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치1호’ 새해 하늘 날다
  • 박중환 편집위원 ()
  • 승인 2006.05.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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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국산비행기… “민간비행 금지선 탓 보급에 제한”


 

  첫 국산 비행기 ‘까치1호’가 새해 하늘에 가뿐히 날아 올랐다. 충청남도 태안반도의 높새바람을 박차고 날개를 편 까치1호 앞에 서해와 서산평야가 펼쳐졌다. 서울 하늘을 돌아 설악을 내려다보고 제주까지 날고 싶었지만, 전국의 하늘이 민간비행 금지선으로 겹겹이 얽혀 있어 몽산포 상공에서만 맴돌아야 했다.

  까치1호는 비록 초경량급이지만 설계에서부터 모형기 및 시제기의 제작, 그리고 시험 비행과 마무리 조정(트리밍)에 이르기까지 모두 우리 손으로 만들어 성능을 시험한 첫 우리 비행기이다. 2명이 앞자리에 나란히 앉아 함께 조종하는 까치1호는 전장 6m, 전폭 10m, 전고 1.4m이며 자체무게(조종사를 태우지 않았을 때의 무게) 2백15kg, 최대 허용 중량은 3백86kg이다. 앞날개 양쪽과 뒷날개 양끝의 수직·수평날개를 분리할 수 있어 평상시에는 소형 컨테이너에 실어 아파트 주차장에 둘 수 있으며 필요하면 승용차로 끌어 이동할 수 있다. 2명의 숙련자가 조립 또는 분리하는 데 10분쯤밖에 안걸릴 만큼 편리하게 만들어졌다.

  특히 이륙하는 데 필요한 활주거리가 80m 정도밖에 안돼 웬만한 평지에서도 이·착륙이 가능하며, 활공력이 뛰어나 1천5백m 상공에서 엔진을 끈 채 12km를 글라이더처럼 바람을 타고 미끄러지듯 가볍게 착륙할 수 있다. 이같은 활공력은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초경량급 비행기의 하나로 공인된 영국의 ‘섀도’와 비슷한 수준으로, 까치1호의 높은 안전도를 보장한다.

  최대 시속 1백80km, 失速시속(속력을 최대한 줄여 날 수 있는 속도)은 55km, 엔진의 75%출력으로 날 수 있는 정상시속은 1백30km이다. 초경량급에서는 엔진의 자체개발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오스트리아 로텍스사의 수냉식 엔진을 달았다. 이 엔진은 2행정 64마력의 소형이어서 관리비가 소형 승용차 수준에 불과하다. 휘발유 30l를 넣고 정상비행 속도로 4백km 정도를 날 수 있어 서울에서 부산까지 비행이 가능하다.

  까치1호의 시험비행 성공은 순수 민간 동호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 주인공은 ‘오로지 날아 보고 싶어 하는 뭉치6명’. 박호선씨(48·동인산업 대표이사) 최문호씨(40·모형항공기 전문가) 곽영호씨(29·인하공대 항공과 졸업) 김병재씨(33·비행교관) 조은식씨(22·기계공고 졸업) 김병생씨(41·비행교관) 등이 그들이다.

  이들이 비행기 제작에 손을 댄 것은 모형미행기와 경주용 모터보트를 취미로 만들던 박씨가 최씨와 곽씨에게 “우리가 탈 수 있는 비행기를 만들어 보자”고 제의한 데에서 비롯됐다. 그 계기는 월간 《리더스 다이제스트》1988년 4월호에 실린 섀도와 이 비행기를 제작한 영국인 데이비드 쿡에 관한 기사였다. 문씨와 의기투합한 박씨는 해외출장길에 영국에 들러 데이비드 쿡을 만났다. 박씨는 섀도 부품 한세트를 국내에 들여와 한달만에 조립하는 데 성공, 영국에서 온 검사비행관을 놀라게 했다. 나머지 3명은 소문을 듣고 찾아와 무보수로 일하겠노라고 나선 ‘뭉치’들이다. 이들은 ‘큰 뭉치(박씨)’, ‘둘째 뭉치’ ‘막내 뭉치’와 같은 애칭을 갖게 된 것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긴다.

