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스럽지 앟은 국회의원 여러분”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1999.12.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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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대 국회 ‘추태 백서’ / 욕설ㆍ파행 얼룩…55명 윤리위에 제소당해

어느날 국회 본회의장 풍경. 한 야당 의원이 총리에게 상스런 욕설ㅇㄹ 퍼부었다. 표정 변화 없이 듣고만 있던 총리가 야당 의원의 말이 끝나자마자 불쑥 일어섰다. 회의장에 일순 긴장감이 돌았다. 총리가 느릿느릿 말을 뱉었다. “존경하는 ○○의원님. 제가 의원님의 말슴을 가치 있게 생각했다면 아마 저는 화를 냈을지도 모릅니다.” 순간 싸늘하게 굳어 있던 회의장이 웃음판으로 변했다.

혹시 주인공이 김종필 총리와 한나라당 주 공격수중 한 사람? 살벌한 15대 국회에서 이런 일도 있었나? 물론 아니다. 제임스 흄스가 쓴(윈스턴 처칠의 재치와 지혜)에 나오는 먼 외국의 얘기이다.

그럼 우리나라 국회는? 15대 국회 역시 재치와 지혜보다 욕설과 극한 대립이 지배했다. 15대 국회 임기 4년 동안 여야 의원 55명이 ‘의원의 품위 유지 위반’, ‘인격 모독’, ‘명예 훼손’, ‘의사진행방해’ 등의 이유로 국회 윤리특위에 제소되었다. 이는 전체 의원 2백99명 중 18.4%에 이른다. 물론 여기에는 최근 예결위 회의장 복도에서 멱살잡이 직전까지 갔던 국민회의 박광태ㆍ임복진, 한나라당 이강두 의원의 사례처럼 윤리위 제소 직전 서로 ‘화해’한 사건들은 빠져 있다. 따라서 이런 ‘숨어 있는 의원’들까지 더한다면 의원 5명 중 최소한 1명은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었던 셈이다.

반면 한나라당 김영선 의원에게 ‘싸가지 없는 년’이라고 욕해 15대 국회 말미를 장식한 국민회의 국창근 의원은 화해하지 못해 제소되고 말았다.

이신범 의원, 윤리위에 첫 번째로 제소돼
15대 국회는 개원 첫날인 96년 6월5일부터 파행이었다. 야당은 여당의 야당 의원 빼가기에 항의하며 국회를 공정시켰고, 여당은 이에 맞서 단독 국회를 소집했다. 첫날, 최연장자인 자민련 김허남 의원이 임시 의장을 맡았으나 즉시 산회를 선포하고 나가바렸다. 우루루퇴장하는 야당 의원들을 향해 당시 여당이던 신한국당 임인배의원이 던진 한마디는 “× 같은 놈들”. 15대 국회 저질 발언의 스타트를 끊은 말이다.

15대 국회는 6월12일에야 정상으로 여렸다. 이날 의사 진행 발언을 한 신한국당 이원복 의원이 한 첫마디는 “별로 존경스럽지 않은 일부 선배의원 여러분.” 이의원이 미리 예고라도 한 것처럼 이날 이후 ‘별로 존경스럽지 않은 의원 여러분’들의 저질 발언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96년 6월15일 신한국당 초선 의원들은 ‘바른 정치를 위한 모임’(간사 안상수 의원)을 꾸리고 “저질 추방 운동을 적극 전개하자”라고 결의했다. 그러나 결의가 채 식기도 전인 7월15일 이 모임회원인 신한국당 이신범 의원이 ‘사고’를 쳤다. 이의원은 대정부 질의에서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를 ‘늑대가 온다고 소리치다 비극을 당한 양치기 소년’이라고, 자민련 김종필 총제를 ‘인권 유린, 현정 파괴를 한 주범’이라고 비난하면서 15대 국회 들어 첫 번째로 윤리위에 제소되는 기록을 남겼다. 이밖에도 개원 국회는 대정부 질문이 있던 닷새 동안 김무성(신한국당)ㆍ정상천(자민련)의원, 이원범(자민련)ㆍ이신범(한나라당)ㆍ김범명(자민련)의원 사이에 막말이 오갔다.

