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밑창에 다리미 속에… 끝없는 숨박꼭질
  • 김상익 차장대우 ()
  • 승인 2006.05.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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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수 수법 갈수록 지능화


 

  지난 11월 중순 관세청은 금괴를 실은 어선이 부산에 입항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단속반은 배가 들어오기를 기다려 검색을 실시했다. 배 밑창과 기관실을 샅샅이 뒤졌으나 허탕이었다.

  그날 밤 초소에서 근무하던 세관 공무원은 승용차를 타고 항구 밖으로 나가려던 한 선원을 불러세웠다. 그 선원은 이전에도 한차례 나갔다 들어온 사람이다. 확실한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수상쩍은 냄새가 났다.

  차량 검문 결과 의자 밑에서 금괴 23kg이 발견됐다. 단속반은 항구 밖에서 대기하던 밀수꾼을 덮쳐 이미 빼돌린 금괴 24kg을 더 적발해냈다.

  검거된 밀수꾼 뒤에는 자금책과 판매책 등 밀수조직이 있을 터였다. 그러나 이들은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끈질긴 취조 끝에 “모다방에서 자금책과 만나기로 했다”는 자백을 얻어냈다.

  단속반이 그 장소에 도착했을 때는 자금책이 이미 자리를 뜬 뒤였다. 점조직으로 이루어진 그 밀수조직은, 연락책이 약속시간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자 도마뱀처럼 꼬리를 잘라내고 잠적했다.

  금괴 밀수는 주로 항만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주요 공급처는 일본과 홍콩이다. 한국과 홍콩간 정기화물선과 생선을 싣고 일본과 한국을 오가는 활선어선이 밀수에 이용된다.

  국내 밀수조직은 먼저 선원(운반책)을 포섭하고 홍콩·일본의 해외 공급책과 시간 약속을 한다. 포섭된 선원은 해외 공급책으로부터 금괴를 건네받은 뒤 동료 선원 몰래 배 안에 ‘비창’(비밀창고)를 만든다.

  한 배에 보통 30kg~50kg이 운반되지만 1백kg 단위로 노는 통 큰 밀수꾼도 더러 있다. 92년 1월 부산경찰청 특수강력수사대는 재일동포 2명이 낀 1백억원대 국제 금괴 밀수단을 적발하기도 했다. 이들은 금괴 8백55kg을 밀반입하려다 검거됐다.

  배 안에는 그야말로 숨길 곳이 널려있다. 배 밑창이나 기관실은 보물창고다. 복잡하기 그지없는 기관실 안에 구멍을 뚫은 뒤 금괴를 숨기고 용접을 해버리거나 큼직한 나사못을 박고 기름칠을 해놓으면 감쪽같다. 배 밑창의 수통을 이용하느 경우도 있다. 92년 11월 밀수배가 들어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부산세관측은 수상쩍은 한 배의 밑창을 땄다. 실어 나르는 생선에 물을 공급하는 데 쓰이는 수통 중에서 사용되지 않는 통을 거울로 비춰가며 수색한 결과 여자 스타킹으로 감싼 대량의 금괴를 찾아냈다.

  단속반이 정보를 입수해 검색을 실시하더라도 종종 허탕을 치는 것은 그만큼 교묘하게 숨기기 때문이다. 아주 드문 경우지만 정보가 확실하다고 판단될 때는 배를 완전히 해체하기도 한다.

  입항한 배가 세관을 무사히 통과하면 운반책은 금괴를 밖으로 빼돌린 뒤 자금책과 접선한다. 이때 운반책이 받는 수고료는 1kg에 10만원 안팎인 것으로 알려진다. 위험부담이 있긴 하지만 금괴 50kg을 운반하면 5백만원이란 뭉칫돈이 굴러들어온다. 그래서 운반책을 희망하는 사람이 넘쳐난다는 말도 공공연하게 나돈다. 선원들이 밀수 유혹에 넘어가기 쉬운 것은 열악한 근무조건과도 관계가 있다는 지적이 있다.

  금괴를 손안에 넣은 자금책은 이문을 붙여 판매책에게 넘기고 판매책은 다시 전국, 특히 서울의 도매상에 금괴를 푼다. 물론 도매상이 직접 밀수꾼과 거래하는 것은 아니다. 속칭 ‘나까마’라는 중간상인이 끼게 된다.

  부산·여수 등 항구에서 밤열차를 타고 새벽에 서울역에 도착해 오전중으로 도매상에 까는 것이 전통적인 공급형태이지만 요즘은 달리는 차 안에서 거래를 하는 등 수법이 날로 지능화·고도화하고 있다.

 

고유번호 등 ‘얼굴’지워 정상구입 위장

  금괴는 이 과정에서 ‘얼굴’이 사라진다. 금괴의 앞면에는 고유번호 제조업체 순도 중량 보증기관 등이 표시돼 있지만 산소용접기 등으로 열을 가해 이를 뭉개버린다. 이렇게 하면 거래 도중 적발되더라도 빠져나갈 구멍이 생긴다. 금괴의 얼굴을 지워버렸기 때문에 정상적으로 구입한 금괴라고 둘러댈 수 있는 것이다.

  공항을 통한 밀수품은 주로 외국 여행자의 휴대품에 숨겨 들어오는데 이 수법도 날로 지능화하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전기다리미나 녹음기 사진기 등을 분해해 금괴를넣고 다시 조립하는 수법이 늘고 있다.

  밀수가 근절되지 않는 것과 관련해 공항이나 항만 직원이 개입되지 않았느냐 하는 의문도 끈질기게 제기되고 있다. 92년 4월 김포공항을 통한 금괴 밀수 사건은 이같은 세간의 의혹이 사실임을 입증했다.

  금괴 25.5kg을 몰래 가지고 들어온 한 홍콩인 2명은 화장실에서 세관원에게 붙잡혔다. 이들은 “화장실에 들어가 있으면 접선자가 노크를 3번 한 뒤 헛기침을 하면서 신호를 보낸다”는 약속에 따라 화장실 안에서 접선자를 기다리던 중 미리 정보를 입수하고 이들을 미행한 세관원에게 붙잡혔다. 김포세관은 수사 결과 헛기침을 하고 나타날 접선자가 공항에서 상주하는 경찰관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 경관은 모두 3차례 금괴를 전달했으며 사례금으로 9백만원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밖에도 세관원을 낀 밀수사건이 이따금씩 적발돼 세관 당국을 당황케 하고 있다. 일부 귀금속 판매업자는 “금은방을 단속할 것이 아니라 공항과 항만이나 잘 단속하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관세청은 연간 20~30건씩 밀수를 적발하고 있지만 이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뿐이다. 업계에서는 거의 매일 하루 2백kg 이상 규모로 밀수가 이뤄지는 것으로 보고 있다.

  밀수는 외화의 불법유출과 관세 등 세수의 감소를 가져온다. 일본의 금괴가 밀수된다면 우리 국민이 일본 정부에 세금을 내는 꼴이 된다. 금괴 밀수는 국제적으로도 망신살 뻗치는 일이다. 금이 밀수되는 나라는 우리나라와 인도 네팔 등 몇나라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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