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단한 세기말’을 뜻있게 보내는 방법
  • 박성준 .노순동 기자 ()
  • 승인 1999.12.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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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사람들의 송년 이벤트 /산 행ㆍ가족 파티 등 다양

세기말이 겹친 1999년 12월은 더들썩하다. 하룻밤 묵는 데 수백만원을 호가하는 서울 시내 일류 호텔이 스위트룸이 동 났다는 소식은 이미 구문에 속한다. 해돋이 명소를 비롯해 웬만큼 알려졌다 싶은 관광지도 세기말을 좀더 색다르게 보내려는 사람들의 예약 바람으로 벌써부터 만원(滿員) 사레를 예고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나 기업체는 입만 떨어졌다 하면 새천년과 밀레니엄을 외치며 손님 끌기에 바쁘다. 적어도 겉으롬ㄴ 보면 가만히 집안에 앉아서 연말을 맞았다가는 당장 큰일이라도 날 듯하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보면 표정은 의외로 차분하다. 올해 연말은 무엇보다 Y2k 문제가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 세밑의 들뜬 분위기를 가라앉히는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다(77쪽 딸린 기사 참조). 정부는 한국 경제가 IMF 터널을 통과했다고 공식발표했지만, 대다수 국민은 여전히 경제 대란의 후유증에서 완전히 헤어나지 못한 표정이 역력하다. 유독 굴곡 많았던 근대 100년을 정리하는 마당이어서 이른바 ‘뜻 있는’ 시민운동 단체들 사이에서 제법 ‘특별한’ 정리 행사가 있을 법도 하지만, 한 해를 워낙 고단하게 달려온 탓인지 세기말의 감회에 대해서는 무덤덤한 반응을 보인다.

일곱 가족이 함께 떠나는 ‘산정호수 여행’
이같은 와중에서도 각자 형편에 맞게 세기말을 좀더 의미 있게 보내고, 또 다른 세기를 활기차게 맞으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움직임의 주체는 상대적으로 세상에 덜 알려져 있고, 이렇다 할 지위도 경제력도 없는 일반 시민들이다. 이들은 때로는 친목 모임으로 때로는 동호인 모임의 형태로, 또 때로는 그도 저도 아닌 개인으로 다가올 한 세기를 준비하고 있다. 부부 일곱 쌍으로 이루어진 평범한 가족 모임인 팔기회회원들도 이들 중 한 부류다.

팔기회는 약 1년반 전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사람들의 모임’(좋은아버지모임)이 진행하는 ‘부부 유치원’ 프로그램이 계기가 되어 출범했다. 좋은아버지모임은 벌써 오래 전부터 부부 사이의 예절ㆍ부모와 자녀 간의 대화법 등을 가르치는 4주 16시간까지 가족 프로그램을 운영해 오고 있었다. 광고대행업을 하는 신극철씨, 자동차 정비업을 하는 이재상씨, 홈스테이 사업을 하는 임영재씨 부부 등 30대 중반~40대 초반 부부 7상이 서로를 처음 알게 된 것이 바로 ‘부부 유치원’ 8기 때, 애초에는 서로 인사나 나누는 사이였으나 이들은 금세 친해졌고 곧 가족 전체 모임까지 만들어 최근까지 왕래해 오고 있다.

이들이 20세기 마지막 밤을 보내기 위해 2박3일 ‘산정호수 여행’을 준비한 것은 지난 12월 초모임 때다. 12월31일 밤을 산정호수에서 가족과 함께 보내고, 아울러 새해 첫날의 해돋이를 백운산 정상에서 맞기로 한 일정을, 자녀를 포함한 회원 만장 일치로 통과시킨 것이다.

30명 가까이가 참여하는 이 ‘대형 이벤트’의 또 다른 특징은 2박3일 여행에 일정한 주제가 있다는 것이다. 다름 아닌 ‘평소 못다 한 아버지 노릇 다하기’가 바로 그것이다.

팔기회 회원들은 이를 위해 ‘칭찬합시다’ ‘털어놓읍시다’ 등 친목 도모용 프로그램을 일정표 사이사이에 끼워넣었다. ‘칭찬합시다’ 프로그램은 부모가 회원 전체가 둘러앉은 데서 자기 자녀를 공개적으로 칭찬하는 것이다. 반면 ‘털어놓읍시다’ 프로그램은 평소 가족에 대한 불만이나 아쉬웠던 점 등 하고 싶은 얘기를 숨김 없이 돌아가며 말하는 것이다. 아울러 행사를 ‘주관’하는 팔기회 남편들은 행사가 진행되는 기간 내내 절대로 ‘남성 위주, 어른 위주’ 기획을 다른 회원(자녀)들에게 강요하지 못한다.

