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활자 세대의 과거 돌아보기
  • 이문재 기자 ()
  • 승인 1997.09.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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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일남씨 연작 소설 <만년필과 파피루스> / 작가 겸 기자가 쓴 체험적 한국 문화사

생애의 절반 이상을 신문 기자로 활약해 온 소설가 최일남씨(65)가 최근 연작 장편 소설 <만년필과 파피루스>(강 출판사)를 펴냈다. 작가이자 기자인 최씨는 이번 연작 소설에서 기자 쪽에 무게 중심을 두고 90년대부터 50년대까지 거슬러 오른다. 그의 되돌아보기는 잡지사 편집장, 신문사 문화부장, 논설위원 등을 거친 언론인 윤상호의 눈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최일남씨의 분신일 윤상호는 마지막 활자 세대로서 소설을 이끌어 나간다.

만년필과 파피루스는 활자 세대의 은유이다. 만년필은 컴퓨터의 워드 프로세서에, 파피루스는 모니터에 각각 대응한다. 그러나 컴퓨터와 결합하는 뉴미디어 시대는 만년필과 파피루스를 ‘과거완료형’이라며 폐기하려 든다.

모두 여덟 편으로 이루어진 연작 소설의 기점인 <한 떨기 노스탤지어>에서 회전문이나 횡단보도 신호에 적응하지 못하는 윤상호는, 오로지 빠른 것이 최고 · 초선이라는 속도주의에 밀려나는 구세대의 한 전형이다.

문화적 기억상실증 치료할 ‘신약’
이 연작 소설의 첫 인상은 그래서 세대론에 바탕을 둔 문화 읽기로 비친다. 이때 가벼움과 빠름, 그리고 재미만을 추구하는 신세대 문화 앞에서 활자 문화 세대의 표정은 뜨악해진다. 윤상호가 보기에 이 시대는 노인들을 ‘오십 리터들이 가정용 쓰레기봉투 다루듯 하면서 재활용 감조차 못되는 걸로’친다. 하지만 이 소설이 활자 문화 세대의 일방적인 꾸지람이나 어떤 보상 심리에 긷고 있는 것은 아니다.

80년대 이후 빼어난 논객이었으며, 신문사 문화부장으로 70년대 한국 문화의 현장을 그 중심에서 지켰고, 그 이전에 여성지 편집장 경력까지 갖추고 있는 윤상호의 기억력은 곧 활자 문화 시대에 대한 기억력의 총량이다. 그의 ‘하드 디스크’에는 신문 기사 스타일 변천사에서 필화 사건, 미국 대중문화 유입, 80년 광주 민주 항쟁, 그리고 언론인 대량해직 사건까지 저장되어 있다. 그래서 이 연작 소설은 한국 문화사를 압축 파일에 담은 듯하다.

최일남씨는 신문 기자 시절 겪었던 일들과 만났던 사람들을 오랫동안 취재 노트 속에다 묵히고 아껴 왔다. ‘이민하면 회임 기간이 웬만하다 싶어 꾸민 것이 이 소설’이라는 그는, 한 시기의 문화가 어떻게 생성하고 소멸했는가를 증언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애잔하게 스러져간 것들의 잔해를 붙들고 한 잔의 독주를 뿌린 흔적이 농후하다’라고 책 뒤에 밝혔다. 작가는 이 소설 픽션과 논픽션이 반반씩이라고 덧붙였다.

소설은 90년대에서 출발한다. <한 떨기 노스탤지어>와 <납>은 활자 문화 세대의 처지에서 쓴 신세대 문화 비평이다. 그러나 소설에서 윤중호는 허무주의로 기울지 않는다. 그는 신세대와 섣불리 타협하기를 경계하면서 ‘파산적 같은 화이부동’ 다시 말해 융합을 희망한다.

<우리나라 입>과 <편지는 편지>는 일종의 후일담 소설이다. 앞의 소설은, 윤중호가 인터뷰했던 내로라하는 저명인사들의 구린데를 까발긴다. 그러나 단순한 야유가 아니다. 서양과 한국의 문화 차이를 드러내는 비교문화론이자, 인터뷰론이기도 하다. 뒤의 소설은 논설위원 시절 겪은 삽화들을 통해 80년대의 배경음을 들려준다. <오 아메리카>에서 이 연작 소설은 미국 대중문화가 어떻게 이 땅에 스며들었는지를 복원한다.

<테킬라>와 <젖어드는 땅>에서 윤중호는 80년대와 70년대에 겪은 내출혈을 기록한다. <테킬라>가 언론에 칼을 들이댄 80년대 신군부를 규슈 · LA ·  멕시코라는 ‘아득한 거리’에서 돌아보았다면, <젖어드는 땅>에서는 70년대의 상징인 긴급 조치가 발령되기 전 날의 살풍경을 생생하게 복원한다. 이 장편은 후반부에 이르러 세태 소설 면모를 보인다. 무교동에 드나들던 언론인과 시인 묵객 단골집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소설에서 윤중호는 새삼 확신한다. ‘한 시대의 미완성은 정작 완성품보다 훨씬 값진 교훈’이라고 믿는 것이다. 소설에서 밝혔듯이 시간을 단위로 한 새 것과 헌 것이 구분은 전혀 믿음직스럽지 않다. 새 것만을 좇는 문화적 강박증은 지독한 문화적 기억상실증에 걸려 있다. 활자 문화 세대가 온몸으로 지켜온 모국어로 저 고단했던 한 세대를 되살려낸 <만년필과 파피루스>는 치명적 질병인 문화적 기억상실증을 치유하기 위해 내놓은 ‘신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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