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가 같은 노동자…새로운 계급 탄생
  • 박재권 기자 ()
  • 승인 1999.12.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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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사태 이후 억대 연봉 샐러리맨 속출…벤처 기업이 ‘기회의 땅’

“개인의 사회적 서열을 매기는 중요한 잣대였던 부가 시간이 흐르면서 개인의 가치를 재는 거의 유일한 잣대가 되었다.” -레스터C. 서로<지식의 지배>중에서

한국의 실리콘 벨리로 불리는 서울 테헤란로. 이곳에 밀집해 있는 벤처 기업 직원들은 올해 사사아 최고의 풍작을 거두었다. 주가가 폭등해 임직원 대다수가 수천만~수억 원 평가 차익을 누리게 된 것이다. 직원 전체에게 골고루 분배되는 우리 사주와, 업무 실적이 탁월한 사람에게 분배되는 스톡옵션(주식 매입 선택권)이 행운의 열쇠였다.

흥미로운 것은 직장에 대한 이들의 태도. 최근 코스닥 시장에서 황제주로 군림하고 있는 다음커뮤니케이션조은형씨는 “우리는 일한 만큼 봉급을 받겠다는 생각이 없다”라고 말한다. 지난 2일 코스닥 시장에 등록된 뒤 상한가 행진을 계속하고 있는 한아시스템 정윤직 홍보팀장도 “회사를 키우는 것이 우리가 크는 지름길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선뜻 이해하기 힘든 말이다. ‘일한 만큼 받겠다’거나 ‘받은 만큼 일하겠다’는 것이 일반적인 직장인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혹시 빈말이 아닐까. 그렇지만 노동자이면서 동시에 주주인 이들의 처지를 생각하면 금방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봉급 몇푼 더 받는 것보다, 기업 가치를 올려 보유 주식 가치를 올리는 것이 노동자에게 훨씬 더 득이 된다. 이것은 노사 관계를 대립적으로 설정하고, 노조를 결성해 집단적으로 임금 인상을 결정하던 노동자의 기존 관념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노동자이면서 동시에 주주인 이들을 ‘자본가형 노동자’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IMF 사태 이후 중산층 붕괴에 대한 우려가 팽배한 지금, 이들이 신흥 중산층으로 떠오르고 있다.

물론 이들이 벤처 기업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량 상장사에 근무하는 직원들도 우리사주로 톡톡히 재미를 보고 있다. 삼성생명 직원들은 내년에 상장 문제가 마무리되면 역시 억대 부자 반열에 오르게 된다.

그렇지만 최근 가장 힘차게 떠오르는 집단은 역시 벤처 기업 직원들이다. 이들의 평균 연령은 28세밖에 안된다. 그런데도 이들은 벌써 일반 직장인이 평생 저축해야 모을 수 있는 부를 축적했다. 올해 초 증시가 급등하면서 ‘억대 연봉자’신화를 창조한 펀드 매니저ㆍ애널리스트ㆍ증권사 영업 직원들의 뒤를 이어, 제2의 억대 부자 신화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물론 벤처 기업 직원이 모두 이들처럼 행운을 누리는 것은 아니다. 10개 가운데 1개 정도가 제대로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 벤처의 기본 원칙, 이것을 감안하면 코스닥에 등록해 한 달 가까이 상한가 행진을 계속하는 최근의 황제주들은 예외인 경우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들 벤처 업체 직원 대부분이 일반 직장인들로부터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벤처 업계로 몰려드는 인재들의 행렬이 이를 입증해 준다. 다음커뮤니케이션 안내 데스크에 근무하는 한은혜씨도 그런 경우에 속한다. 삼성전자 개발실에서 3년 정도 근무한 그는 최근 다음커뮤니케이션으로 자리를 옳겼다. 그의 최종 목표는 웹마스터가 되는 것.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삼성전자를 그만두고 이곳으로 직장을 옮겼다.

우리사주ㆍ스톡옵션이 ‘행운의 열쇠’
최근 코스닥에 등록한 한아시스템 정윤직 홍보팀장은 최근 인재가 몰리는 경향을 이렇게 설명한다. “지난 5월 인력을 충원할 때는 지원 기간 내내 원서를 접수한 사람이 천명 정도였다. 그런데 요즘은 하루에 천명씩 지원한다. 게다가 지원서를 내는 사람들의 학력과 경력도 아주 화려해졌다.” 그는 삼성전자ㆍ현대전자ㆍLG정보통신 등 대기업 출신자들도 다수 끼어 있다고 털어놓았다.

