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국 지도자의 ‘외교 성적표’
  • 허광준 기자 ()
  • 승인 1998.0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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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턴, 영향력 확대 성과…강택민 · 시라크, 미국 독주 견제에 앞장

97년도에도 세계는 숨가쁘게 달렸다. 강대국들은 지구촌 곳곳에서 때로는 갈등하고 때로는 협조하며 97년판 국제 질서를 만들어 냈다. 특히 각국 지도자들은 활발한 정상 외교를 펼쳐 영향권을 넓히고 국익을 키우느라 분주한 한 해를 보냈다.

  국제 사회에서 정상 외교의 중요성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나라 간의 갈등이 국가 원수의 악수 한 번으로 깨끗이 해소되기도 하고, 반대로 서로에 대한 불신이 국가간 알력을 빚어 골이 깊어지기도 한다. 외교 성적표가 바로 국내 지지도로 이어지기 때문에 정치인으로서도 외치(外治)는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 강대국 지도자들의 움직임을 통해 올 한 해 국제 관계의 주요 흐름을 진단해 본다. <편집자>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에게 97년은 집권 2기 외교 방향의 이정표를 세운 해이자 냉전 이후 새로운 국제 질서를 주도적으로 재편해 나가는 시발점이 된 해이다.

 96년 말, 재선한 뒤 첫 나들이로 마닐라에서 열린 아태경제협력체(APEC)에 참석해 한국·중국·일본 등 주요 아시아 지도자와 정상 회담을 한 클린턴은, 해가 바뀌자마자 유럽으로 눈길을 돌렸다. 21세기 세계 안보 환경의 주요한 한 축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확대 문제가 그것이다. 3월 핀란드 헬싱키에서 옐친 러시아 대통령을 만나 벌인 정상 회담의 주요 의제는 나토를 확대하는 데 따른 러시아의 협조를 얻어내는 것이었다. 동유럽으로 나토를 확대하려는 미국의 의도에 러시아는 줄곧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왔지만, 어쨌든 클린턴은 7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나토 정상 회담에서 폴란드·헝가리·체코를 새 회원국으로 가입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의 영향력 확대를 꺼리는 프랑스 등 서 유럽 나라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5월에는 대통령이 된 이래 처음으로 멕시코 등 중미 지역을 돌았다. 표면상 이유는 마약 문제 해결과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확대에 관한 논의였지만, 실제로는 제 집 안마당처럼 생각해 잘 돌보지 않는 사이 유럽과 아시아의 투자가느는 등 미국의 경계심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10월에는 남미 베네수엘라·브라질·아르헨티나를 찾아가 경제 협력을 축으로 한 관계 강화를 모색했다. 남북 아메리카 전체를 자유무역지역으로 묶어 새로운 경제 블록을 구축하려는 클린턴 행정부의 구상에 따른 것이었다.

 아시아 지역에 대한 미국의 대외 정책은 아태경제협력체와 미·일, 미·중 관계를 축으로 하여 진행되었다. 특히 9월에 일본과의 미·일 방위협력지침 개정을 마무리하고, 10월 중국 강택민 주석과 정상 회담을 함으로써 아시아의 잠재적 강국인 두 나라를, 하나는 미국과의 동맹 아래 든든히 묶어두고, 다른 하나는 발톱을 적당히 잘라 이 지역에 안정적인 영향력을 확보했다고 볼 수 있다.

 미국 수뇌부가 올해 가장 분주하게 움직인 때는 이라크와 긴장이 고조되었던 11월이다. 이 사태는 국제 사회에서 미국의 지도력을 시험할 좋은 계기가 되었다. 유엔의 이름 아래 이라크를 웅징할 길을 모색하던 클린턴에게 되돌아온 것은 일치하지 않은 국제 사회 목소리들이었다. 미국은 페르시아만에 불씨를 묻어둔 채 재를 덮을 수밖에 없었다.

 97년 클린턴 외교의 마무리는 중동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79년 회교 혁명이래 경제 제재 고삐를 풀지 않았던 이란과 유화적인 눈짓을 주고받는 한편, 전통적 지원국이었던 이스라엘의 네타냐후 총리와 새로운 갈등을 만들고 있다. 미국의 중동 정책이 급변할 가능성은 별로 없지만, 어쨌든 미국 대통령인 클린턴에게 새로운 외교 숙제가 떨어진 셈이다.

