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 휩쓴 ‘외환 태풍’ 한국 상륙?
  • 박재권 기자 ()
  • 승인 1997.09.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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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화 가치 불안하지만 경제 여건 달라 … 부실 채권 등 ‘내부 문제’ 해결이 관건

‘동남아 국가들에 이어 한국이 국제적 환투기의 희생양이 될 것이다.’지난 8월 26일 달러화에 대한 원화 환율이 9백9원50전까지 치솟자 AFP통신은 한국이 금융 위기 상황임을 세계에 타전했다. 정부는 이를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했지만, 금융기관 관계자들은 안심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지난 8월 28일 증권가를 강타했던 한화그룹 부도설이 사실 무근으로 밝혀지자 가슴을 쓸어내렸다.

사실 원화 가치 하락, 즉 환율 인상이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다. 환율이 오르면 국산품의 수출 가격이 낮아져 장기적으로 수출이 촉진되고 경상 수지를 개선할 수도 있다. 당초 통상산업부와 한국무역협회 관계자들이 환율 인상을 반긴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환율이 심리적 저항선인 달러 당 9백원 선을 넘어선 뒤 금방 9백10원 가까이 치솟자 통화 당국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당국은 17억 달러에 이르는 달러화를 매도하는 한편, 원화 가치 폭락을 더 방치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그 덕택에 폭락 조짐을 보이던 원화 가치는 일단 안정세로 돌아섰지만, 원화 가치 하락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마그마처럼 잠시 멈춘 것에 불과하다.

원화 가치가 하락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올해 초에도 한보 · 삼미 등 대기업들이 줄줄이 쓰러지고 금융대란설이 나돌자 원화 가치가 계속 떨어졌다. 그 뒤 3개월 정도 8백90원대에서 안정세를 보이던 원화 가치는 지난 7월 15일 기아그룹이 부도유예협약을 적용받게 되자 다시 떨어지기 시작했다.

사태가 특히 악화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8월 25일 정부가 내놓은 금융안정종합대책 때문이다. 사태의 심각성에 비추어 정부 대책이 너무 미비하다고 판단한 기업과 은행들이 대거 달러화 매입에 나섰던 것이다. 환차손을 줄이는 일이 당장 발등의 불이었던 대기업과 은행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환차손을 줄이자고 무작정 달러를 매입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통화 당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데다가, 정부 개입으로 원화 가치가 상승하면 자칫 손해를 볼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었다. 또 너도나도 달러화 매입에 나서면 국가 경제 전체가 휘청거릴 위험도 있었다. 삼성물산의 한 관계자도 “지금은 원화 가치를 안정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라고 강조했다.

환율 추이 놓고 정부 · 금융계 예측 엇갈려
그렇다면 원화 가치가 앞을 더 하락할 가능성은 없을까. 정부 판단은 더 하락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는 우선 지난 2/4분기 국내 총생산(GDP)이 전년 같은 기간보다 6.3% 늘었다는 점이 꼽힌다. 지난해 2백억 달러가 넘던 경상수지 적자도 올해는 1백50억 달러에 머무를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또 정부는 외국인 주식 투자 한도를 확대하고, 채권 시장을 더 개방하며, 산업은행 등을 통해 해외 차입을 늘려 전체 종합 수지를 50억~백억 달러 흑자로 만든다는 계획이다. 7월말 3백37억 달러인 외환 보유고도 연말에는 국제통화기금(IMF) 권고치인 3백60억~3백70억 달러 수준으로 끌어올릴 계획이다.

그렇지만 은행 관계자들은 원화 가치가 다시 하락할 가능성이 여전히 높다고 본다. 거시 경제 지표는 호전되고 있지만, 실물 경제 부문에서는 개선된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기아 사태는 아직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고, 금융기관들의 대외 신용도도 쉽게 회복될 것 같지 않다. 어음 부도율은 0.24%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고, 당초 흑자를 예상했던 8월중 무역 수지도 10억 달러 이상 적자가 확실하다. 제일은행을 비롯한 시중 은행들의 대외 신용도는 다시 추락할 가능성이 높다. 만일 이렇게 될 경우 해외 자금 차입이 어려워지고, 국내 자금 시장의 동맥경화 증세는 한층 더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대형 악재가 하나 더 터지는 날에는 큰 혼란이 올 수도 있다.

따라서 원화 가치 하락은 언제든지 재연될 수 있다는 것이 금융권 관계자들의 판단이다. 지금 당장은 통화 당국이 개입해 달러화 매입을 자제하고 있지만, 정부가 더 이상 원화 가치를 방어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되면 기업과 은행들이 달러화 매입에 나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외환은행은 지난 8월 26일 발표한 보고서에서 3/4분기 말에는 달러 당 환율이 9백10원, 4/4분기에는 9백15원으로 상승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국내에 진출해 있는 외국계 은행들은 이보다 높은 9백20원 안팎을 예상하고 있다.

그렇다면 동남아 국가들이 겪는 외환 위기가 한국에도 닥칠 것인가. 금융권 관계자들은 그럴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다고 본다. 한국의 경제 여건이 태국이나 필리핀보다 훨씬 건시하고, 원/달러 환율이 수시로 시장 수급 상황을 반영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은 동남아 국가들에 비해 금융시장이 훨씬 덜 개방되어 있어, 국제적인 환투기꾼들이 휘젓고 다닐 가능성이 적다는 것이다.

결국 문제는 내부에 있고, 최악의 사태를 막는 방법도 얼마나 빨리 내부 문제를 정리하느냐에 달려 있다. 금융기관이 떠안고 있는 부실 채권을 조기에 정리하고, 일관성 있는 정책으로 국민들에게 신뢰감을 심어주어야 한다. 체이스맨하탄 은행 손창남 부지점장은 “지금은 정부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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