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데로 날아든 ‘LA 노랑나비’
  • 성기영 기자 ()
  • 승인 1997.11.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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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 선교사 이 데보라/‘성 불구’ 천형 안고 화류계 20년…매춘 여성·마약 환자 어머니로 거듭나

그가 천호동 텍사스촌에 들어서자 박수가 터져나왔다. 1년이 넘는 집중 단속과 관할 구청의 ‘강제 폐쇄’ 예고로 설렁할 대로 썰렁해진 뒤끝이었다.

 이 거리의 앳된 여자들이 그에게 보낸 박수의 의미는 곧 밝혀졌다. 그는 여기서 열 대여섯 살부터 스무 살 남짓한 직업 여성들을 어루만지고 쓰다듬는다. 그들의 건강과 안부를 묻고 고향 부모님의 병세를 걱정하고, 골목 끄트머리에 있는 선교 사무실에서 이들과 함께 기도하고…. 그는 여기서 이 여성들을 통해 30년 넘는 자신의 과거사를 퉁명하게 들여다 보고 있었다.

 이 데보라(55). 출생지, 경북 예천, 직업, 마약 선교사, 국제마약퇴치본부 회원, 한국 이름 이정희, 그러나 실제로 이 이름으로 불린 기간은 극히 짧다. 민마담, 라이어, 샌디, 그리고 108번 노랑나비까지, 모두 그가 서울과 홍콩과 LA를 오가며 ‘여자 장사’를 할때 주변에서 붙여준 이름인데, 아직도 그에게는 낯설지 않다.

 그는 아지까지 여성으로서 생리 현상을 경험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정상적인 결혼은 물론 남자와 잠자리를 가져본 적도 없다. 그가 남자와 관계를 ‘가질 뻔’ 했던 경험은 어렸을 때 성폭행 위기를 처했던 것이 전부였다. 가출한 동생을 찾아 영등포역 주변을 해맬 때였다. 상대는 늙수 그레한 방범대원, 이것저것, 호의를 베풀고 여인숙가지 잡아주겠다던 그 방범대원은 방을 잡자마자 그를 덮쳐 왔다. 긴박한 순가. 그러나 정작 놀란 것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다. “이 년 병신이찮아, 원 재수 없게스리! 썩 꺼져 버려.” 그 남자는 자신의 비밀을 들켰다는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는 열 다섯 살짜리 소녀를 향해 가래침을 뱉고 사라졌다.

 남들은 그를 ‘배냇 병신’이라고 불렀다. 불행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지금은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지만, 신앙을 가지지 않았을 때 그는 이것을 ‘신의 질투’라고 생각했다. 잘못 태어난 자신의 삶을 무효로 하고만 싶었다. 소녀 시절 두 번이나 수술을 시도해 보았지만 모두 실패했다. 유일한 방법은 미국으로 가 수술을 받는 것이었는데, 문제는 돈이었다.

 쉽게 돈을 벌기 위해 처음 시작한 것이 이태원 윤락가 생활이었다. 남자와 잠자리를 할 수 없으니 술취한 고객을 끌어오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일이었다.

 수술을 위한 미국행은 서른여섯이 되어서야 이루어졌다. 홍콩으로 팔려가 마약으로 몸이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진 뒤였다. 게다가 정작 미구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소식은 더욱 절망적이었다. 수술을 받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는 “내 인생이 거기서 끝나는 줄 알았다”라고 말했다.

마약에 찌든 댄서에서 마약 치료 전문가로
 이제 남은 것은 미국사회에 정착해 살아 나가는 일뿐, 그래서 시작한 것이 마사지 클럽이었다. 동양계 여성 수십 명을 마사지 걸로 고용했다. 몰론 한국 여성도 다수 끼어 있었다. 마사지 클럽은 동양게 여성을 주로 찾는 서양 남성들의 입맛과 맞아떨어졌다. 미국 생활은 승승장구였다. 손님이 많이 드는 날이면 하루에 3만 달러까지 번 적도 있었다. 몇 년만에 그는 로스엔젤레스에 마사지 클럽을 7개나 소유한 화류계의 ‘거물’로 성장했다.

 그러나 화류계 생활의 끝은 비참했다. 로스엔젤레스에서 이름을 날리던 한국인 폭력 조직 KK단의 습격, 함께 일하던 지배인의 배신, 그리고 매춘과 마약 복용이 탄로나 세크라멘토 교도소에서 보낸 18개월의 수감 생활, 무너져 내리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출소 후 그는 직원 4백명을 고용했던 사장에서 뉴욕 뒷골목에서 빗자루질을 하는 살룽 종업원으로 전략했다.

 그와 같은 생활은 생애에 굵은 상채기만을 남겼지만 그는 전쟁과도 같았던 화류계 생활의 종착역에서 종교를 만날 수 있었다. 마사지 클럽 법률 자문에 응하던 프레이드 변호사의 간곡한 권유 덕이었다. ‘데보라’라는 지금의 이름도 교회에서 새로 얻은 것이다.

 그의 주변에 남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를 종교로 이끈 프레이드 변호사까지 포함하면 세 남자가 그의 주변에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불행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열여덟에 처음 연애 감정을 느끼며 만났던 잘 생긴 의대생은 자신이 사랑하던 여자의 육체의 비밀을 알고 난 뒤 그 고통을 자신의 생명과 맞바꾸고 말았다. 유일하게 ‘연인’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었던 사람이었지만 그가 자살한 후 이성을 향한 감정은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대신 그 자리에 매춘 여성과 마약 중독자들에 대한 애정을 체워 넣었다.

 23년 만인 90년에 한국을 다시 찾은 그는 지금 잠실의 한 아파트에서 윤락에 종사했던 소녀들을 3명 데리고 살고 있다 94년 윤락 여성 보호 시설인 경기여자기술학교 화재 사건으로 오갈 데가 없어진 ‘전직’매춘 여성들이다.

 요즘도 그는 법무부 보호관찰소 등에서 약물에 중독된 청소년들을 상대로 ‘실감 나는’ 강연을 펼치고, 된서리 맞은 윤락가를 찾아 다니면서 선교 활동에 여념이 없다. 세계적으로 한국인 마약 선교사는 이씨를 포함해 3명밖에 되지 않는다. 나머지 2명은 현재 영국에서 활동중, 홍콩으로 팔려가 클럽에서 댄서로 일하며 마약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이씨는 “이제 눈빛만 봐도 마약 중독자를 알아낼 수 있다”라고 말한다. 그동안 정부의 마약 단속에 참여한 뒤 50여 명의 마약 중독자를 선별해 하와이등 외국 치료 기관으로 보내기도 했다.

 이씨는 마약과 매춘 문제에 관한 한 누구보다도 전문가라고 자처한다. 그러나 약 이름이나 화학 성분을 죽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30년간 직접 체험한 일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그의 강연에는 늘 관심이 집중된다. 그는 세크라멘토 교도소에서 마약 성분이 빠져 나가는 것을 못 견뎌 피울음을 토하거나 하루 종일 바닥을 긁어대며 괴로워하던 사람들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마약에 빠져 끝간 데 없이 파멸해 가는 사람을 하나라도 더 구하려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늘 수다스럽다. 그러나 그 수다를 한 꺼풀 걷어내고 보면 돌이키기 싫은 자신의 과거를 애써 위장해야만 하는 회한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있다. 그리고 매춘과 마약에 맞서고자 하는 ‘전의’도 있다. 그래서 그의 수다는 슬프지만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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