남들에게 특별히 내세울 만큼 거창한 이벤트는 아니지만, 팔기회 회원 부부들이 이 행사에 갖는 애착과 자부심은 남다르다. 가족들이 동고동락한 끝에 그동안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모처럼 한자리에 모여 이야기 꽃을 피울 수 있기 때문이다. IMF직후 5억짜리 부도를 맞아 1년반 동안 피나는 고생을 했다는 신극철씨는 “고통이 여간 아니었지만, 서로 돕고 위로해준 덕분에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이번 여행은 이처럼 지난날의 어려움을 무사히 극복한 데 대해 서로를 축하하고, 앞으로도 회원 가족간 우애를 더 돈독히 하자는 뜻에서 마련했다”라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컴퓨터 시뮬레이션 동호회 모임 중 하나인 사이버 항공 모임 회원들은 21세기의 첫날을 하늘을 나는 비행기 안에서 맞기로 했다. 최근 서울에 집결해 우의를 다졌던 이들이 새해 사업으로 ‘신년축하 비행’을 계획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비행기는 실제 비행기가 아니라 컴퓨터 가상 공간에서 조종되는 가상 비행기를 말한다.

시뮬레이션 전문 업체인 아이카스가 주선해 이루어질 이 비행은, 말하자면 컴퓨터로 이루어지는 모의 비행이다. 얼핏 대수로워 보이지 않지만 이 비행에 거는 회원들의 기대는 보기보다 간단치가 않다. 회원 중에는 실제로 비행기를 몰아 본 조종사 출신이거나 미국 공군에서 사용하는 교본까지 독파한 실력파들이, 실제 상황과 거의 똑같은 조건에서, 그것도 이제까지는 한번도 없었던 ‘편대 비행’을 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공군 대위 출신으로서 가상 공간에 ‘비행 학교’까지 운영하고 있는 아이카스 유대현 대표는 “비록 아마추어 동호인들의 행사이긴 하지만 컴퓨터 모의 시험 분야에서는 한 획을 긋는 일이 될 것이다”라고 장담한다.

공개 모집하는 ‘번개 여행’
회원이 무려 7천명에 이르는 매머드급 여행 동호회인 하이텔 나그네 사랑에서는 연말ㆍ연시를 맞아 ‘번개 여행’이 성시를 이룰 전망이다.

번개여행은, 번개모임의 변형이다. 당일 혹은 하루 전, 통신 공간에 모임 공고를 올려 본개치듯 만난다는 데에서 이름이 유래했다. 번개 여행을 마음먹은 개인은 기차표 따위를 미리 예매해 놓고, 여행 하루 또는 이틀 전쯤 계획을 공개해 신청을 받는다. 선착순으로 신청자를 받아 인원을 조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맺어진 여행팀 인원은 당일 공고할 경우 4~5명 정도. 별다른 계획 없이 연말을 맞닥뜨린 사람들이 편승하기에는 안성맞춤이다.

결혼 정보회사 듀비스와 인터넷 검색 서비스 업체 심마니는 청춘 남녀의 연말 연시를 위해 색다른 이벤트를 만들었다. 지난 11월22일부터 백일간 만명 사랑 만들기 행사를 잇달아 열고 있는 것이다. 이번 행사의 장점은 기존 네트즌이 얼굴도 모른채 공개 미팅에 참여해야 상대를 만날 수 있었던 반면, 서로 신원을 확인한 상태에서 만난다는 것이다.

참가 대상은 20~37세 미혼 남녀인데, 주최측은 스무 가지 주제로 미팅 파티를 준비했다. 12월19일 있었던 ‘나홀로족팅’은 그 중 하나이며, 성탄절 정오 카스타운 서울 강남역점에서 예정되어 있는 ‘백주 대낮팅’도 같은 시리즈. 이어서 28일에는 파트너와 함께 극장에서 영화도 볼 수 있는 ‘씨네 미팅’도 예고되어 있다. 만나기 전에는 E메일을 통해 미리 상대방과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주선하는데, 김덕희ㆍ이은지 씨처럼 주최측에 공동명의로 E메일을 보내는 경우도 있다.

