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정국 떠도는 빨간색 유령
  • 김당 기자 ()
  • 승인 1997.09.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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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콤플렉스 편승한 ‘용공 음해’ 극성 … “물증 어설프다” 밀어붙이기 일관

선거 때만 디면 어김없이 되살아나는 색깔 망령이 다시 나타나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를 괴롭히고 있다. 21세기를 코앞에 둔 대명천지에 왜 이런 일이 되풀이되는 것일까. 해답은 자명하다. 이를 이용하려는 정치 세력과 확대 재생산하려는 극우 · 공안세력, 그리고 그들의 나팔수 노릇을 하는 일부 언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 이런 의혹의 시시비비를 가려야 할 이른바 유력 매체들마저도 중계 방송식 보도로 의혹을 부풀리거나 방치해 왔다. 지난 20여 년 동안 온갖 정보를 독점해 온 여권이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 채 김 총재의 색깔 의혹을 되풀이할 때마다 이를 비중 있게 보도해 온 언론이, 정작 거증 책임도 없는 피해자 측이 색깔 의혹을 불식할 증거물을 어렵사리 제시할 때는 이를 외면하는 뿌리 깊은 ‘안보 상업주의’ 탓도 크다.

그런 점에서 최근 김 총재를 공산주의자로 묘사한 <김대중 X파일>(손충무 지음)이라는 책이 서울 여의도 일대에 배포된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이미 신한국당 후보 경선 전에 이런 첩보를 담은 증권가 정보지가 나돌았기 때문이다. 저자인 손씨가 이 책 5만 부를 인쇄해 놓고 신한국당 측과 ‘협상’을 벌였고, 이 대표 지지도가 높은 지금보다는 대선을 앞둔 결정적인 시기에 배포하자는 신한국당 측 만류에 따라 이 책이 창고에 쌓여 있다는 것이 당시 증권가 소문이었다.

색깔 시비, 젊은 층에는 역효과
국민회의는 이 책이 배포되자 즉시 법원에 판매 정지 가처분 신청을 내고 저자를 출판물에 의한 명예 훼손 혐의로 검찰에 고소 · 고발했다. 정동영 대변인은 “문제를 제기할수록 오히려 이 책이 광고된다는 것을 알지만 해묵은 용공 음해 수법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는 뜻에서 법적으로 대응키로 했다”라고 밝혔다. 정대변인은 또 “신한국당 당직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저자의 자필 사인과 도장이 찍힌 책을 당사 부근 식당에 무료 배포한 것은 여당이 개입했다는 반증이다”라며 여당과의 연계 의혹을 제기했다. 이와 관련해 손씨는 신한국당 연계설을 부인했다. 이 책과 관련해 신한국당 누구와도 만난 사실이 없다는 것이다.

‘김일성의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라는 부제 아래 김 주석과 김대중 총재의 사진을 표지에 실은 이 책이 노리는 바는 자명하다. ‘남한에서 믿는 사람은 김대중뿐이라는 김일성의 육성 고백으로 볼 때 김일성의 꿈은 김대중을 남한 대통령으로 만드는 것이다’라는 주장이다. 92년 대선 막바지 유세에서 민자당 김영삼 후보가 ‘북한에서 김대중 후보를 지지하라는 지령을 내렸다’고 선전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북한 지령설을 제공하고 언론에 유포한 이는 당시 정형근 안기부 수사국장이었다). 그러나 막상 그 근거는 부실하기 짝이 없다. 한 일본 정치인이 74년 당시 김 주석과 대담했을 때 김 주석이 “우리는 그(김대중)와 아무런 관계도 없지만 그의 주장은 올바르다고 판단한다”라고 말한 대목이 ‘김일성의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의 논거이다. 적이 칭찬하는 사람은 적이고, 적이 욕하는 사람은 동지라는 단순 논리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김대중 총재가 색깔 시비를 벗어나는 길은 북한 정권에 욕을 자청하거나 적어도 극우주의자임을 전파하는 길밖에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현실은 이중적이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는데, 왜 이런 일이 자꾸 생기는지 모르겠다.” 김 총재는 8월 28일 대선 후보 텔레비전 토론회에서 패널리스트들이 초입부터 국민회의 고문을 지낸 오익제 전 천도교 교령 월북 사건을 물고 늘어지자 자신의 심경을 이렇게 토로했다.