벤처 업계로 향하는 이직 대열에는 언론사 기자도 적잖이 끼어 있다 <세계일보.문화부 이 아무개 기자는 두 달 전 애니메이션 전문 벤처 기업 아이코(ICO) 전략본부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조선일보> 석 아무개 기자는 미국의 벤처 기업 서울지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소프트웨어 공급 회사를 창업한 기자도 있다.

대기업 직원ㆍ기자ㆍ공무원 들이 이처럼 벤처기업 쪽으로 향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한마디로 말하면, 대규모 조직의 ‘머슴’노릇을 더 이상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직장인들이 이렇게 판단한 데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첫째는 직장인의 추락한 위상이다.  IMF 사태가 닥친 후 기업들이 지상 과제는 고비용ㆍ저효율 구조를 뜯어고치는 일이었다. 이 과정에서 감원ㆍ감봉ㆍ복지비 삭감 조처가 뒤따랐다. 영문도 모르고 하루아침에 길거리로 나앉은 직장인이 수두룩했다. 대기업ㆍ중소기업, 화이트칼라ㆍ블루칼라를 가리는 것이 의미가 없었다. 이들을 보면서 대다수 직장인들이 직장에 대한 가치관을 바꾸었다. 평소 중산층이라고 자처했던 것이 얼마나 공허한지 뼈저리게 깨달은 이들은 가만히 있다가는 하류층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하게 되었다.

21세기 주력 산업의 변화도 한몫 했다. IMF 사태가 닥치기 이전까지 한국 경제를 이끈 것은 중화학공업이다. 그러나 이제는 금융ㆍ정보통신이 중심 역할을 하리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이다.

따라서 직장인들이 정보통신ㆍ인터넷 업종으로 이동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리고 이 업종에 벤처 기업들이 포진해 있기 때문에, 겉으로 보아 벤처 기업들로 몰리는 것처럼 보이게 마련이다. 다우기술의 한관계자는 “대기업에 근무하는 친구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것이 유망 업종인 인터넷 분야에서 일한다는 점이다”라고 말한다. 자기는 인터넷을 끼고 살다시피 하는데, 대다수 직장인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처진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요인은 증시 호황일 것이다. 주가가 급등해 등장한 것이 ‘억대 연봉자’이다. 사실 직장인이 억대 연봉을 받는다는 것은 옛날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런데 증시가 사상 최고 호황을 누리면서, 펀드매니저ㆍ애널리스트 들이 스타로 떠올랐다. 뒤이어 코스닥 시장이 달아오르자, 이번에는 벤처 기업가가 스타로 떠올랐다. 창업한 지 몇 년 안에 수백억~수천억 재산가가 된 30~40대 기업인이 줄을 잇고, 이들 회사에 근무하는 직원도 덩달아 떼돈을 벌었다. 우리사주ㆍ스톡옵션이 일확천금의 꿈을 현실로 만들어준 것이다.

이처럼 금융ㆍ정보통신ㆍ인터넷 분야에서만 벼락부자가 쏟아지자, 직장인들의 직업관이 흔들리고 있다. 대규모 조직에서 머슴처럼 일한다고 느끼고 있는데, 한켠에서 귀 따갑게 우리는 성공신화를 들어야 하는 것이다. 직장인들이 이직을 꿈꾸는 것이 너무나 당연해 보인다.

최근 대기업들이 스톡옵션을 부여하겠다. 인센티브제를 도입하겠다며 갖가지 회유책을 내놓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냥 방치했다가는 유능한 직장인들이 모두 떠날지 모른다고 우려하게 된 것이다. 지난 12월14일 현대그룹 정몽헌 회장은 1천5백명 임직원에게 스톡옵션 8백만 주를 나누어 주겠다고 발표했다. 삼성그룹은 내년부터 모든 계열사를 상대로 스톡옵션제를 실시하겠다고 했고, 두산그룹은 미국식 완전 연봉제를 실시하겠다고 했다. 일한만큼 보상할 터이니 제발 떠나지 말고 회사에 충성을 바치라는 간청이다.