‘하던 일이나 계속하자파(派)’ 많아
작지만 나름으로 특별한 세기말 이벤트는 이처럼 ‘기왕이면 새롭게 하자파(派)’가 벌이는 일이거나, 이들을 겨냥하여 만든 것들이 대종을 이룬다. 하지만 지금까지 해오던 일을 꾸준히 하며 연말 연시를 맞으려 한다고 해서 특별할 것이 없다고 생각해서는 금물이다. 이른바 ‘하던 일 계속하자파(派)’들의 의미 있는 작업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글쓰기연구회9회장 황금성 부여여고 교사) 소속 교사들은 이같은 흐름의 대표 격이다.

정회원 1백70명으로, 주로 현직 교사를 중시으로 운영되는 글쓰기연구회는 이오덕ㆍ윤구병(전충북대 교수) 씨 등이 회장을 맡아 ‘바른 글살이’연구를 꾸준히 해온 것으로 유명한 민간 단체다. 연구회는 매년 여름과 겨울 두 차례에 걸쳐 연수회를 갖는다. 연수히ㅗ에서는 항상 그렇듯이 회원들이 주제 발표를 하는데, 오는 1월8~10일에 있을 이번 연수회의 주제가 다름 아닌 ‘새 천년을 어떻게 맞을 것인가’이다.

남이야 알아주든 말든 그저 해야 할 일을 쉬지 않고 한다는 뜻으로 이루어지는 이번 행사를 위해 주제 발표를 맡은 현직 교사와 대학 교수는 공부를 하느라고 아예 연말 연시를 헌납했다. 모임의 총무를 맡고 있는 노광훈씨는 ‘연구회 발표 주제는 그때그때 필요하다 싶은 것으로 선정했지만, 이번에는 때가 때인지라 마음 먹고 여섯 가지 대 주제를 골랐다’라고 말한다. 내용인즉 ‘인간ㆍ자연ㆍ아이들ㆍ우리말ㆍ나를 어떻게 살릴 것인가’(5개)와 ‘새 천년을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1개)이다. 말하자면 글쓰기 연구회 회원들은 연말 연시의 특별한 의미를 ‘늘 하던’ 공부를 통해 찾아가고 있는 셈이다.

‘하던 일이나 게속하자파’에는 1년의 대부분을 일에 파묻혀 보내는 대다수 직장인 가정이 포함된다. 틈만 나면 쉬기 바쁜 직장인들에게 신정 공휴일은 밀린 집안일을 거들고, ‘내일’을 위해 재충전하는 시간을 갖기에 더없이 좋은 기회인 것이다. 더욱이 올 연말은 Y2k로 인한 사고가 우려되는 상황이어서, 일반 가정의 상당수가 오히려 즐기던 여행이나 외식도 그만두고 집에서 꼼짝하지 않겠다고 밝히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른바 ‘하던 일도 그만두자파’이다.

그렇더라도 100년에 한번 있는 세기말의 마지막 밤을, 그것도 격동의 한 세기를 동시대인으로 참여한 역사의 산 증인으로서 별다른 감흥이나 결의 없이 더나 보낸다는 것은 분명 따분하고 재미없는 일이다. 세기말의 마지막 밤을 가정에서 평온하게 맞기로 작심했으면서도 제야의 종소리가 울리는 순간만큼은 가족과 함께 뜬눈으로 맞을 생각이 있다면, 작은 케이크나 와인 한병 정도는 장만해둘 법하다. 시중에는 바로 이들 실속파를 겨냥한 ‘밀레니엄 와인’ ‘밀레니엄 케이크’ ‘밀레니엄 양초’ 등 이른바 밀레니엄 소품들이 상품으로 나와 있다.

기왕이면 새롭게 보내든, 하던 일을 계속하든, 안면 하던 일도 그만 두든 세기말을 누가 알차게 보내느냐 하는 데에는 정답이 있을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부를 과시하거나 겉치레만으로 세기말의 특별한 의미를 되새기려는 일부 부유층과 달리 대다수 일ㄹ반 국민은 저마다 제 자리에서 소박하고 건강하게 20세기의 마지막 나날을 마무리하며 다음 세기를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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