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예고에 24억 기증한 朴貴姬씨
  • 김현숙 차장대우 ()
  • 승인 2006.05.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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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품 아닌 현대국악 창조??국악인들은 명창 朴貴姬 씨(72ㆍ본명 吳桂花)를 운동가라고 부른다. 우리나라 최초로 여성국극단을 조직해 조선팔도를 떠르르하게 진동시킨 일이나 여자의 몸으로 각처에 사람을 풀어 민요를 채집해 올리게 하거나, 판소리ㆍ단가를 양악 오선지에 옮기는 등 남들이 생각지 못한 일을 해냈기 때문이다. 지난 89년, 평생 모은 재산을 서울 국악예술고등학교에 기증한 일은 그가 해온 모든??운동??의 대미라 할 만하다. 그가 내놓은 시가 24억원짜리 운니동 운당여관은 30여년간 정착지를 갖지 못하고 떠돌던 국악예고를 구로구 시흥동에 안착시켰다. 양악에 밀려 홀대받던 국악이, 정악에 견주어 업심 받던 민속악이 따듯한 안방을 차지한 셈이다. 최근 준공식을 마치고 새 교사에 입주할 채비를 하느라 분주한 박씨는 신입생처럼 마음이 설렌다. 손등까지 정성스레 분칠을 하고 카메라를 맞는 모습은 아직도 그가 무대를 지키는 현역임을 실감케 한다.

 새 교사에서 처음 맞이할 신입생은 몇 회 입학생이 됩니까? 지난 60년 김소희씨하고 관훈동에다 처음 학교를 차렸으니까 올해로 31회째지요. 그동안 관훈동에서 남산으로, 돈화문으로, 석관동으로 떠돌아다녔는데 이제야 마음이 놓입니다.

 이사장직을 끝내 고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시대를 따라가야지요. 이제는 젊은 사람을 앞세울 때입니다. 우리는 뒤에서 잘들 하는가 지켜보면 됩니다. 김소희씨하고 저하고는‘평생이사??입니다.

 60년대는 우리 국민이 먹고 살기에 급급할 때고 우리 음악에 대한 관심이 참 미미할 때인데도 학교 세우실 생각을 하셨군요. 국립 국악고등학교에서 궁중음악 중심의 정악을 가르치고 있지만 민속음악은 따로 가르치는 학교가 없었지요. 돈암동에서 학원을 할 때 국회의원인가 하는 높은 양반이 따님을 데려왔더군요. 유학 보내기 전에 가야금이나 단가를 제대로 가르치고 싶다는 거예요. 한국 사람이 제 나라 노래 한 마디 못하면 창피를 톡톡히 당한다나요. 그래 잘 가르쳐 보내고 나니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 내친 김에 학교를 하나 세워야겠다고 백방으로 쫓아다녔지요.

 국악예술고등학교도 여자끼리 만드시고 국극단도 우리나라에선 처음으로 여자끼리 만드시고, 무슨 여성운동가 같으십니다. 아이고 무슨. 그렇지만 여성국극단을 만든 건 남자들 없이 해보겠다는 특별한 목적이 있었던 게 사실이에요. 그때는 내가 열아홉 살 나던 해인데 한창 단체생활을 많이 했지요. 남자 여자 합해 몇 달씩 팔도를 누비고 다니다 보니 폐단이 많았어요. 모두 청춘이니까 연애를 많이 하는데 애기를 낳아 데리고 다니는 거예요. 좁은 방에 기저귀 널어놓고 복닥대자니 여관 주인들이 눈살을 찌푸리고, 내가 모욕당하는 것처럼 화도 나고 환멸감까지 생기더라구요. 그래서 김소희 임유앵 김경희 씨를 부추겨 여성국악동호회를 만들었는데 인기가 대단했어요. 내가 왕자역을 하고 김소희씨가 공주역을 한〈햇님달님〉공연은 손님을 엄청나게 끌어 모아서 돈을 자루에 담아 메고 다녔으니까요. 남자역을 오래하다 보니 성격까지 활달해져 가지구 여장부니 치마 두른 남자니 하는 소리도 많이 들었어요.

 운당여관을 매입하신 걸 보니 돈을 많이 벌긴 버신 모양이군요. 순조가 내관에게 하사했다는 일곱채짜리 전통한옥이었어요. 58년에 구한말 세도가였던 한상욱씨한테 사서 59년부터 여기서 바둑대회(국수전)도 열고 예술하는 사람, 정치하는 사람이 무시로 들고났어요. 조용해서 손님들이 참 좋아했지요. 저는 안채에서 살았구요.

 국악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 때문에 마음 상하는 일도 있었겠습니다. 나야 처음부터 극단활동으로 출세했지만 다른 여자들은 술집에 나가 노래할 수밖에 없었어요. 나도 기생취급 받은 일이 많았지요. 일본 공연을 갔을 땐데 우리를 초대한 사람이“노래 잘하고 좋은 기생이 누구냐??고 은밀히 물어보는 거예요. ??무엇이 어째, 지금 오찬하자고 해서 가는 거지, 우리를 기생으로 데리러 가는 거냐??고 차를 돌려 버린 적도 있어요.