과연 이것이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까. 바닥으로 떨어진 직원들의 사기를 끌어올리고, 유능한 직원들의 이탈을 차단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전문가들의 대답은 부정적이다. 대기업은 조직이 비대해 직급 중심으로 운영될 수 밖에 없다. 자연히 일을 처리하는 속도가 늦다. 정보통신ㆍ인터넷 사업의 경쟁력이 속도에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대기업 체제는 치명적 결함을 갖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대기업이 충분한 보상을 하기도 힘들다. 보상액의 규모가 크더라도 조직이 커서 각 개인에게 돌아가는 액수는 적을 수밖에 없다. 직급을 중시하는 조직이기 때문에 조직원 간의 인화에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코스닥 등록을 통해 수억원씩 목돈을 안겨주는 벤처 기업들처럼 혜택을 부여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창업하기가 쉬워졌다는 점도 전문직 종사자들의 이동을 촉진하는 요인이다. 과거에는 창업하려면 막대한 자본이 필요했다. 은행에서 돈을 빌리려면 담보를 제공해야 했고, 인허가 절차도 까다로웠다.

물신주의 풍조 우려하는 시각도 있어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확실한 사업 아이템만 있으면 자본 없이도 창업할 수 있다. 기술과 아이디어가 확실하고, 이것이 사업에서 승산이 있다고 판단되면, 창투사를 비롯한 투자자들의 자금을 끌어들이기 쉽게 되었다. 최근 들어 창업하는 회사가 하루에 2백50개에 이르는 것도, 기업 환경이 변한 덕분에 가능한 것이다.

최근 일어나고 있는 이같은 변화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각도 만만치 않다. 가장 많이 나오는 지적이 돈을 절대적 가치인 양 떠받든다는 물신주의 풍조에 대한 것이다. 명예ㆍ존경ㆍ애국심 같은 사회적 가치가 홀대받는 것이 문제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대세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 레스터 서로 교수는 최근 발행된 <지식의 지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기ㆍ명성ㆍ권력 같은 가치들이 사라지면서 경제적 게임이 중요하게 부각되고 있다… 부자가 된다는 것은 모든 것을 소유하는 것을 뜻한다.

다음으로 지적되는 문제점은 특정 분야에만 인재들이 쏠리는 현상이다. 21세기의 주력 산업이 정보통신ㆍ인터넷일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성장성ㆍ수익성이 얼마나 되는지 아는 사람이 현재로서는 아무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모두가 금융ㆍ인터넷 등에만 매달리고 제조업을 등한히한다면, 한국 경제 전체에 기현상이 벌어질 것이다.

이미 이런 현상이 증시에서 나타나고 있다. 연간 수천억원씩 흑자를 내는 제조업체보다, 적자투성이인 인터넷 기업의 주가가 높게 형성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처럼 제조업을 홀대하는 현상이 계속되면, 한국 경제에 효자 노릇을 하는 제조업은 성장의 동력을 잃고 말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최근의 경향을 모두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오세경 교수(건국대ㆍ경영학)는 가장 큰 긍정적 변화로 노사 간의 동반자 관계를 꼽았다. 벤처 기업이 우리사주와 스톡옵션을 제공하는 것은, 자본이 부족한 초기 단계에 직원들에게 충분히 봉급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성공할지 실패할지 확신할 수도 없다. 이것을 감수하고 동업한 삶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바로 주식 배분인 것이다. 이 주식이 코스닥 시장에 등록되면서, 노동자와 자본가는 하나의 이해 관계로 묶이게 되는 것이다.

세기말에 이같은 신종 노동자가 출현할 수 있었던 것은 몇 가지 요인 때문에 가능했다. 벤처 기업이 재벌을 대체할 모델로 떠올랐고, 이들의 주력업종이 창업 비용이 적은 정보통신ㆍ인터넷 산업이며, 금융의 증권화로 인해 투자 자금을 끌어들이기가 쉬워졌다는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자본주의형 노동자가 21세기에는 더욱 늘어날 것이다. 그러나 전체로 보면 그 수는 여전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21세기에도 노사 관계가 완벽한 동반자 관계일 수 없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실질적인 자본가형 노동자, 즉 21세기에 중ㆍ상류층으로 약진할 수 있는 노동자는 우량기업의 우량 노동자로 한정될 수밖에 없다. 중산층 붕괴 논의가 무성해도, 이들은 굳건히 자신의 위치를 지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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