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미네이터’의 오만과 탐욕
  • 허광준 기자 ()
  • 승인 1997.11.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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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세계 모든 문제 간섭 ‘힘자랑’…국익 집착, 국제적 역할 미흡…가국의 비판 들끊어

시계의 화약고 중동에 다시 전운이 감돌고 있다. 세계 제일을 자랑하는 미국의 군사력이 항모 니미츠와 조지 워싱턴을 앞세우고 페르시아 만으로 몰려들고 있다. 유엔 무기 사찰단 중 미국인 단원의 입국을 이라크가 거부함으로써 촉발된 긴장이 전쟁을 향해 치닫고 있는 것이다.

 91년 쿠웨이트를 침공한 사담 후세인을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혼낸 경험이 있는 미국은, 유독 자기네 사찰단원만을 스파이라고 지목해 거부하는 이라크를 재차 응징하기 위해 팔을 걷고 나섰다. 유엔을 통해 여러 나라로부터 후세인에 대한 공분을 끌어내고 이를 뒷심 삼아 이라크에 결정타를 가하겠다는 심산이었다. 미국은 이라크에 강력한 응징을 보장하는 결의안을 채택해 달라고 유엔 회원국들을 부추겼다.

 그러나 상황은 달라졌다. 안보리 여론은 91년 만큼 달아오르지 않았다. 회원국들의 목소리는 합쳐지지 않고 자꾸 가라졌다. 91년 때와 달리 어떤 아랍 국가도 이라크에 대한 군사 행동을지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요르단을 비롯한 아랍구들은 이스라엘도 유엔 결의안을 지키지 않는 판에 이라크만 웅징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아우성쳤다. 유엔 안보리 상임 이사국 가운데 프랑스·러시아·중국은 군사 공격에 동조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으며, 영국만이 미국과 발을 맞추어 이라크 공격을 적극 지지하고 있다.

모든 길은 이제 미국으로 통하는가
 두 나라가 안보리에서 목소리를 높인 결과 이라크에 대한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그러나 그 내용은 미국이 바라던 것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기껏해야 이라크 관리들의 해외 여행을 제한하며, 이라크 제재를 해제하는 데 대한 검토를 중단한다는 정도이다.

 이와 같은 반응은, 직접적으로는 이번 사태가 91년과 달리 이라크가 다른 나라를 침공해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점과 중동의 원유 자원을 소홀히 할 수 없는 유럽 국가들의 소극적인 태도에서 연유하지만, 그 이면에는 미국이 그동안 구제 무대에서 좌충우돌하며 큰 형 노릇을 해온 데 대한 은근한 불만이 들난 것으로 분석된다. 유엔 사찰단 중에서 유독 미국인만을 지목해 스파이 혐의로 입국을 거부한 이라크 역시 이같은 상황을 정확히 짚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 이라크 사태에서 미국이 겪는 상황은 미국의 대외 정책이 처한 딜레마를 잘 보여준다. 냉전이 끝난 이후 미국은 세계에서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떠올랐으나, 넘치는 힘을 쓸 곳을 찾지 못해 여기저기서 힘자랑을 하다 비판을 받고 있다. 경쟁자를 물리친 자신감이 미국으로 하여금 고압적이고 독선적인 외교 정책을 취하게끔 해서 지구촌 곳곳에서 이에 대한 비난과 반발이 들끓는 지경에 이르렀다.

 냉전 시대 미국의 상징은 우람한 근육질의 ‘람보’였다. 이데올로기의 적과 맞서서 강력한 무리력으로 적을 철저히 파괴해야 임무가 끝나는 람보는 소련과 대치한 상태에서 서방 진영을 이끌던 미국에 딱 맞는 이미지였다. 이 시기의 지상 명령은 대결과 승리였다. 그러나 적이 사라진 지금, 미국은 이른바 개입과 확장이라는 깃발 아래 지구 전역에 손길을 뻗치고 있다. 리처드 닉슨이 생애 마지막 작품으로 94년에 펴낸 책 <평화를 넘어서>에서 ‘우리는 마지막으로 남은 초강대국이다. 따라서 우리 국익과 상관 없는 위기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한 말은 미국의 상징이 이제 람보에서 ‘터미네이터’로 바뀌었음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세계의 미래는 바로 나의 결심과 행동에서 시작되며, 내가 아니면 이 지구를 누가 지키겠냐’고 자부하는 이미지다.

 소련이 무너진 뒤 미국은 역사에 보기 드문 절대적 지위를 누리고 있다. 역사가들은 인류사에서 한나라가 세계를 지배했던 예로 기원전 로마 제국과 ‘해가 지지 않던’ 근대 영국을 든다. 그러나 20세기 말 미국은 지역 범위로 보나 영향력으로 보나 사상 유례 없는 전성기를 누리고 잇다. 미국 국방 부의 작전 현황판은 세계 지도 위에 그려져 있고, 태평양 제3, 제7 함대와 대서양 제2 함대를 비롯해 세계의 주요한 모든 바다에 미국 군함이 떠 있다.