무어니 무어니 해도 욕설과 몸싸움이 극에 달하는 것은 날치기 때, 15대 국회에서는 날치기가 세 번 있었다. 한 번은 신한국당이 주인공이었고, 두 번은 국민회의ㆍ자민련 공동 여당이 주인공이었다.

첫 번재는 96년 말 신한국당의 안기부법ㆍ노동법 날치기. 야당인 국민회의 의원들은 날치기를 저지하고자 김수한 의장과 오세웅 부의장을 국회의장실과 여의도 63빌딩 음식점에 억류했고, 신한국당 의원들은 구출 작전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양당 의원들은 욕설과 고성을 주고 받으며 상대방을 비방했다. 신한국당 박주천 의원과 국민회의 국창근 의원은 국회의장실에서 서로 멱살을 잡고 난투극을 벌였다. 결국 안기부법ㆍ노동법 개정안은 열흘 동안 틈새를 노리고 계속 날치기를 시도하던 신한국당의 ‘승리’(?)로 통과되었다.

여야총무ㆍ중진들까지 막말과 몸싸움 추태
97년 말 사상 최초로 여야간 정권 교체가 있었다. 이와 함께 의원들도 공수를 교대했다. 15대 국회 들어 두 번째이자 국민의 정부의 첫 번째 날치기는 99년 1월7일 감행되었다. 도ㆍ감청 파문의 발단이 된 ‘529호 사건’으로 국회가 파행을 거듭하는 와중에 국민회의ㆍ자민련 공동 여당이 경제청문회와 국정조사 계획서 등을 날치기 통과시킨 것. 이 과정에서 여야 의원들 간에 욕설과 몸싸움이 난무했다.

다음은 99년 5월 3일의 정부조직법 날치기 사건. 야당인 한나라당 의원들이 의장 단상을 점거한 채 박준규 의장을 몸으로 막는 등 선방했으나 김봉호 부의장(국민회의)이 국민회의 의원석 한가운데 서서 정부조직법 개정안 등 6개 법률안을 통과시켰다. 이 과정에서 치열한 여야 격돌이 벌어졌고, 결국 방용석ㆍ김옥두ㆍ최재승ㆍ이윤수ㆍ설 훈ㆍ한영애ㆍ이훈평ㆍ김봉호(국민회의)의원과 백승홍ㆍ박원홍ㆍ신영국(한나라당)의원이 서로 상대방에 의해 ‘날치기 주범’과 ‘의사 진행 방해’ 혐의로 윤리특위에 제소되었다.

의원들이 가장 많이 윤리특위에 제소된 사건은 98년 3월 2일의 김종필 국무총리 인준 동의안 처리실패 사건. 여야 의원 25명이 ‘의사 진행 방해’ ‘투표 방해’ ‘인신 모독’을 이유로 제소당했다.

여야 의원들의 독설은 주로 상대방 보스를 향해 쏟아졌고, 따라서 윤리특위에 제소된 의원들의 혐의 내용도 ‘대통령에 대한 인격 모독’ ‘원내 제1당 총재에 대한 인격 모독’ ‘여야 총재에 대한 허위 사실 유포’가 많았다.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인식 모독 혐의로 윤리위에 회부된 의원은 한나라당 이신범ㆍ김홍신ㆍ이규택ㆍ이부영 의원, 이신범 의원은 이희호 여사를 비난한 혐의로 재차 제소되기도 했다. 반면 이회창 총재를 인신 모독했다고 제소된 의원은 국민회의 조세형ㆍ아동선ㆍ설 훈 의원. 국민회의 정균환ㆍ정동영 의원도 ‘원내 제1당과 그 의원 및 가족에 대한 모독성 발언’ 등의 이유로 제소되었다.