 

초경량 비행기 해외 수요는 높아

  섀도1호기를 만들 때만 해도 취미 수준에 지나지 않았지만 섀도2호기를 만들면서부터 이들은 부품을 국산화하는 등 그들 나름의 노하우를 쌓았다. 섀도2호기를 시험비행한 공군사관학교 장덕수 교수, 한국항공우주연구소 김종철 비행제어실장은 섀도의 성능과 뭉치들의 재간을 놀라워 했다. 데이비드 쿡은 이들의 재능과 열정에 감탄한 나머지 아시아·태평양지역의 섀도 독점공급권을 무상으로 주기도 했다.

  이들은 마침내 정부의 첨단기술 7대 과제(G7) 중 항공기반기술 대상에 선정되어 까치1호기를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박씨는 “선뜻 내키지 않았다”고 당시를 술회한다. 일을 거창하게 벌이고 싶지 않았고, 성공한다 해도 전국이 비행구역(空域) 제한으로 묶여 있는 상태여서 국내시장을 개척하기가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국내 항공산업의 기반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해야 할 일인 것 같아 결심했다”는 그는, 지금도 답답한 것이 한둘이 아니라고 한다.

①   이들은 설계 단계에서부터 어려움에 부닥쳤다. 1991년 8월 설계에 들어갔으나 컴퓨터 설계(CAD/CAM) 지원이 늦어져 밤낮으로 직접 계산해가며 설계하느라 5개월을 소비해 버렸던 것이다. 1992년 초 4분의 1모형을 만들어 비행속도와 풍속에 따라 생기는 저항을 살피는 풍동(風洞) 실험 단계에서도 난관에 부딪혔다. 어느 연구소에서도 풍동실험실을 빌려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경기도 이천에 있는 박씨의 옛 문구류 공장 창고에서 갖가지 빛깔의 연막탄을 송풍기로 부쳐 실험해야 했다.

②   우여곡절 끝에 92년 5월 원격조정으로 모형비행기를 실험비행하는 데 성공하고 곧바로 시제기 제작에 들어갔다. 7개우러 만인 1992년 11월말, 엔진을 제외한 모든 부품을 국산으로 쓴 까치1호기가 완성되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③   그러나 어려움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제작 현장인 이천 공장 내 간이 활주로가 공역 제한에 걸려, 매주 한두차례 비행기를 트럭에 실어 몽산포까지 날라야 했다. 12월 한달 동안 60여 시간의 시험비행을 거친 끝에 항공우주연구소의 인정을 받았다. 정부의 3개년 계획을 절반 이상 앞당긴 것이다.

④   까치1호 기종을 시판한다면 부품세트 단위로는 1천5백만원, 완성하는 데에는 조립기술지원 정도에 따라 2천만~2천5백만원쯤이 든다.

⑤   박씨는 지금 ‘까치호’를 계속 만드느냐, 동호인 양성에 쓰는 데 그치느냐 하는 고민에 빠져있다. 전국에 기껏 10곳, 그나마 산골이나 해변에서만 민간 비행이 가능한 현실에서 더 만들어 봤자 몇몇 동호인말고는 판로도 없다. 미국 유럽 일본 대만 등지에 초경량 비행기의 수요가 높지만 국내 보급이 선행되지 않는 한 해외로 진출하기가 쉽지 않다. 또 국산 부품의 규격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수출값을 낮출 수가 없다. 박씨는 “고부가 수출산업으로 각광받고 있는 초경량 비행기를 산업화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시·도에 한두곳씩 공역이 허용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⑥   1991년 10월 《시사저널》에 ‘손수비행 시대 개막’ 기사가 보도된 뒤 수백통의 문의전화가 쇄도한 것만 봐도 민간항공의 저변이 넓음을 알 수 있다고 박씨는 말한다. 초경량 비행기는 레저·스포츠에만 이용되는 것이 아니다. 훈련비행, 농약살포, 산림·선로·철도 감시 등에도 두루 쓰인다. 산업화되면 항공 부품산업 육성, 항공인력 양성, 국방력 강화, 레저산업 확대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

⑦   항공 대중교통 시대는 열렸으나 한국은 냉전의 응달에서 마냥 웅크리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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