 군사력뿐만 아니다. 램에서 <쥐라기 공원>까지. 타이거 우즈에서 마이클 조던까지 미국의 문화는 곧 세계의 문화가 된다. 하다못해 미국 엑센트의 영어가 국제어로 통용된 지 오래다. 이제 모든 길은 로마가 아니라 미국으로 통한다.

 부시로부터 냉전 종식 뒤 국제 질서를 새로 세울 책임을 넘겨받은 클린턴 1기 행정부는 대외 정책과 관련하여 일관성이 없다는 비판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다. 국제주의와 고립주의, 도덕 외교와 경제 외교가 번갈아 가며 워싱턴에서 울려퍼졌다. 보스나아·소말리아 문제에 대한 소극적인 정책에 항의해 국무부 외교관들이 줄줄이 사표를 내고 떠났으며, 패트릭 뷰캐넌 같은 분석가는 미국이 초강대국의 간판을 내렸다고 진단했다. 그러나 이같은 진단은 너무 성급한 것이었음이 곧 드러났다

 많은 시행 착오를 거친 클린턴 행정부는 2기에 들어 여장부 매들린 올브라이트를 외교 수장으로 내세워 지구촌 곳곳에 미국의 이익을 심고 있다. 때마침 찾아온 유례 없는 호황이 뒷바람이 되어 주었다. 그러다 보니 클린턴 행정부는 자신감이 지나쳐 최근 외교 관례나 국제 사회의 상궤를 무시한 힘자랑을 수시로 벌이게 되었고, 이는 잠재적 경쟁자는 물론 전통적인 우방에게도 일방주의(unilateralism)로 받아들여져 ‘오만한 미국’에 등을 돌리도록 만들고 있다.

GNP 대비 대외 원조액, 선진국 중 가장 적어
 지난 6월 미국 덴버에서 열린 선진 8개국 정상 회담에서 클린턴이 각국 정상을 앉혀 놓고 ‘경제강의’를 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미국 경제가 최근 수년 동안 눈부시게 성장하고 있음을 과시하고 싶었는지 클린턴 대통령은 정상들에게 미국의 경제 지표와 유럽 여러 나라나 일본과 비교한 자료를 들어 가며 미국의 모범을 따르라고 권고한 것이다.

 부자가 돈자랑을 하니 배가 아프더라도 꾸꾹 눌러 참고 있던 정상들은 클린턴 대통령이 저녁 모임에 카우보이 복장을 하도록 부탁하자 감정이 폭발하고 말았다. 돈으로는 몰라도 문화로는 미국에 조금도 양보할 마음이 없는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 헬무트 콜 독일 총리, 로마노 프로디 이탈리아 총리 등은 이 문제에 관해 긴급 회의를 열고 클린턴의 제의를 거부하기로 했다. 클 총리는 “내평생 절대 카우보이 장화는 신지 않을 것이다”라고 두 번 세 번 다짐했다.

 미국의 독주는 7월에도 계속되었다.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상회담에서 주요 안건은 동유럽 몇몇 나라를 새회원국으로 가입시키는 것이었다. 미국은 폴란드·헝가리·체코를 밀었고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 남부 유럽 나라는 루마니아와 슬로베니아를 후원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를 미국이 유럽에 개입할 수 있는 효과적인 장치로 인식하고 이를 확대하는 데 심혈을 기울여온 미국은 이 기구에서 자기네 주장이 얼마나 잘 먹혀드는지에 항상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 회원 가입 문제와 관련한 줄다리기 결과는 물론 미국의 판정승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돌출한 동남아 국가들과 미국의 갈등도 비슷한 구조에서 말미암은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통화 위기에 시달리던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총리는 동남아 통화를 흔드는 주범으로 월스트리트의 금융 황제 조지 소로스를 도마 위에 올렸다. 그러자 당시 미국 국무부 대변인 니콜라스 번스는 즉ㄱ각 소로스를 옹호하고 나섰다. 통화위기를 둘러싸고 시작된 설전은 이 지역에 잠재하고 있던 반미 우ㅢ식에 불을 붙였다. 사실 마하티르는 미국의 패권주의에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던 인물로,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아시아>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금융 위기를 둘러싸고 동남아 여러 나라와 마찰을 빚으며?서도 미국은 이 지역에서 손을 빼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는 듯하다. 11월6일 로버트 루빈 재무장관은 국제 사회가 동남아 금융 위기를 타개하려고 지원할 경우 어디까지나 국제통화기금(IMF)이 주도해야 할 것이라고 못박았다. 이는 아시아 국가들 간에 금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시아기금과 같은 지역 기구를 새로 만들자는 논의가 이는 데다, 경제 지원 같은 일본의 역할에 대해 신중한 검토가 진행되고 있는점을 겨냥한 것이다.

