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재건 프로그램 준비돼 있다
  • 문정우. 이숙이 기자 ()
  • 승인 1998.0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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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18일 자정을 넘기면서 국민회의 당직자들은 텔레비전 화면에서 눈을 떼고 서로 얼싸안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김대중 후보와 이회창 후보의 표차는 1% 내외였으나 이미 대세는 판가름 나 있었다. 이회창 후보 표밭인 영남의 개표는 거의 끝나가고 있었지만, 김대중 후보가 강세를 보인 서울에서는 개표할 것이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부터 텔레비전 앵커들은 조심스럽게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알리기 시작했다.

 김대중 후보 단선,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리고 또 앞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질 것인가. 그의 당선이 시사하는 의미는 단순히 정권 교체라는 한마디로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크고 복잡하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남북 분단과 지역간 대립이라는 2개의 질긴 사슬에 묶여 파행을 거듭해왔다. 2개의 사슬은 서로 뒤엉켜 우리 사회의 정상 운행을 불가능하게 했다. 집권 세력은 이같은 상황을 조장하고 교묘히 이용하며 정권 연장을 꾀해왔다. 선거가 각 지역의 머릿수를 세는 경쟁으로 전락하면서 집권 세력은 그들의 공과와는 상관없이 번번이 정권을 ‘재창출’하곤 했다. 이런 상태에서는 야당에 대한 정당한 비판조차도 집권 세력에 대한 옹호로 비칠 수밖에 없었다. 그로 인한 우리 사회 내부의 심리적 갈등도 적지 않았다.

시장 원리에 따라 ‘재벌 해체’ 유도할 듯
 이제 지난 26년 동안 그 반대 세력의 대표로서 네 차례나 대통령 선거에 도전한 김대중 후보가 당선함으로써 우리 사회는 지역 갈등이라는 질곡으로부터 벗어날 탈출구를 마련하게 되었다. 국가 부도라는 집권 세력의 결정적인 실책과 DJT라는 타협속에서도 표가 동서로 확연히 갈리고 표차도 별로 나지 않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호남 대 비호남의 묵은 지역 갈등 구조가 깨진 것이 사실이다. 파장은 정치권을 넘어 사회 구석구석에 미칠 것이다.

 그동안 집권 세력이 변함없이 내세운 슬로건은 안정(대북 강경 노선) 속의 번영(경제 우선주의)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반대하는 세력을 무조건 좌익 세력으로 몰아붙였다. 특히 선거 때는 더했다. 야당 지도자 출신인 김영삼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구호는 안정 속의 변화(개혁)로 바뀌었으나, 정책에 근본적인 수정은 없었다. 이번에도 선거 막판에 한나라당은 김대중 후보를 겨냥해 ‘남한에 붉은 정권을 세울 수는 없다’는 성명을 냈다.

 이제 관심은 김대중 후보가 무엇을 준비해 왔는가 이다. 그가 국가를 끌고 가려는 길이 과연 과거의 집권세력이 걸어온 길과 얼마나 다를 것인가이다. 그동안 그는 집권을 위해 끊임없이 우경화의 길을 걸었다. 그는 재벌에 대한 시각을 계속 수정했으며, 이번 선거를 앞두고는 5·16군사 쿠데타 주역인 김종필·박태준씨와도 손을 잡았다.

 그 때문에 여권에서조차 그가 집권하면 ‘깐깐한 이회창이 대통령이 되는 것보다 훨씬 변화가 적지 않겠느냐’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그런 인식은 결과적으로 여권의 분열을 낳았다.

 하지만 이런 시각은 이제 교정이 필요하다. 그는 19일 가진 당선 기자 회견에서 경제보다 민주를 앞세웠다. ‘위대한 한국인의 시대를 열어 갑시다’라는 부제가 붙은 그의 당선 소감원고의 큰 제목은 ‘민주발전·경제회생’이었다. 나라의 경제가 거덜난 상태에서도 그는 경제 회생보다는 민주발전에 더 역점을 둔 것이다.

