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한 왕의 후예들 “오욕 씻어내자”
  • 박성준 기자 ()
  • 승인 1997.08.21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왕실 재평가 활동 등으로 명예 회복 나서

경기도 포천에서 작은 농장을 경영하는 이혜원씨는 남다른 사연을 가슴에 묻고 있다. 그의 부친 이해종씨(72년 작고)는 명성황후가 갑작스럽게 죽지 않았더라면 순종 대신 고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을지도 모를 의친황의 아홉 번째 아들이었다. 그러나 해종씨는 생전에 어머니의 성을 물려받아 전씨로 행세하며 살았다. 해종씨의 생모 전경복씨가 워낙 자존심이 강한 나머지 자기 아들의 이름을 와실 호적에 올리지 않고 따로 나와 살았기 때문이다. 혜원씨는 조선 왕실의 직계 후손인 셈이지만, 자기가 전씨 인 줄로만 알고 자랐다.

의친왕 5남, 전두환에 쫓겨난 뒤 ‘화병 사명’
혜원씨가 자신의 뿌리 찾기에 나선 때는 극히 최근이다. 일찍이 미국 땅으로 유학가 그곳에서 줄곧 거주해온 고모 해경씨(의친왕의 5녀)와 연락이 닿아 할아버지 묘소를 서삼릉에서 금곡릉으로 이장(왕실 용어로는 천묘)하는 일에 관여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혜원씨는 현재 자신의 호적을 되찾기 위해 소송을 제기했으며, 집안 대소사를 챙기고 의친왕가를 재건하는 일에도 동분서주하고 있다. 혜원씨가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경기도 포천의 산골짜기로 들어간 것도 이 같은 이유 때문이다.

혜원씨는 조선 왕실의 후손 가운덴 비교적 순탄하게 인생을 살아온 편이다. 혜원씨 일가가 워낙 일찍이 왕가에서 떨어져 나와 역사의 격랑을 적게 탔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실 후손들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이들은 저마다 많은 사연을 가슴에 간직한 채 혜원씨보다 훨씬 더 어려운 삶을 살아 왔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얼마전 서울 강남에서 음식점을 개업한 이 석씨(아명 이영길)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1940년 의친왕과 홍정순씨 사이에서 의친왕의 열한 번째 아들이 태어난 이 석씨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밤무대 가수로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장 면 정권 때 문화재관리국장까지 지낸 이수길씨(호적명은 이해일·의친왕의 5남)는 전두환 정권 때인 80년대 초, 이전까지 살아오던 집(칠궁·지금의 청와대 영빈관 자리)에서 갑자기 쫓겨나가 화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당시 청와대가 마련해준 서울 개포동의 15평짜리 시영 아파트에서 어렵게 사는 수길씨의 부인 김신덕씨는 “(수경사)30단 사람들이 와서 트럭 2대로 집안에 있는 살림살이를 있는 대로 들어냈다. 원래 그 집은 장 면 정권 때 정부가 우리 집안에 되돌려주기로 확약했던 것인데, 정부가 보관하고 있던 근거 서류가 없어지는 바람에 강제로 이사를 당할 때에도 앉아서 당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한다.

조선 왕실의 몰락은 일제가 한·일병탄을 통해 조선을 불법 강점할 때부터 예견되었다. 한편으로는 회유하고, 한편으로는 왕족의 씨를 말리는 일제의 조선 왕실 탄압은 가혹하고도 철저했다. 예컨대 조선 왕조의 마지막 임금 순종이 일제가 몰래 아편을 탄 커피를 마신 뒤 갑자기 신체 이상을 보여 죽을 때까지 지체 장애자로 살았다는 얘기는 학계에서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원래 순종은 이 같은 사건이 일어나기 전, 고종이 그의 총명함을 자랑할 정도로 똑똑하고 재주가 특출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운도 잇따랐다. 영친왕이 그랬듯이, 고종의 딸 덕혜 옹주는 열한 살 되던 해에 유학이라는 명복으로 일본에 끌려갔다. 그곳에서 덕혜 옹주는 일제의 주선으로 일본 대마도주와 강제로 결혼했으나 ‘정신이 이상하다’는 이유로 이혼 당했다. 덕혜 옹주는 광복 후 귀국하여 한국에 정착했지만 89년 외롭게 죽음을 맞았다. 하나뿐인 딸이 세상을 등진 뒤였다. 가족들은 덕혜 옹주의 딸이 대한해협에 몸을 던져 자살한 것으로 알고 있다.