 남도소리는 호남 출신이라야 제 맛을 낸다는 말도 있습니다만 대구 출신으로 명창이 되셨으니 용하십니다. 요새 젊은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우리 윗대만 해도 경상도국창이 더 많았어요. 박녹주 김초향 이화중선 오비취 신 숙 등 여자 아홉명창이 모두 경상도에서 나왔어요. 판소리는 원래 우조와 계면조 두 판을 다 잘해야 명창소리를 듣는데 산세준령 때문인지 경상도 사람이 양쪽을 다 잘해요. 전라도 사람은 꿋꿋하고 낭자한 우조를 잘하지만 애련하고 섬세한 소리는 잘 못 만들거든요. 그런데 6ㆍ25 나고부터 40년 이상이나 고향에서 가르치는 사람이 없으니까 요새는 아주 가라앉아 버렸지요.

 가야금 병창 예능보유자로 지정받으신 것이 68년이지요. 병창이 대중적 인기는 높아도 정통 판소리를 떠받드는 사람들은 동당동당 하는 가야금에 판소리를 얹어 부르는 걸 못 마땅하게 여기더군요. 그런 낡은 생각이 국악 발전을 막는 큰 폐단이에요. 저도 소시적에는 판소리가 아니면 예술로 여기지도 않고 당연히 판소리 인간문화재로 지정될 줄 믿었어요. 그런데 제가 가야금 병창을 이어주지 않으면 끊어진다면서 문화재전문위원이시던 박헌봉 선생님이 제 손을 잡고 설득하시는 바람에 그리됐어요. 지금 생각하면 참 잘한 거지요. 가야금 병창은 여러 가지 음악을 합류시키는 힘을 갖고 있어요. 판소리 대목이나 민요, 단가를 가야금 반주로 부르니까 부르는 사람은 정말 팔방미인이 돼야지요. 국악이 박제품처럼 처박혀 있어서는 안 되고 현대감각으로 손질되어야 한다는 것도 가야금 병창의 레퍼토리를 개발하면서 절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간문화재로 지정된다는 것은 순도 1백%로 보존해서 계승해 달라는 주문을 받은 게 아닌가요? 저는 인간문화재가 두 가지 책임을 져야 한다고 봐요. 원형 그대로 지켜내는 것하고 또 하나는 자기가 사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일정한 만큼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지요. 참예술가는 창작을 해야 합니다. 선생을 그대로 흉내 내는 것은 할 수도 없거니와 의미도 없어요. 제가 6ㆍ25 나기 전부터 각도의 민요를 채집한 것은 그런 이유입니다. 가야금 병창의 레퍼토리가 너무 없다는 걸 알았거든요. 한 30년간 조선팔도에 사람을 사 보내서 모았는데 1백곡이 넘어요. 그걸 지난 79년에 양악 식으로 오선지에 담아 내놨더니 다들 놀라더군요. 오는 3월쯤에는 민요뿐 아니라 단가ㆍ판소리까지 담아서 두 번째 책을 냅니다.

 신재효는 인물치레 득음 너름새 사설치레를 갖추어야 큰 소리꾼이 된다고 했습니다. 날더러는 남들이 인물치레하고 너름새가 좋다고들 합디다. 판소리로 목성음을 하고 창극하면서 너름새(연기)를 익혔는데 좌세(자태)야 어디 애쓴다고 되나요. 곱게 봐주니까요 고운 거지요.

 국악예고 졸업생 가운데는 김세레나 토끼소녀 양수경 등 유행가 가수로 나서는 사람도 많지요. 어떤 사람은 이맛살을 찌푸리지만 제 눈에는 기특하고 대견하기만 합니다. 김세레나는 제가 채보한 새타령이니 군밤타령을 널리 퍼뜨린 사람입니다. 국악이 대중 속으로 파고  들어야지“여기 있다, 와서 봐라??해서는 발전 못합니다.

 예술가나 교육자로서 큰 이름을 얻으셨습니다만 여성으로서의 삶은 어떠셨습니까? 남편복도 자식복도 없이 고단한 인생이었습니다. 저보고 관운ㆍ재운이 있다고 하지만 남편이 벌어다 준 돈으로 안존하게 살림하는 게 여자의 행복이지요. 사주에 예술가로 되어 있으니 어쩌겠습니까. 다행히 제 수제자들은 다 정식 결혼하여 얌전히 살고 있으니 다 고맙기만 합니다.

 설날에 들음 직한 곡을 추천해주십시오. 단가‘청송영 지나갈 제??하고??적벽가??중에서 자룡이 활 쏘는 대목이 새 맛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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