그에게 호사(好事)란 오씨의 월북으로 빚어진 ‘색깔 시비’에도 불구하고 각종 여론 조사에서 줄곧 지지율 1위를 고수하고 있는 ‘의미 있는 현상’이다. 여론 조사 결과에 따르면, DJ 색깔론을 제기해 국면을 전환하고 이른바 병역(兵役) 수렁에서 탈출하려던 여당 의도와 달리, 절음 층에서는 이 같은 색깔 시비가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일으켰다. 북풍(北風)으로 표현되는 북한 변수와 색깔 공방이 항상 여당에 이롭다는 경험칙이 깨질 조짐을 보이자 정가에서는 ‘병풍(兵風)이 북풍(北風)보다 더 세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DJ, 색깔 시비 해소할 ‘물증’확보
그러나 김 총재에게 이 보다 더 좋은 일은 20여 년에 걸쳐 자신에게 덧씌워진 ‘붉은 색’을 걷어내고 용공 음해를 일축할 증언과 자료를 초근 확보한 것이었다. 12월 대선 때가지 인기도와 여론 변화에 따라 지지도는 둘쭉날쭉할 수도 있지만 이 증거물만은 불변할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국민회의가 50여 쪽짜리 ‘김대중 총재 6 · 25 전후 군 경력 및 사상 관련 사실 규명자료’를 전격 공개한 8월 22일 정동영 대변인은 “오늘부로 김 총재에 대한 색깔 논쟁은 끝났다”라고 단언했다.

20여 년 동안 제기된 DJ 색깔 시비의 핵심은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절 그의 행적을 둘러싼 것이다. 하나는 6 · 25 전까지 좌익 활동을 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군 경력이 불투명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천용택 의원이 이를 뒤엎을 물증과 증언을 찾아냈다.

우선 천 의원은 김 총재가 복무했다는 해군 목표경비부 산하 해상방위대가 실재했음을 밝혀냈다. 천 의원 보좌진은 그동안 국회도서관과 전쟁기념관의 전사(戰史) 관련 자료를 다 뒤져 관련 기록을 찾아냈다. 국방부는 당초 관련 기록을 찾을 수 없다고 회신했으나, 천 의원은 기록의 소재를 파악해 놓고 북방부에 ‘옆구리 찔러 절 받기’ 식으로 공식 답변을 받아냈다. 관련 문헌에 따르면, 해상방위대는 목포 지역에서 전시 민방위 조직(밀리셔)으로 편성되어 준 군사부대 임무(해상 방위)를 수행했음이 확인되었다. 이 문서에는 51년 총참모장(해군 참모총장) 지시에 의해 해상방위대를 해체하면서 ‘해상 방위대가 쓰고 있던 건물 일체를 군이 인수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천 의원은 또 당시 목포 경비부 사령관을 지낸 송인명 예비역 해병대 준장(현재 뉴욕 거주)을 찾아내 송씨로부터 휘하에 해상방위대가 실존했으며, 김 총재가 당시 해상방위대장 오재균씨(작고)와 같이 복무했음을 증언하는 녹취와 증명서를 확보했다(당시 18세 나이로 대원으로 복무한 오씨의 조카 오종현씨도 김 총재의 복무 경력을 증언하고 있음). 녹취 기록에 따르면, 당시 목포상선 김대중 사장은 50년 9 · 28 수복 후에 해군 목포경비부 산하 해상방위대 창설에 참여했고, 본인이 소유한 선박과 함께 전시 동원되어 이 부대의 부(副)대장을 복무하면서 치안유지와 공비 소탕작전 지원 및 보급품 수송에 직접 참여한 바 있다.