조선 왕실의 혈족들이 대부분 의친왕 계열인 이유는, 의친왕을 빼놓고는 순종이나 영친왕, 덕혜 옹주 등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이다. 반면 의친왕(1955년 작고)은 생전에 13남 9녀를 낳았다. 조선 왕실의 혈맥은 영친왕의 하나뿐인 아들 이 구씨(일본 체류)가 사망한다면, 사실상 의친왕 계열을 통해 이어질 수밖에 없는 셈이다.

의친왕의 둘째 아들 이 우씨는 의친왕과 같은 항렬인 영선군(고종의 형 이 희의 장남 이준용)의 대를 잇기 위해 출계(出系)했는데, 태평양전쟁 때 일본군 장교로 만주에 나가 있다가 ‘히로시마 대본영’으로 소환되었다. 일제가 ‘현지에서 독립군과 연락할지 모른다’고 의심해 만주에 있던 그를 본국으로 소환한 것이다. 이 우씨는 45년 8월 히로시마 원폭 피폭 때 사망했다.

왕실 후손들의 수난은 광복 이후에도 이어졌다. 이승만 정권은 왕족들에게 ‘나라를 빼앗긴 장본인’이라는 굴레를 씌우고 ‘구황실 재산 관리법’을 제정해, 조선 왕조의 재산 일체를 국유화했다. 그리고 후손들에게는 생계비만 지원하고,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방대한 규모의 왕실 토지를 민간에 팔아 넘겼다. 이승만 정권은 한때 의친왕이나 영친왕 등 왕실 주요 인사들의 입국을 막기도 했다. 왕족들이 행여 왕정 복고를 추진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였다.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입국을 좌절당한 이들은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뒤에야 가까스로 입국이 허용되었다.

의친왕의 ‘독립운동’ 인정 못받아
의친왕가의 후손들이 살던 집에서 쫓겨나고, 그 터에 호화로운 영빈관이 들어선 것은 5·6공화국 때이다. 앞서 말했듯이 이 과정에서 이수길씨가 화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고, 그의 동생 경길씨(의친왕의 8남)는 전국 각지를 떠돌다가 95년 경기도 수원의 한 무료 양로원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일찌감치 조국을 등진 이도 많다. 미국 컬럼비아 대한 한국학도서관 사서로 일하다가 얼마전 정년 퇴임한 이해경씨가 대표적이다. 56년 한국을 떠난 해경씨는 아버지 의친왕의 묘소 이전(96년)일 때문에 한국에 들르는 등 비교적 자주 한국과 접촉하기는 했지만 지금까지도 ‘미국에서 살다가 죽겠다’는 결심을 버리지 않고 있다. 해경씨의 설명에 따르면, 충길·문길·정길·희자·창희·해란 씨 등 의친왕의 자녀 상당수는 미국 뉴욕·로스앤젤레스 등지에서 선물 가게를 하거나 회사원으로 상계를 꾸리고 있다.

‘나라를 빼앗긴 왕가의 자손들’이라는 이유로 사회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것이 싫어 조국을 등지기는 했지만 이들에게도 변화의 조짐이 일고 있다. 지난 6월 이해경씨가 <나의 아버지 의친왕>이라는 책을 출판한 것을 계기로, 조선 왕실을 재평가해 자기네에게 들씌워진 불명예를 씻어버리자는 움직임이 조심스럽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의친왕독립정신현장회가 회원 27명 연명으로 국가보훈처를 상대로 낸 ‘의친왕 이 강 공의 독립 유공자 포상 신청’도 이 같은 움직임과 궤를 같이 한다. 독립운동 단체인 대동단 활동, 상해 임시 정부로 탈출한 사건, 경남 거창에서 의병을 양성하려 했던 사실들을 들어 의친왕의 독립운동 사실을 인정해 달라는 내용의 이 신청서는 보훈처의 서훈 심사 내규에 걸려 받아들어지지 않았다.

조선 왕실의 후손들은, 조선 왕실에 대한평가가 지나치게 일방적이었다고 생각하면서도 “역사의 평가만 제대로 내려진다면 서훈을 받는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같은 ‘정당한 평가 요구가일언지하에 거절당한 데 대한 왕실 후손들의 심경은 착잡하기 그지없다. “우리는 자존심이 없으면 쓰러지는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활이 아무리 어려워도 누구에게 손을 벌리거나 무엇을 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매국노 이완용의 후손은 땅 찾기에 성공하고, 우리는 선조들을 있는 그대로 평가해 달라는 요청마저 거절당하고 있다”라고 이혜원씨는 말한다. 시대 상황이 변한 만큼, 현실적 필요에 의해 사실 이상으로 과장되어 이어져온 ’부정적 평가‘만큼은 이제 지울 때가 되었다는 얘기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