 ‘경제 발전을 위해 오랫동안 민주주의를 희생해 온 것이 현재의 경제 위기를 포함한 우리 사회 전반의 파행적 왜곡 현상의 주된 원인’ 이라는 것이 그의 진단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앞으로 모든 기업을 권력의 사슬로부터, 그리고 권력의 비호로부터 완전히 해방시킬 것’이라고 했다. 과거의 경제제일주의 노선은 수정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 국민회의 조세형 총재권한대행은 ‘앞으로 정치를 위해 경제를 이용하지도 않고, 경제를 위해 정치를 활용하지도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말한다. 기업으로부터 절대 돈을 받지 않고 철저하게 정치와 경제를 분리하겠다는 구상이다. 얼핏 들으면 취임한 뒤 ‘기업으로부터 한푼도 받지 않겠다’고 했던 김영삼 대통령의 얘기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김당선자 측근들은 대선 때 기업으로부터 천문학적인 돈을 거두어들였던 김대통령과 그렇지 않은 김당선자 사이에는 경제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에 큰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한 측근은 ‘국제금융기구와 협정을 준수하면서 자연스럽게 시장 원리에 따라 재벌 해체를 유도하는 것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전한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더 이상 중소기업이 대기업의 횡포에 희생되지 않도록 공정한 경쟁을 정착시키겠다. 중소기업을 21세기 우리 경제를 이끄는 견인차로 육성하겠다”라고 말했다. 그의 재벌관은 대선 때마다 조금씩 변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87년에는 재벌해체론, 92년에는 재벌과 중소기업의 역할분담론, 이번 대선을 앞두고는 대기업 육성론까지 폈다. 그러나 그는 이번 경제 위기를 계기로 다시 재벌해체론 쪽으로 돌아간 듯하다. 그는 개발 독재 과정에서 뒤틀린 경제 구조를 민주화하는 것을 국정의 큰 방향으로 잡은 것 같다.

지방자치 완성하고 민주주의 복원
 그의 기자 회견 연설 내용 중 또 주목되는 것은 ‘더 이상 반쪽짜리 지방자치제는 있을 수 없다’는 대목이다. 그는 기자들과의 질의 응답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지방 정부에 인사권을 이양하는 동시에 지방 경찰을 창설해 앞으로 도지사가 일반 행정뿐만 아니라 치안으로도 심판 받도록 하겠다”라고 했다.

 그는 그동안 지방자치제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 왔다. 90년 여권이 지방자치제 실시를 유보하려 하자 그는 당시 평민당 의원들을 지휘하며 드원 거부 투쟁을 벌였다. 95년 지방 자치 선거를 앞두고 여권에서 선거연기론이 흘러나오자 그는 민주당 의원들로 하여금 당시 황낙주 국회의장과 이한동 부의장 집을 점거하도록 했다. ‘지방자치를 실시하지 않으면 민주화가 됐다 할 수 없고, 지방자치를 실시하지 않으면 정권교체도 어렵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실제로 그는 지방자치단체장 선거가 실시된 뒤 관권 선거가 봉쇄되어 지난 총선이나 이번 대선에서 득을 많이 본 것이 사실이다. 그는 집권한 뒤 지방에 상당한 권한을 이양하는 지방자치제를 실시 할 것이 틀림없다. 그럴 경우 우리 사회는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큰 변화를 맞게 된다. 그리고 그가 취임하고 나서 두 달 뒤인 5월에 실시될 지방자치 선거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달아 오를 것이다. 특히 서울시장은 명실공히 소통령 자리로 격상될 것이다. 국민회의에서는 서울시장 공천을 따내려는 인사들의 물밑 각축이 벌써부터 치열하다.

 아무튼 그가 집권기간에 이루려는 목표는 이제 분명해졌다. 그것을 한마디로 압축하면 민주주의 복원이다. 그는 우리 사회가 직면한 위기를 헤쳐 가려면 민주주의라는 정도를 찾아가는 수밖에는 뾰족한 방법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통일·외교 분야를 포함해 아직 그의 집권 청사진은 미완성이다. 그리고 행보는 무척 신중하다. 당직자들에게는 책임질 수 없는 말은 삼가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정권인수위원회 위원장을 맡게 될 것이 확실해 보이는 이종찬 부총재 방에는 요즘 하루 종일 ‘회의중’이라는 팻말이 붙어있다. 당의 각계 전문가들이 시도 때도 없이 드나드는 그 방에서는 김당선자의 집권 계획이 수립되고 있다. 지난 19일 이부총재는 ‘대통령 당선자의 고려 사항’이라는 제목이 붙은 A4 용지 30~40장 분량의 1차 보고서를 김당선자에게 제출했다.

경부고속철도 건설 게획 전면 수정
 ‘선거와 통치는 다르다. 선거에는 적이 존재하지만 통치에는 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전제한 이 보고서에는, 대통령 당선 자의 초기 일정과 표정 관리 방식까지 적혀 있다. 김당선자는 이 보고서 건의 따라 1차로 국정 기본 방침을 밝힌 기자회견문을 발표한 데 이어, 2차에는 군인들의 떨어진 사기를 높일 수 있는 내용, 3차에는 외국인들에게 신뢰를 얻을 수 있는 내용이 담긴 성명을 순차적으로 발표할 계획이다.

 92년 김영삼 대통령의 정권인수위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는 김당선자의 한 측근은, 최근 재벌의 재무 상태를 확실히 파악하고, 국가의 금융 실태에 대한 정확한 보고를 받고, 현재 한국과 미·일의 외교 관계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알아보는 것이 시급하다고 보고했다. 현정부가 다음 대통령의 국정 운영에서 가장 중요한 이 세 가지 요소를 아직도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아무튼 김당선자의 국정 운영 청사진은 정권인수위원회가 본격적으로 가동된 뒤에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낼 것 같다.