또 천 의원이 추가로 찾아내 <시사저널>에 독점 제공한 군사 문헌(<海軍 木浦警備付沿革史), 52년 12월 31일 해군 목포경비부 정훈과 발행)의 ‘범죄취급통계표’에 따르면, ‘11월 29일 해상방위대 본부 작전과장 김인수 형법 193조 목포경찰서 이첩’이라고 해상방위대의 실체를 적시했다. 이는 당시 계엄 상황에서 군이 현역 군인들과 준군사부대에 복무한 대원들에게 똑같이 사법권을 행사했으며, 현역은 진해통제부로, 동원된 민간인은 경찰서로 이첩했음을 보여준다.

한국전쟁 이전의 좌익 활동 의혹을 해소해주는 증언은 해병대 중장 출신인 김성은 전 국방부장관 증언이다. 김씨는 46년 목포경비부 전신인 해안경비대 목포기지 사령부 참모장이던 당시 김장훈 사령관(예비역 해군 소장)과 함께 기지 창설 임무를 띠고 목포에 취임했을 때 지역 유지였던 차보륜씨(김 총재 장인)로부터 숙소를 제공받았으며, 당시 차씨가 사이를 소개하며 ‘목포상고를 1등으로 졸업한 유능한 청년인데 지금 청년단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하는 사위 자랑을 들은 바 있다고 증언했다. 김씨는 당시 차씨를 비롯한 지역 유지들이 물심양면으로 군을 지원했으며, 김대중씨도 청년단(우익)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이 같은 증언은 “김 총재가 6 · 25당시 공산 당원이었고, 당시 목포에서 체포된 4백50여 명과 함께 남해 해상의 미 해군 함정에서 50년 6월 28일 총살형에 처해지기 직전 미 해군 정보부에 있던 고향 친구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라는 신한국당 이사철 대변인의 주장(이 주장은 손충무씨가 발행인이 <인사이드 더 월드>가 실은 관련 기사와 일치한다)을 정면으로 뒤엎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대변인은 “개인에 불과한 송인명씨가 임의 작성했다는 메모를 내놓고 6 · 25 당시 김 총재의 해상방위대 근무 사실을 주장하면서 좌익 활동 경력을 부인하고 나선 것은 누가 보아도 어설프기 짝이 없다”라고 주장했다. 이대변인은 또 “이 메모는 50년 당시의 메모가 아니라 최근 국민회의 요구에 따라 작성된 것이어서 그 신뢰성을 보장할 수 없다”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공안 검사 출신인 이대변인이 해병대 장군과 전 국방부장관 증언마저도 신뢰성이 없다고 일축하고 나선 것은 궁색한 변명처럼 들린다. 그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50년 당시의 메모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대로라면 김 총재 또래의 국민은 나중에 자신의 군 경력과 사상이 문제될 것을 예상하고 40여 년 전부터 그것도 전시에 메모를 받아놓고 있어야 빨갱이나 병역 기피자로 내몰리지 않을 것이다. 이대변인은 또 막무가내로 김 총재 측에 대해 ‘군번을 대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각국마다 현역병과 별개로 민방위대 · 학도지원병 · 민병대 같은 밀리셔 조직을 두고 있지만 군번을 부여하지는 않는다.