이 중 김홍신 의원은 ‘공업용 미싱’ 발언으로, 또 이규택 의원은 ‘70대 노인이 맨날 사정, 사정하다가 내년에 변고가 생길까 우려된다’라는 발언으로 저질 발언의 상징적 표적이 되면서 여론에 집중 성토되었다.

97년 2월에는 신한국당 이용삼 의원이 DJ 색깔론을 들고 나오면서 여야 의원들 간에 수위를 넘나드는 비방전이 펼쳐졌다. “후안무치한 정상배만 모였나. 간첩 돈 받은 놈은 너희 당에 있어”(국민회의 한영애 의원), “정상배가 뭐야. 버르장머리 없는 년”9신한국당 유용태 의원) 따위가 이때 나온 대표적인 저질 발언. 그러나 15대 국회 전반기에는 윤리특위가 거의 유명무실했던 탓으로 이 날 공방으로 제소된 의원은 한 사람도 엇다.

국회의 저질 발언과 몸싸움, 야유는 주로 초ㆍ재선의원들의 몫이었다. 그러나 중진들이라고 저질 대오에서 빠질 수는 없는 일. 여야 총무들도 두 차례나 막말을 주고 받는 추태를 벌였다. 1차전은 99년 2월27일 국민회의 한화갑 총무와 한나라당 이부영 총무 사이에 벌어졌다. 서상목 의원 체포 동의안 처리를 둘러싸고 설전을 벌이면서 두 사람은 ‘총재 대신 감옥 갈 사람’(한화갑 총무), ‘여당 된 뒤에 배에 기름이 끼었군’(이부영 총무) 등의 막말을 주고받았다.

징계위원회에 외부 인사 참여시켜야 효과
여야 총무들의 2차전은 99년 8월13일. 국민회의 박상천 총무와 한나라당 이부영 총무 상이에 벌어졌다. JP 해임안과 특검제법안 협상을 위해 만난 자리에서 두 사람은 “이 ××, 나이도 어린데 그러면 안돼”(박상천 총무), ‘지금 장관 하면서 부하 검사 데리고 총무회담 하는 거냐. 이 뻔뻔스러운 ×ד(이부영 총무)라는 욕설을 퍼부으며 멱살잡이 일보 직전까지 갔다.

이런 국회의원들의 추태에 대해 의원들 사이에서도 자성하는 목소리가 높다. “정치인이 모범을 보여야 하는데, 같은 정치인으로서 부끄럽다.” 국회 윤리특위 김충조 위원장의 고백이다.

김위원장은 국회의원 윤리 조항을 강화하고, 실질적인 징계 효과가 나타나도록 법을 고쳐서라도 의원들의 신중한 처신을 유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윤리특위의 징계가 흐지부지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3개월 안에 징계위원회를 꼭 열도록 법을 개정해야 하며, 징계위에 외부 인사를 참여시켜 의원들 스스로 동업자 봐주기식 징계를 못하도록 감시해야 한다.” 김위원장이 내놓은 대안이다.

영국 의회는 상대 의원을 부를 때 반드시 ‘명예로운’ ‘존경하는’ 등의 형용사를 얹도록 규정해 놓고 있다. 또한 ‘거짓말쟁이’ ‘바보’ ‘강아지’ ‘위선자’ ‘비겁자’ 등 몇몇 단어는 아예 쓸 수 없도록 해놓기도 했다. 그런 강제 규정이라도 만들어 놓아야 우리 국회의원들의 추태가 사라질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국회 본회의장 앞 로툰다홀에는 국회 발전에 공헌한 인물을 모시기 위한 4개의 흉상 좌대가 마련되어 있다. 하지만 임시정부 의정원 초대 의장을 지낸 이동녕 선생의 흉상만 보일 뿐 3개는 아직 비어 있다. 지금 같은 여야의 극한 대결이 계속되는 한 비어 있는 좌대 3개를 채울 ‘위인’은 당분간 나오기 힘들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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