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미약’ 끝은 ‘창대’
  • 송재우(메이저 리그 해설가) ()
  • 승인 2006.05.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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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 리그 한국인 선수들, 부진 벗고 ‘큰 활약’ 예고

 
2006 메이저 리그 시즌은 아무래도 지난 3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좋은 성적을 낸 한국인 메이저 리거들이 크게 활약하리라는 기대를 걸고 시작되었다. 하지만 일부 전문가들의 지적대로 그때그때 몸 상태에 민감한 투수들은 일반 시즌보다 한 달 이른 몸 만들기에 영향을 받으며 불안하게 출발했다. 이런 걱정은 실제로 대회 종료 후 합류한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현실로 나타났다.

일단 박찬호·서재응·김선우가 불펜에서 시즌을 시작했다. 김병현은 햄스트링의 부상, 최희섭은 보스턴으로의 충격적인 이적 이후 역시 부상자 명단에 오르며 시즌을 트리플 A에서 맞게 되었다. 이들은 모두 WBC에 출전했던 선수들인데, 올 시즌 코리안 메이저 리거 전망이 어둡지 않겠느냐는 섣부른 전망까지 나왔었다.

하지만 시즌이 개막된 지 한 달 남짓 흐르면서 하늘에 잔뜩 끼었던 먹구름이 서서히 걷히고 있다. 우선 박찬호·서재응·김병현이 다시 선발진에 합류하며 초반 부진을 떨어내고 있다. 김선우·최희섭은 마이너에서 전의를 다지며 급격히 페이스를 끌어올리고 있다. 사실 국가의 명예를 걸고 출전한 대회이니만큼 긴장도가 그만큼 높았을 터. 지쳐 있던 심신으로서는 오히려 초반의 잠깐 휴식이 도움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

맏형 박찬호의 경우 5월3일 현재 선발 4번의 등판을 포함 1승 1패 방어율 5.36을 기록하고 있다. 기록상으론 나쁘다. 지난 4년간 보여준 성적과 큰 차이를 느낄 수 없다. 하지만 경기 내용과 구위는 과거의 그것과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소속팀 샌디에이고의 브루스 보치 감독이 “마치 다저스 시절의 박찬호를 보는 것과 같다”라고 말할 정도로 구위가 살아나고 있다. 무엇보다 과거 경기를 시청하는 이의 손에 땀을 쥐게 하던 들쭉날쭉한 컨트롤이 엄청나게 발전했다. 이는 기록으로 그대로 반영되어 30이닝 이상을 투구하면서 볼넷을 단 6개만  허용했다. 9이닝을 완투했을 때 볼넷 허용이 두 개에도 미치지 않은 수치에 그치고 있다. 또 과거 그날그날 컨디션에 따라 들쭉날쭉했던 구속과 공의 움직임도 꾸준하게 나타난다. 올 시즌 박찬호가 가장 안정적인 투구를 할 수도 있다는 조심스런 전망도 나오고 있다.

스프링 트레이닝의 부진과 시즌 초반 부진으로 불펜 혹은 마이너 강등설이 돌던 서재응. 그는 지난 4월29일 샌디에이고 원정 경기에서 6이닝 2피안타 무실점으로 호투하며 시즌 첫 승을 팬들에게 신고했다. 서재응의 가장 큰 무기인 컨트롤이 살아나며 페이스를 끌어 올렸다는 점이 그로서는 제일 큰 수확이다. 하지만 초반에 크게 흔들렸던 다저스 선발진이 안정을 찾아가고 있고 마이너 유망주 빌링슬리나 지난해 선발로 잠시 뛰었던 D.J. 훌턴 같은 선수들이 호투하고 있어 앞으로 2, 3경기 때도 지난번과 같은 안정적인 투구를 해야 한다. 지난해 중반 이후 보였던 리듬만 살아난다면 선발 자리 수성이 크게 어려울 것 같지는 않다는 관측이 나온다.

김선우·최희섭, 5월 중에 빅리그 입성 가능

WBC 마지막 경기였던 대일본전에서 홈런을 허용하며 씁쓸하게 마운드를 내려왔던 김병현은 사실 대회 기간 중 상당히 지쳐 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로서는 부상자 명단에 오른 기간이 차라리 약이 되고 있다. 5월1일 시즌 첫 선발 등판인 플로리다 원정 경기에서 지난 2년 동안 볼 수 없었던 시속 1백50km의 강속구가 나왔다. 마치 애리조나 마무리 시절 구위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의 구위를 뿜어냈다. 꿈틀대는 공 끝에 특유의 떠오르는 업슛이 살아났다. 김병현은 본인 한 경기 최대 탈삼진 9개를 뽑으며 선발로서 처음으로 두 자리 승수를 기대하게 하고 있다.

 
한편 WBC 기간 감기 몸살로 힘들어했던 김선우는 초반 불펜 투수로 세 경기 등판 방어율 19.80이라는 최악의 성적을 남기고 부상자 명단에 올랐다. 하지만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역시 휴식이었다. 잠시 숨을 고른 김선우는 마이너에서 선발로 등판해 6이닝 무자책점으로 호투하며 본연의 모습을 보였다. 이미 애틀란타 원정 중인 콜로라도 메이저 리그 팀에 합류해 있어 당장 5월4일부터 복귀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진 것으로 보인다. 일단 합류해도 불펜에서 시작할 가능성이 높지만 시즌 중 선발 복귀 가능성은 콜로라도의 약한 5선발 상황을 감안하면 거의 확실시된다는 평가이다.

그리고 어쩌면 가장 잔인한 봄을 보낼 것으로 예상되었던 최희섭도 불굴의 의지와 연습 벌레라는 이미지를 지키며 보스턴 트리플A 팀에서 연일 맹타를 휘두르고 있다. 그는 WBC 미국전에서 비록 3점 홈런을 터뜨리며 기세를 올렸지만 활약도가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었다. 예기치 않았던 트레이드로 한동안 전화기를 꺼놓는 등 정신적 충격을 받아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바로 마음을 다잡고 5월2일 현재 16경기에 출장해 3할2푼7리 타율에 3홈런 11타점을 기록하고 있다. 특유의 선구안까지 살아나며 16개의 볼넷으로 4할7푼2리의 높은 출루율을 보이고 있다. 현재 주전 1루수 케빈 유킬리스가 잘하고 있지만 백업 멤버인 베테랑 J.T. 스노가 부진해 빠르면 이 달 안으로 다시 빅리그에 입성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유킬리스의 장타력이 정확도를 많이 쫓아가고 있지 못해 최희섭의 장타에 기대를 걸어볼 만하다.

이들 이외에도 추신수·류제국·이승학·백차승 등이 마이너에서 수준급의 성적을 올리고 있다. 올 시즌 중반부터는 한국인 메이저 리거의 활동은 1994년 박찬호의 메이저 입성 이후 최다가 될 전망이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 성경의 이 구절이 올 시즌 코리안 메이저 리거에 걸맞은 문구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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