 아직 큰 틀에 담긴 그림은 완성되지 않았지만 앞으로 발표할 단기적인 처방 몇가지는 내부 검토를 거쳐 확정 단계에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경부고속철도 건설 계획 전면 수정이다. 이는 정치를 위해 경제를 이용해서는 안된다는 대원칙을 관철하기 위한 서곡이다. 경부고속철도는 선거를 위해 김대통령이 경제 논리를 무시하고 강행한 전형적인 사례라고 김당선자측은 본다.

 
단기적 성과와 인기에 연연하면 실패
 요즘 김당선자 측근들이 올리는 보고서에서 가장 많이 공통적으로 눈에 띄는 대목은 ‘절대로 국민에게 과잉 기대를 갖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 점에서는 김대통령이 훌륭한 반면 교사이다. 김대통령은 집권 초기에 깜짝 놀랄 만한 조처들을 잇달아 발표해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자만에 빠져 실정을 거듭했다. 결국 초기에 조성한 거품 인기는 정권을 망치는 독이 되고 정권을 치는 칼이 되어 돌아왔다. 측근등은 그와 같은 전철을 밟아서는 안된다고 경계한다. ‘인기 있는 대통령이 되려고 해서는 안된다’ ‘단기적 성과에 연연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측근들의 건의이다.

 김당선자는 천신만고라는 표현으로는 모자랄 정도로 어렵게 집권에 성공했으나 그의 앞길은 험난한 것이 사실이다. 일부 외신은 벌써부터 그가 불행한 대통령이 될지 모른다고 타전하는 판이다. 그는 당장 국가 부도 위기에 몰린 경제난을 해결해야 한다. 남북 관계 개선도 그리 만만한 과제가 아니다. 그리고 자민련과 원만하게 권력을 나우어야 하고, 내각제개헌 약속도 지켜야 한다. 그는 전임자인 김영삼 대통령을 비롯해, 바웬사 전 폴란드 대통령이나, 하벨 전 체코 대통령 등 국가 경영 능력에서 낙제점을 받은 투사 출신 지도자들과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무거운 짐은 30년 넘게 그에게 적개심에 가까운 반감을 표시해온 관료와 언론, 그리고 보수층과 영남 등 반대 세력과의 관계를 어떻게 가져갈 것인가이다. 김영삼 대통령도 초기에는 의욕을 갖고 개혁에 착수했으나 보수층의 대반격에 밀려 개혁은 구호로 그치고 말았다.“김당선자는 실수하기만 바라고 있는 대군중 앞에서 홀로 묘기를 부리고 있는 선수와 같다.” 대선 직전 국민회의에 입당해 유세 기간에 지역 감정 타파의 기수로 활약해온 한 영남 인사의 푸념이다.
 
김당선자는 국민에게 진 빚 갚아야 한다
 하지만 김당선자의 앞길이 그리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의 강점으로는 우선 정계에 복귀해 국민회의를 창당하면서 가신 정치의 구태를 벗어버렸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는 오래된 가신들을 2선으로 후퇴시키고 새로운 인사들을 영입해 주변을 물갈이 했다. 그는 또한 민주화 투쟁 뒤 곧바로 정권을 잡은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야당에서 활동하며 국정 운영의 감을 잡았다. 그리고 JP·TJ와 연합해 가용할 인력을 충분히 확보한 상태이다. 그 때문에 그의 측근들은 “김총재가 정권함으로써 오랫동안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던 정치 세력이 하나로 통합되어 신주류를 형성 할 수 있게 됐다”라고 말한다.

 보수층이나 영남권의 마음을 살 수 있는 조처들이 깊이 검토되고 있다는 얘기도 흘러나오고 있다. 대구 출신인 이수성 전 총리(오른쪽 상자기사 참조)나 한나라당 문희갑 대구시장 중용설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국민회의 관계자들은 “준비된 대통령답게 참신한 조처들이 잇따를 테니 기대하라”고 애드벌룬을 띄운다.

 경제 개혁을 불가피하게 강요하고 있는 IMF체제는 김당선자에게 위기이자 기회이기도 하다. IMF측의 개혁 요구와 현재의 위기 상황을 방패로 하여 좌파적·진보적이라는 비난과 보수 세력들의 반발을 제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환상적인 승리를 뒤로 하고 바로 냉엄한 현실앞에 선 김대중 당선자. 그는 빚을 많이 진 사람이다. 호남의 유권자 대다수는 네 번이나 그에게 표를 몰아주었다. 이번 대선에서는 호남의 유권자 90% 이상이 말 그대로 표를 긁어모아 주었다. 정권 교체와 지역 갈등 해소를 바라는 많은 유권자도 그에 대한 개인적 선호와 상관없이 그에게 표를 던졌다. 이제 그가 빚을 갚을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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