 강택민 중국 국가 주석이 96년 11월말 인도·파키스탄 등 서남아시아를 순방하며 관계 개선을 꾀했을 때만 해도 중국의 주요 외교 무대는 아시아와 제 3세계였다. 그러나 97년 들어 강택민은 세계 중심부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고 있다. 세계를 움직이는 정상들이 앞다투어 북겨을 찾았으며, 그 자신도 강대국을 찾아가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강택민의 의도는 4월 말 모스크바 크렘린에서 엘친과 회담하며 미국을 겨냥해 ‘다극적 세계 질서를 모색해 나가는 것이 양국 공동의 목표’라고 발표할 때부터 드러났다. 두 나라는 이 회담에서 ‘새로운 세계 질서 구축’ 구상을 담은 공동 성명에 서명함으로써, 국제 사회에서 한 나라가 독주하는 것을 방관하지 않겠다는 뜻을 명확히 밝혔다. 이같은 뜻은 5월에 프랑스 시라크 대통령이 북경을 찾았을 때 ‘국제관계를 지배하려는 어떠한 시도에도 반대한다’고 한목소리를 내게 했다.

 강택민의 외교 스타일은 실리를 챙기면서도 할말은 다 하는 ‘대국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9월에 하시모토 일본총리가 중국을 찾았을 때 강택민은 한창 마무리되고 있던 미·일 방위협력지침 개정 작업과 관련해 “일본에 군국주의 세력이 있으며, 이들이 중·일 관계에 나쁜 영향을 미치고 있다”라고 직격탄을 쏘았다. 특히 그는 외국이 중국의 두 아킬레스건인 인권 문제와 대만 문제를 건드릴 때는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았다.

 강택민 외교는 10월말 워싱턴에서 열린 미·중 정상회담에서 결정에 달했다. 천안문 사태 뒤 냉랭하기만 하던 두 나라 관계는 이를 계기로 반전 되었다. 그의 미국 방문은 많은 화제를 낳았는데, 특히 그가 하와이 주지사 만찬장에서 즉흥적으로 기타를 연주한 일이나 로스엔젤레스 화교 연회에서 경극 노래를 부른 것은 세련되고 활달한 국가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강하게 심어주었다.

 강택민은 미국에서 돌아오자마자 북경을 찾은 엘친과 다시 정상 회담을 열었다. 이 만남에서 가장 큰 성과는 양국간 해묵은 숙제였던 중국 동부 국경선을 확정한 것이었다.

 내년 초 클린턴 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시작으로 강택민의 전방위 외교는 당분간 고속 행진을 계속 할 전망이다.

 하시모토 류타로 일본총리는 색다른 길을 갈 수 있을까.
 전후 일본 외교는 미국의 우산 밑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든든한 미·일 동맹은 일본으로 하여금 ‘안보 무임 승차’를 가능하게 해 주었지만, 한편으로는 독자적인 외교 목소리를 내는 데 한계를 지어 주었다. 그러나 하시모토 총리는 96년 4월 신안보 공동선언으로 미국과 끈을 다시 단단히 고쳐 매고, 이를 뒷심으로 삼아 중국·러시아와 관계 개선에 나서고 있다.

 그는 7월과 8월에 각각 대러시아와 외교 3원칙(정상간 신뢰 강화, 상호 이익 실현, 장기적 관계 발전), 대중 외교 4원칙(상호 이해, 대화 강화, 협력관계 강화, 공통의 질서 형성)을 발표하고 양국에 적극 다가선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올 한 해 하시모토에게 가장 큰 소득이자 과제였던 것은 9월 말 매듭지은 미·일 방위협력지침이었다. 이는 미국과의 동맹 관계를 재정립해 마무리하면서, 동시에 일본이 경제력에 상응하는 군사력을 합법으로 키울 수 있는 교두보로 평가된다. 그러나 아시아 각국에는 일본이 군사 대국화로 나가는 시작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9월에 중국을 방문해 방위협력지침을 이해시키려 했던 그의 시도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96년까지 조어도(센카쿠열도) 영유권 분쟁, 중국 핵실험, 미·일 산안보 선언 등으로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던 양국 관계를 누그러뜨린 것은 큰 성과였다.

 11월 초 크라스노야르스크 휴양지에서 있었던 러시아 옐친 대통령과의 만남은 정상간의 신뢰가 얼마나 중요한지, 또 어떤 식으로 회복되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두 사람은 테이블 위의 정상 회담 보다 낚시를 즐기고 사우나를 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 결과 나온 것은 양국간 북방 영토 분쟁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하기로 했다는 합의였다.