사실 선거 때마다 병역 기피 시비에 시달려온 김대통령도 정식 군번은 없지만 당시 ‘정훈 선무대’ 활동으로 병역을 대신했으며, 대통령이 되고서야 자신의 정훈 활동을 입증하는 빛바랜 사진 한 장을 찾았다. 더 중요한 사실은 대한민국 군사원호보상법(61년 11월 제정)에 ‘59년 12월 31일 이전에 전시근로동원법(대통령 긴급명령)에 의해 동원된 자, 청년단원, 향토방위대원, 소방관, 의용소방관, 기타 애국단체원으로 군경과 행동을 같이하여 전투 또는 전투에 준한 행위로 인하여 상이(傷痍)를 받은 자 또는 사망한 자의 유족은 본 법에 규정된 상이군경 또는 전몰군경의 유족으로 본다’라고 규정한 사실이다. 심지어 ‘기타 애국단체원’까지 포함해 원호 보상을 받기로 규정된 이들이 당시 병역 의무에 복무한 것으로 간주되어 소집 동원에서 제외된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한국에서 돈 · 색깔에 자유로운 정치인은 없다”
이대변인은 ‘DJ 함상 총살’ 발언을 거두지 않고 있다가 국민회의와 미국 정부로부터 직격탄을 맞았다. 천 의원은 국방부가 편저한 <한국전쟁사 부도>의 미군 극동 배치도와 동 · 서 해안의 해상 현황 및 경과 요도에서 미국 해군이 서남해에서 활동하지 않았음을 밝혀냈다. 또 주한 미국대사관은 ‘이사철 신한국당 대변인이 한국전쟁 포로 처형에 미국 해군함이 사용되었다고 했으나, 한국전 중 어느 시점에서도 전쟁 포로를 처형할 목적으로 미군 군함이 사용된 적이 없다’라는 내용의 보도 자료를 배포했다.

이와 관련해 주목할 사실은, 그동안 유사한 언론 보도에는 언급조차 않던 미국 정부가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부인하고 나선 것이다. 물론 공당 대변인의 입을 통해 보도된 것이라는 차이는 있지만, 해묵은 시비에 대해 미국 정부가 이례적으로 부인하고 나선 것은 문민정부에서도 김 총재와 관련한 색깔 망령이 재현되는 것을 방치하지 않겠다는 의사 표시이거나, 지지율 1위를 고수하고 있는 김 총재에 대한 ‘보험 가입’ 메시지를 건넨 것이 아니냐는 관측도 불러일으키고 있다.

신한국당이 오익제씨 월북을 계기로 김 총재의 사상 행적에 대한 재검증을 요구하며 제기한 이른바 8대 의혹의 태반은 이미 월간 <윈>(96년 12월호)에 실린, 5공 신군부의 김대중 죽이기 언론 공작 전모를 밝힌 ‘현대사 발굴 대 특종’기사에서 이미 검증된 바 있다. <윈>이 발굴해 낸 이 문건 자료(8건)는 전두환 등 이른바 신군부 세력이 권력 장악을 꿈꾸던 80년 2월 ~ 81년 2월에 문공부와 보안사가 집권의 최대 장애물인 김대중의 행적과 관련해 어떻게 언론 보도를 통제하고 ‘김대중 색칠하기’에 혈안이 되었으며, 또 당시 언론은 이런 신군부의 세종에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입증하고 있다.

김 초재가 다마(多魔)라고 표현한 오씨의 월북 사건을 계기로 잇달아 불거진 이석현 의원의 ‘남조선 명함 파문’과 정동영 대변인의 ‘기획 입북’ 구설수는 색깔 공세의 위력이 아직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촌극으로 끝날 수도 있는 명함파문이 끝내 이 의원의 자진 탈당으로 이어지고, 정대변인이 구설에 휘말린 것도 따지고 보면 색깔 공세에 대한 야당의 뿌리 깊은 피해 의식과 자기 방어 기제가 작동한 탓이 크기 때문이다.  정대변인은 ‘색깔 논쟁을 증폭시키려는 여권에 구실을 주지 않기 위한 조처’라고 그 배경을 설명했지만, 이 사건은 ‘한국판 매카시’라는 별명을 가진 정형근 의원이 공언한 대로 한국 사회에서 아직도 돈(정치 자금)과 색깔(북한 공작)로부터 자유로운 정치인은 없다는 가설을 역설로 입증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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