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통 찬 증권맨들 ‘죽음의 거리’ 헤맨다
  • 도쿄. 채명석 편집위원 ()
  • 승인 1998.0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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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월 스트리트, 가부토죠 ‘붕괴 현장’ 리포트

일본의 윌 스트리트라고 불리는 도쿄 가부토죠부근에 얼마전 ‘도산(倒産) 스트리트’라는 거리가 새롭게 출현했다. 도쿄 증권회관을 끼고 좌우로 5㎞에 이르는 에이타이 도오리. 이 거리에 본사를 두고 있는 닛산 생명보험회사가 지난 4월 업무 정지 명령을 받은 것을 필두로 11월에 들어서 산요 증권·훗카이도 다쿠쇼쿠 은행·야마이치 증권 등이 연속 도산함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다.

장어 요리집 줄줄이 폐업, 우동집만 북적
 그뿐 아니다. 주가가 도산 위험 수위에 가까운 2백엔을 밑도는 은행 15개와 증권회사 12개, 그리고 보험금 지불 능력이 취약한 보험회사 6개의 영업 점포가 이 거리에 밀집해 있어 도산 스트리트의 명부에 등재될 금융기관은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 거리를 지나는 행인들의 모습에서 도무지 활기를 찾아 볼 수 없다. 어깨들 축 늘어뜨린 중년 남성, 영상의 기온인데도 코트깃을 꼭 붙잡고 횡단 보드를 건너는 직장 여성, 거기에 을씨년스런 날씨까지 겹쳐 이 거리는 마치 ‘죽음의 거리’를 연상케 한다.

이 거리의 음식점들에서도 옛날의 활기는 찾아볼 수 없다. 삼스데리카라는 샌드위치집 주인 말에 의하면, 거품 경제 시절에는 가부토 죠의 음식점들이 오전부터 붐볐다고 한다. 특히 주가가 올라갈 때마다 인근 장어 요리집에는 증권맨이 대거 몰려들었다. 장어처럼 주가가 힘있게 올라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증권맨들이 장어 요리를 즐겨 먹었다는 얘기이다.

 그러나 가부토 죠의 장어집들이 주가 붕괴와 함께 하나 둘씩 문을 닫고 대신 들어선 것이 값싼 도시락집이나 우동집, 샌드위치집이다. 기자가 이 거리를 취재하다가 손님이 줄을 선 음식점을 발견한 것은 딱 하나, ‘교토 긴각지’라는 음식점이다.

 30여 명이 늘어선 행렬의 끝에 섰다가 문앞에 도착해 보니 제일 비싼 것이 8백엔짜리 치킨 커틀릿이고, 그 다음이 7백80엔짜리 훗카이도 덮밥과 런치 정식이었다. 이것이 ‘살아 있는 말의 눈알도 빼간다’는 가부토 죠 증권맨들의 오늘의 풍경이다. 값싼 정식집 앞에 무표정한 얼굴로 줄을 지어 기다리는 그들의 모습에서 하늘을 뚫을 것처럼 기세 등등했던 이전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값싼 곳이나마 음식점을 찾는 도산 스트리트의 직장인들은 그래도 운이 좋은 편이다. 도산 스트리트에서 쫓겨나거나 곧 쫓겨날 직장인 수만 명에 비하면 말이다.

 도산 스트리트 맨 위쪽 에이타이 다리 근처에 있는 야마이치 증권 본사 건물은 흉가처럼 사람의 출입이 거의 없었다. 수위 한 사람이 지키고 있는 정문 현관에는 ‘11월25일부로 자진 휴업한다’는 사장 명의 공고와 함께 예탁금을 전액 차질 없이 반환하겠다는 고시문이 붙어 있을 뿐, 도산 보도를 접하고 노도처럼 밀려왔던 고객들의 모습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지금 도산 스트리트의 화제는 7천5백명에 달하는 야마이치 증권의 직원 가운데 과연 몇 사람이나 재취직이 가능할 것인가에 쏠려 있다. 알려진 대로 야마이치 증권은 백년의 역사를 가진 일본 유수의 증권회사였다. 65년의 경영 위기를 계기로 비록 증권계 수위 자리를 노무라 증권에 넘겼지만, 백년간 꾸준히 ‘4대 증권회사’의 일각을 점유해 온 명문 증권회사였다. 그러나 도쿄 대학 출신자들이 경영을 좌지우지하면서 회사 체질이 관료화하고, 일반 고객보다는 법인 위주로 영업하면서 야마이치 증권은 오늘의 도산을 자초했다. 이 도산극의 최대 피해자는 말할 나위도 없이 7천5백명에 달하는 야마이치 증권 종업원들이다.

‘개인 파산’ 여파로 이혼·별거 급증할 듯
 대다수 종업원들은 사장이 텔레비전에 나가 자진 폐업 결정을 발표할 때까지 이 사실을 까마득히 몰랐다. 몰론 주가가 백엔을 밑돌면서 회사가 위험하다는 소문을 듣고 있었으나, 대장성이 재건을 도와주거나 외국 증권회사와 제휴해 경영 위기를 무난히 넘길 것이라고 안심하고 있었다.

