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정말 왜 이럴까
  • 박완서 (객원편집위워 · 소설가) ()
  • 승인 1992.04.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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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조를 뽐내려면 유혹을 물리친 경력이 있어야 한다. 젊어서, 아직 때묻을 새가 없었음은 자랑이 아니다

 지난 토요일 오후였다. 신촌쪽에 있는 어느 전철역에서 내렸다. 굉장한 혼잡이었다. 개찰구를 나오자마자 볼일이 급해 우선 화장실을 찾아갔다.

 거기 또한 대만원이었다. 칸이 다섯 개가 있었는데 각각 다섯명 이상씩 줄을 서 있었다. 갈길도 급하지, 볼일도 급하지, 그렇다고 새치기를 하거나 남의 양해를 구할 융통성도 없지, 단 하나의 재주는 시선과 머리를 맹렬히 굴려 ‘이 다섯 중 중 어느 줄이 가장 빠를까’하고 점을 치는 수밖에 없다. 내 점은 결코 들어맞지 않는다는 절망부터 하면서.

 처음엔 가장 짧은 줄에 가서 붙었다. 그러나 옆의 줄은 빨리 줄어드는데 우리 줄은 그대로여서 냉큼 옆으로 옮겨 붙었다. 잘한 것 같았다. 딴 줄보다 신속히 줄어들어 곧 내 앞 사람 차례가 됐다. 그러나 그가 나와야 말이지. 먼저 줄에만 그냥 있었어도 벌써 끝났을 일을 나는 마냥 대기중이었다.

 그가 들어가 앉았는 문위로 모락모락 푸른 연기까지 피어오르고 있었다. 외국은 어떤데 우리는 아직 저렇다는 식의 개탄은 정말 싫지만, 외국의 그럴듯한 거라면 없는 게 없는 나라에서 왜 줄서기의 모방은 안 이루어지는 것일까.

 다 알다시피 미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나라에선, 아무리 볼일 볼 창구가 여럿이라도 줄은 한줄로 섰다가 창구가 비는 대로 차례차례 들어가게 돼있다. 눈치 볼 것도 없고 손해나 득 볼 것도 없이 만인에게 공평한 매우 합리적인 방법이라 하겠다.

 비싼 로열티 같은 거 안주고도 들여다 써먹을 수 있는, 그 좋은 선진국 풍습이 우리의 선진 조국에서 아직 안통하는 것은, 모든 기회는 눈치와 요행이 조정해야만 기회의 참맛이 있는 것처럼 여겨온 우리의 민족성하고도 관계가 있는 게 아닐까. 푸른 연기를 쳐다보면서 나도 느긋하게 체념하기 위해 해본 생각이다.

모든 기회는 ‘공평’보다 눈치와 요행이 조정해야 참맛?
 나는 이 글을 바로 선거 전야에 쓰고 있다. 그러나 이 글이 세상에 나갔을 때는 투개표가 끝나 선거얘기는 뒷북치는 얘기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신문도 텔레비전도 라디오도 선거 외의 딴 일은 아무 것도 일어나고 있지 않은 것처럼 오로지 선거바람만 불어넣고 있다. 작금에 일어난 정치 경제 사회적인 일을 다루는 시사지에다 글을 쓸 때와 나갈 때의 이런 시차는 필자를 매우 곤혹스럽게 한다. 재수 나쁘게 하필 거기 걸리다니. 나도 모르게 선줄서기까지 잘못 선 모양이다.

 게다가 나는 아직 내 앞가림도 못하고 있다. 투표 전야인데도 아직 누굴 찍을지 못 정하고 있다. 거대여당의 작태에 대한 혐오감고 경고를 표현하기 위해서라도 야권 성향의 인사를 찍자는 원칙 하나는 정했건만 누가 기인지는 아직 못가려낸 채이다.

 우선 제쳐놔야 할 여당후보가 4년 전 두 애당 중의 하나로 당선됐다가 지금 여당으로 변신해서 나왔으니 그를 안찍는다 해도 그가 끼친 피해는 아직도 유효하다. 정치꾼이라면 이마부터 찌푸려지는 정치혐오증의 피해 말이다.

깨끗하자고 소년 · 소녀를 국회로 보낼 수는 없지 않는가
 재벌이 급히 만든 정당의 입후보자는 전에 여당공천으로 나왔다가 낙선한 인사이다. 나머지 정통야당임을 내세운 이는 다행히 그런 변신의 경력은 없다. 그도 그걸 분명히 의식하여 때묻지 않고 깨끗한 몸임을 정견 이상으로 내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삼십대다. 깨끗한 지조를 자신있게 뽐내려면, 적어도 지조를 위협할 만한 계기나 유혹이 있었는데도 물리치고 대의를 지킨 경력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미처 변신하고 때묻을 새가 없어서 못한 게 결코 자랑이 될 수는 없다. 젊은 나이가 무한한 가능성이 라면 변신과 오욕의 가능성일 수도 있다. 아무리 권력과 물욕을 위해서 의리나 지조를 헌 신짝과 다름 없이 아는 정치인한테 넌더리가 났다고 해고 소년 소녀를 뽑아 국회로 보낼 수는 없는 것과도 같은 이치이다.

 이제 남은 것은 무소속인데 인물 위주로 뽑아야 한다는 의견에 일리가 있는 이상 가장 관심있게 봐줘야 할 후보다. 그러나 그는 정당의 후광을 입지 않고도 빛날 만큼 출중해야 한다는 부담을 안고 있다. 그런 후보가 선거구마다 있기를 시대할 순 없다.

 이렇듯 次善은 고사하고 次惡이라도 선택해야 할 구차한 입장이면서도 욕심은 있어서 이왕이면 내가 찍은 사람이 당선되는 걸 보고싶다. 그래서 자꾸 남의 눈치를 보게 된다. 눈치로 여당은 아니겠거니 싶은 인사를 만나면 저 사람은 누구를 찍을까 은근히 탐색하게 된다. 내딴엔 여론조사를 해서 미리 대세를 점치려 들지만 이렇게 눈치로 때려잡은 대세가 또 수시로 변하니 이 아니 황당한가.

 또 다시 화장실 줄서기를 잘못 점쳤을 때 꼴을 당할 게 뻔하다. 아아, 나는 정말 왜 이 모양일까. 그러나 내가 아무리 미욱해도 확실하게 내다볼 수 있는 게 하나 있는데 그건 이번에도 이변이 일어나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될 사람이 되면 결코 이변이라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극회의원은 마땅히 해야 할 사람이 돼야 한다는 건 말할 것도 없다. 될 만하다고 믿고 밀어줄 만한 이사가 드문 선거가 참으로 쓸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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