁 말이다. 대선 주자들이 명심해야 할 것은 바로 이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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