 경제력을 바탕으로 하여 국제 사회에서 정치력을 확보하려고 애쓰는 하시모토 총리의 목소리가 갈수록 커질 전망이다.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에게 97년은 우울하게 시작되었다. 96년 11월 심장 수술을 받은 몸은 그런대로 회복되었지만, 수십 년 동안 품고 있었던 세 나라를 미국 영향권으로 떠나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바르샤바조약 기구 회원국이던 폴란드·헝가리·체코를 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시키려는 미국 뜻을 마지못해 받아들이면서, 옐친은 미국의 독주에 제동을 걸 만한 조처를 취하지 않으면 안되리라고 다짐했음직하다.

 물론 그 역시 세계가 예전과 같이 양극 체제로 되돌아가기에는 자신이 너무 초라하고 상대가 매우 강해졌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주변에는 미국 독주를 두려워하는 비슷한 나라들이 많이 있었다. 2월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과의 만남과 4월 강택민 중국 주석과의 만남은 그같은 정서 바탕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11월 이라크 사태에서 러시아는 뜻하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군사 행동을 일관되게 반대해 온 러시아는 미국과 이라크간의 긴장이 최고조에 올랐을 때 중재에 나섬으로써 국제 사회에 인상적인 외교력을 보여주었다. 예친은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과 친서를 주고 받으며 사태 수습에 나섰고, 이라크 외무장관이 모스크바로 날아가자마자 사태 해결의 실마리가 풀렸다.

 옐친은 아시아에 대한 외교 노력을 기울이는 데도 게으르지 않다. 그의 말대로 러시아는 ‘유라시아 국가’인 만큼, 아시아 나라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이상할 리 없다는 것이다. 중국과는 두 차례 정상회담을 통해 동반자 관계를 강화했고, 일본과도 발을 맞추고 있다. 동남아국가연합(ASEAN) 준회원국 자격으로 이 지역 국가들에 대한 영향력도 놓치지 않겠다는 계산이다.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는 지난 5월 44세로 영국 지도자로 당선된 이래 국민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다. 그에 대한 지지도는 8월에 83%, 9월 말에는 93%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젊고 패기만만한 영국 총리의 외교 역량은 아직 충분히 검증되지 않고 있다.

 블레어는 신유럽 정책이라는 복안을 견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보수당 정부가 유럽 통합 같은 현안에서 한 발을 뺀 채 고립주의 노선을 추구해온 데 비해, 적극적으로 외교 무대에 나서서 영국의 발언권을 회복하겠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노동당 정부가 들어선 지 닷새 만에 로빈 쿡외무장관을 프랑스와 독일에 보낸 것도 이같은 전략으로 분석되었다.

 5월 말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영국을 방문했을 때 쉰 살인 클린턴과 마흔네 살인 블레어는 신세대 정치 시댕의 도래를 선언했다. 그들은 공동 회견에서, 교리보다 이성을 선호하고, 화려한 수사가 아니라 실제 업적으로 평가받는 실용주의적 중도 노선을 밝혔다. 이라크 사태 때도 많은 나라가 미국의 군사 행동을 견제하고 나섰지만, 영국만은 미국을 끝까지 지지함으로써 91년 걸프전 때 대처 총리가 보여준 대미 신뢰를 블레어가 계승할 것임을 시사했다.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이 미국에 대해 갖고 있는 경계심은 뿌리깊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외국 정상들과 회담할 때마다 미국의 독주를 경계하는 발언을 빠뜨리지 않았다. 프랑스 외교 정책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미국 견제라고 간주되리만큼 줄기찬 목소리이다.

 5월에 북경으로 날아가 강택민 주석과 만난 시라크 대통령은 경제성과를 담은 두둑한 보따리를 안고 돌아왔다. 대신 중국의 인권 문제를 어느 정도 눈감아 주었다. 따라서 프랑스의 대중 정책에 실리 쪽으로 돌아선 것으로 평가되었다. 시라크의 발걸음에는 아시아 강국인 중국과의 연대를 통해 유일 초강국을 견제하려는 프랑스의 의도가 실려 있었음은 물론이다.

 시라크는 미국을 견제할 힘을 가진 것은 유럽연합(EU)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10월 이탈리아와의 정상회담에서는 ‘유럽연합이 강력한 정치력으로 미국에 대항할 유일한 방법’ 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그의 대미 정책은 유럽 정책을 통해 발현될 듯하다.

 프랑스의 독자 노선은 유럽과 미국이 만나는 모든 마당에서 미국에게 곤혹스러움을 안겨주며 그때마다 새로운 국제적 긴장을 만들어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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