 더욱이 그런 소문을 믿고 대다수 사원들은 야마이치 증권의 주가가 백엔을 밑돌자 회사에서 융자받은 돈으로 자사주를 대량 구입했었다. 주가가 단돈 1엔으로 하락한 지금 그 때 융자받은 돈을 반환하려면 퇴직금을 털어 넣고도 터무니없이 부족한 사람이 많다. 또 매월 우리사주 조합을 통해 자사주에 저축해 온 사람들의 저축 통장은 하루아침에 깡통 통장으로 변했다.

 요즘 일본의 주요 신문에는 도산 스트리트의 단말마가 하루도 빠짐 없이 등장하고 있다. 주간지들은 도산 관련 임시 중간호를 발행해 그들의 궁상을 전하는 데 바쁘다. <아사히 신문>이 발행하는 시사 주간지 <아에라> 임시 중간호에 실린 ‘대도산 시대를 헤쳐간다’ 기사에 등장한 야마이치 증권 사원들의 하소연을 들어보자.

 A씨는 입사 8년째인 영업사원. 그는 자진 폐업이 결정되기 1주 전 상사의 지시에 따라 고객 10명에게 야마이치 주식 30만주를 팔았다. 이때의 주가는 주당 1백28엔. 그는 결국 자신의 고객들에게 3천8백만엔이나 손해를 안겨 준 셈이다. 그러나 A씨는 지금 고객의 손해를 걱정할 여유가 없다. 지점 영업을 하다 진 개인 빚이 아직 천만엔 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 돈은 모두 고객의 손실을 보전해 주다가 진 빚이다. A씨는 빚 독촉을 면하기 위해 부인과 이혼이나 별거를 고려하고 있다. A씨는 야마이치 사원 중 약 20% 가량이 이혼이나 별거를 선택할 것이라고 내다본다.

 B씨는 입사한 지 17년인 본사 법인 영업 담당자이다. 그는 법인 영업의 베테랑이기 때문에 몇군데 중소 증권회사로부터 ‘와 다라’는 제의를 받아 놓은 상태여서 재취직에는 큰 문제가 없다. 문제는 거품 경제 시절의 턱없이 높았던 봉급과 보너스만 믿고 동료들과 아파트 투자에 손을 댔다가 지게 된 빚 3천만엔을 어떻게 정리할 것이냐는 것이다. 중소 증권회사로 갈 경우 그의 연간 수입은 현재 1천2백만엔의 약 60% 수준으로 떨어진다. 그래서 그는 ‘자기 파산’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럴 경우 재취직은 물 건너간다.

 야마이치 홍보실에 따르면, 종업원 7천5백 명중 재취직이 가능한 사람은 3천명 정도이다. 야마이치의 컴퓨터 시스템을 개발해 운영해 왔던 야마이치 정보 시스템 사원 6백명 전원을 미국의 컴퓨터 데이터 회사 EDS가 재고용하겠다는 뜻을 밝혔으며 마루배니·이토추 상사·닛산 자동차·히타치 제작소 같은 기업들이 야마이치 사원 재고용을 신청했다. 그러나 이들 기업들의 재고용 대상은 대개 35세이하, 외국 업무 전문가, 영업 전문가, 컴퓨터 기술자와 같은 전문 직종에 한정되어 있다. 따라서 40세가 넘은 중견 사원이나 각 지점에 근무하고 있던 일반 영업사원은 회사 정리 절차가 끝나는 내년 봄 이후에는 완전 실직자가 되어 무작정 거리로 쫓겨날 형편이다. 올해보다 내년 경기가 더 나빠져 도산 회사가 급증할 것이라는 예측은 그들의 표정을 더욱 무겁게 만들고 있다.

‘도산 시대’ 최고 처세술은 전문성 확보
 그렇다면 이런 ‘대량 도산 시대’를 맞아 직장인들은 어떤 자위 수단을 강구해야 하는가. 인재 파견 회사 ‘미넬바 인터내셔널’의 오키가미 가즈오씨는 “먼저 전문 지식을 몸에 익히고 프로 의식을 가지라”고 충고한다. 그에 따르면, 유명 회사에 들어가면 자기 실력을 바르게 평가받을 기회가 별로 없다. 따라서 항상 밖으로 눈을 돌리고 타인과 자신의 실력을 비교하면서 전문 지식과 경력을 쌓아 간다면, 언제든지 재취직의 문이 열리게 된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인재 파견 회사 ‘텐부로스’의 관계자는 “딸 수 있는 자격은 모두 따 두라”고 충고한다. 빅뱅이 시작되어 외국계 회사들이 밀려오면 객관적인 실력을 입증할 자격증 소지자가 유리하다는 이유에서이다.

 한 조사에 따르면, 일본의 직장인 중 자신을 자기 업무의 전문가라고 자평하는 사람은 30%에 불과하다. 나머지 70%는 아무런 목적 없이 부과된 업무를 타성에 따라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그런 제너럴리스트들이야 말로 대량 도산 시대에는 회사와 함께 침몰할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이다. 따라서 항상 목표 의식을 분명히 갖고 일하는 것이 불황과 대량 도산 시대에 대비한 중요한 처세술이라는 얘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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