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그림자 속으로 사라지는 7인
  • 이숙이 기자 ()
  • 승인 1998.01.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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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종군 선언한 가신들‘2선 후퇴’실천… 아쉬움 접고 지역구 관리에 매진

 “꽃단장하고 수청 들라는 말만 목 빠지게 기다리는 퇴기(퇴기)들 같다.” 국민회의 한 고위 인사는 당 소속 국회의원들의 최근 동향을 이렇게 묘사했다. 아닌게 아니라 일찌감치 인수위나 비대위에 차출된 몇몇 의원을 제외한 대다수 의원들은 일손을 놓은 채 김대중 차기 대통령의 부름만을 기다리고 있다. 대통령을 냈으니 이제는 한자리 돌아오지 않겠느냐는 기대 심리에서다. 은근히 공을 내세우는 자기 과시파도 점차 늘고 있다.

 그러나 국민회의 내부에는 이런 논공행상이 비켜가는 자발적 소회 집단이 있다. 김대중 정권에서 백의종군하겠다고 선언한 동교동 가신7인을 두고 하는 말이다. 지난해 9월 김대중 정권에서는 어떤 임명직에도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권노갑 · 한화갑 · 김옥두 · 남궁진 · 최재승 · 설 훈 · 윤철상 일곱 가신은 요즘 당사 주변에 얼씬도 않은 채 몸을 꼭꼭 숨기고 있다.

 이들 가신은‘개국 공신’이다. 과거와 달리 이번 선거에서 가신들의 역할이 축소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자금과 조직관리, 외부인사영입 등 핵심 참모역은 그들 몫이었다. 남궁진의원은 총무위원장을 맡아 선거 자금을 총괄했고, 윤철상 의원은 지구당 별로 특별위원회 0~70개를 새로 조직해 50여만 회원을 확보했다. 윤의원은 특히 이 특위를 가동해 과거 70%정도밖에 충원하지 못했던 투 · 개표 참관인을 1005 확보함으로써, 국민회의 취약 지역에서 발생한 대리 투표나 샌드위치 개표를 효과적으로 막아냈다.

한화갑 의원은 전남 도지사 노려
 한화갑 · 최재승 · 설 훈 의원은 영남 공략이라는 드러난 역할 외에 외부인사 영입, 고급 정보수집, DJ밀사역 등 보이지 않는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한나라당 이수성 전 고문을 비롯한 여권 인사나 국민통합추진회의 소속 개혁인사를 접촉한 창구가 모두 이들 가신이었다. 극비 보안이 생명인 이들의 활동은 가명과 암호를 동원함으로써 007작전을 방불케 했다. 최재승 의원이 쓴 가명만해도‘한민우’(한국민의 친구)등 5~6개에 달했다.

 하지만 이런 공로가 있음에도 가신 그룹은 정작 정권을 잡은 후에는 찬밥 신세가 되었다. 남들은 신문에 한번이라도 더 이름을 내려고 목소리를 높이는 판에 이들은 오히려 뒤로 뒤로 후퇴하는 모양새다. 대선 기간 내내 김 차기 대통령을 밀착 경호한 김옥두 의원은 정초부터 일산에 발길을 뚝 끊었다. 항간에 김의원이 이름이 경호실장 물망에 오르내리고 잇지만 그는‘천만의 말씀’이라며 고개를 젓고 있다. 서울대 외교학과 출신으로 민주화 투쟁 시절 DJ의 외교 채널을 담당했던 한화갑 의원은 낙향을 검토하고 있다. 임명직에 오르지 못하게 된 만큼, 전남도지사로 나서 행정 역량을 발휘해 보고 싶다는 소망에서다. 나머지 의원들은 국회의원으로서 지역구 관리에 매진할 계획이다.

 동교동 가신들의 2선후퇴는 순전히 상도동 가신탓이다. 전세계 어디서든 국정 책임자가 바귀면 그의 통치 철학을 일사불란하게 실천할 측근이 전면에 나서는 것이 상례다. 한국 국민도 김영삼정권이 출범할 때 민주계 측근들이 대거 입각한 것에 별 거부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상도동 가신들의 국정 농단에 진저리가 난 국민들이 가신 정치에 극단적인 거부감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회창 후보 지지율이 50%까지 오르면서 상대적으로 김대중 총재 지지도가 답보상태에 머무르던 지난해 7월 어느날, 동교동 비서출신인 최재승 의원이 김총재를 찾았다. 당시 시중에는 그가 집권하면 정치 보복이 횡행하고 동교동 가신들이 판치게 될 것이라는 불안감이 널리 확산되고 있었다. 최의원은 김총재에게 이런 여론을 전하면서 “저희들은 선생님이 당선되어도 청와대나 행정부에 들어갈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라는 의견을 내비쳤다. 이말을 들은 DJ는“이틀전에 한화갑 동지도 최동지와 똑같은 얘기를 하던데…”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한의원이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판단한 최의원은 일산을 나와 곧장 한의원을 만났고, 이때부터‘가신 선언’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굳이 이럴 필요가 있느냐’며 이의를 제기한 반대파는 제외했다.
 
동교동 가신들, 약속 끝까지 지킬까
 스스로 선택한 길이지만, 막상 DJ가 당선되고 스포트라이트가 엉뚱한 곳으로 비치니 가신들 사이에서도 서운함이 비친다.“스스로 팽을 자청한 사람이 무슨 할 말이 있겠나”라는 한 측근의말에는 자괴감마저 담겼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동교동 가신들의 앞길에는 권한보다 무거운 책임만 깔려있다. DJ집권 기간 내내‘가신배제’라는 족쇄에 묶여 전면에 나서지 못하면서, 행여 가신과 연루된 조그만 잡음이라도 생기면 비판 여론을 몽땅 뒤집어써야 할 운명이다.

 하지만 서운함을 뒤로 하고 일곱 가신은 묵묵히 제 갈길을 가고 잇다. 병 보석중인 권노갑 부총재를 뺀 나머지 6명은 오히려 대선 전보다 더 바빠졌다. 이번 대선에서 부산 · 경남 지역을 전담했던 한화갑 의원은 선거가 끝난 뒤 벌써 네댓 차례나 이 지역을 다녀왔다. 그는 지지자들과 연일 소줏잔을 기울이느라 입안에 술 냄새가 가실 날이 없다고 하소연이다. 남궁진 의원은 김대중 차기 대통령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표명해준 10여 개 불교 종단을 순례하고 있다. 문화 예술계인사들로부터  상당한 지지를 이끌어 냈던 최재승 의원은 요즘 연극 · 뮤지컬 같은 공연을 관람하는 것이 일과가 되었고, 김옥두 · 설 훈 · 윤철상 의원은 지역구를 샅샅이 돌며 당선사례를 하고 있다.

 선거 전략의 하나로 추진되었던‘가신 정치 청산 선언’은 이제 동교동 가신들이 명예를 걸고 지켜야 할 불문율이 되었다.‘상도동 가신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동교동 가신들의 약속이 끝까지 유효할지 지켜볼 일이다.                             
李叔伊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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