 이처럼 세계를 안마당 삼아 지구촌 곳곳에서 좌충우돌하며 목소리를 높이는 미국을 국제 사회가 못마땅하게 보는 것은 정작 그 덩지에 걸맞는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유엔에서 미국은 분담금을 약25% 떠맡고 있지만, 돈을 제때 내지 않는 만성 채납국이다. 미국 의회는 11월12일 국제 기구나 외국에 군사·경제 원조를 제공할 것을 규정한 외국 원조법안을 압도적으로 가결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8억1천9백만달러(약8천억원)나 밀린 유엔 분담금이 포함되지 않았다. 다음날 의회는 정부가 올린 융엔 지원 예산을 아예 삭제해 버렸다.

 95년 한 미국 민간 구호단체는 국민총생산과 대비한 대외 원조 규모에서 미국이 21개 선진국 중에서 가장 작다고 발표했다. 97년 기준으로 미국의 대외 원조는 지난 10년간 37% 줄었다. 이처럼 목소리만 크고 주머니 여는 데는 인색하다는 인식 때문에 20세기 말에 초강대국은 자신말고는 세계를 제대로 설득하지 못하고 있다. 각종 제재를 통한 고립화 정책이 약효가 없을뿐더러 거꾸로 미국이 고립되는 조짐까지 보이고 있다.

“미국만이 세계 질서 유지할 수 있다”
 예컨대 11월5일 유엔 총회는 30년 넘게 쿠바에 경제 봉쇄 정책을 취하고 있는 미국의 경제 제재 조처를 이제 끝내라고 촉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연합 열다섯 나라를 비롯해 일본·중국·러시아·북한 등 1백43개국이 찬성표를 던졌으며, 결의안에 반대한 나라는 당사자인 미국과 이스라엘·우즈베키스탄 등 세나라뿐이었다. 또 미국은 국제 사회에 이란 경제 제재에 참여하라고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지만 몇몇 나라는 이를 무시하고 이란과 천연 가스 개발 사업 투자 계약을 맺었다(50~51쪽 기사 참조).

 클린턴 행정부의 오만한 대외 정책이 잠재적 경쟁국 간의 연합과 동맹을 부채질해 장래 미국지위를 위협하고 있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미국의 오만함은 미국 국익에 직접 손해를 미치기도 한다. 가뜩이나 미국에 반감을 품고 있는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대통령은 미국이 동(東)티모르와 관련해 인권 문제를 들고 나오자 8월5일 미국으로부터 F16 전투기 5억달러어치를 구입하겠다는 계약을 취소하고, 대신 러시아로부터 수호이 30K 전투기 12대와 부대 수송용 헬리콥터 MI17-Ⅳ 8대를 사들이겠다고 발표했다. 인도네시아는 세계 제5위의 무기 수입국이다.

 미국의 일방주의는 미국 경제계로부터도 따가운 비판을 받고 있다. 국방장관과 중앙정보국장을 지낸 제임스 슐레진저는, 클린턴 1기 행정부가 집권한 4년 동안 미국은 60여 차례에 걸쳐 무려 35개국에 일방적 경제  제재 조처를 취했거나 취하겠다고 위협했으며, 이느 세계 인구의 약42%를 제재 대상으로 한 셈이라고 지적했다. 서든 캘리포니아 대학 로널드 스틸 교수는 미국이 세계의 모든 잘못을 바로잡으려 하거나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미국의 생활 양식을 전파하려 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그는 미국이 초강대국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그같은 일을 떠맡는 동안 유럽이나 일본은 오로지 경제에만 매달린다고 경고한다.

 몰론 반대 시각도 있다. 초강대국 미국을 이끌어 가는 행정부와 이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쪽의 시각이다. 이들은 세계가 냉전 이후 방향타를 잃고 무질서하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누군가가 나서서 질서를 유지해야 하는데, 그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미국밖에 없다고 이식하고 있다. 실제로 보스니아 사태나 소말리아 문제. 북한 핵 같은 굵직한 국제 현안은 미국이 없었다면 해결에 이르기가 매우 어려웠으리라는 지적이 많다. 특히 지역 패권국이 새로이 등장할까 봐 노심초사하고 있는 나라들에게는 미국의 ‘긴 팔’이 반가운 존재가 아닐수 없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관련국들은 미국의 고압적 자세 때문에 자존심에 상처를 입곤 한다.

 저널리스트이자 하버드 대학 올린전략연구소 연구원인 요제프 요페는 냉전 후 미국이 국제 사회에서 독점적 지위를 누리고 있지만, 인류 역사에서 국제 사회는 결코 한 나라가 독주하도록 그냥 놓아둔 적이 없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는 외교 전문지 <포린 어페어즈>에 기고한 글에서 ‘힘에는 책임이 따르기 마련이고, 책임이란 곧 인색한 이기주의를 극복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미국에 변화를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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