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답한 세상 조롱하는 사오정의 ‘딴소리’
  •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1998.08.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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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간.계층간 대화 단절 꼬집는 유머 인기

퀴즈 하나. 사오정이 등장한 작품은? 망설임 없이 <서유기>라고 대답한다면 당신은 ‘쉰세  대’일 가능성이 높다. 신세대라면<날아라 슈퍼보드>를 먼저 댄다.

  사오정이 요즘 장안의 화제이다.<날아라 슈퍼보드>에 나온 사오정을 주인공으로 한 이른바 ‘사오정 시리즈‘가 하루에도 수십 건씩 생산. 유통되고 있는 것이다. PC통신 이용자들은 이미 사오정 시리즈로 유머 난을 ‘도배’한 지 오래이며, 라디오프로그램 진행자들은 ‘새로 나온 사오정 시리즈를 얘기해 드리 겠다‘며 오프닝 멘트를 하곤 한다.

왜, 사오정의 엉뚱한 말이 웃길까
  <날아라 슈퍼보드>는 90~92년 KBS가 방영해 큰 인기를 끌었던 국산 만화영화이다. ‘치  키 치키 차카 차카 초코 초코 초‘로 시작하는 주제가(김수철 작사.작곡.노래)로도 널리 알려진 이 만화영화는 한때 시청률 42.8%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92년 11월29일). 이 기록은 국산 만화 영화 사상 최고 시청률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럿은 벌써 6년 전 얘기이다. <날아라 슈퍼보드>원 작자인 만화가 허영만 씨는 ‘세상에 등장한 지 10년이 다 되어 가는 만화주인공이 왜 갑자기 화제에 오르는지 모르겠다 며  더욱이 이 만화영화에서 사오정은 ‘조연급’ 주연이다. 슈퍼보드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며 무고을 펼치는 미스터 소(손오공)이나, ‘나 어떠셔’ 그런 말이있으셔‘ 처럼 ’~셔'로 끝나는 코믹한 대사로 어린이들의 인기를 독차지한 저팔계에 비하면 사오정은 찬밥 신세나 다름없었다.

  온몸이 쭈글쭈글 주름으로 덮인 외모, 팔순 노파처럼 떨리는 목소리. 가지고 다니는 무기라고는 독나방이나 뿅망치(일명 ‘뼉뼉이’)밖에 없는, 이 볼품 없는 사오정이 무엇 때문에 98년 한국사회에서 유머의 주인공으로 화려하게 부활 했을까.

  우선은 ‘우월성 이론’이라는 전통적인 웃음 이론에서 해답을 찾는 사람이 자기보다 부족 고 못나고 어리석은 사람이 실수를 저지를 때, 사람들은 ‘내가 상대보다 잘났다’는 생각에 웃게 된다는 것이 토마스 홉스의 이론이다. ‘모순성 이론’으로 사오정 시리즈의 인기를 설명할 수도 있다. 기대했던 것과 다른 엉뚱한 결론이 나올 때 사람들이 즐거워한다는 이론이다. 사오정 에게 개성이 있다면 그것은 가는 귀를 먹었다는 사실이다.

주름잡힌 귀가 귓구멍을 덮고 있는 바람에 남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다.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물장구를 치고 있는 사오정 에게 저팔계가 ‘이제 그만 길을 떠나자‘고 재촉한다. 이때 사오정이 대꾸하는 말. “뭐라고 ? 밥을 또 먹자고?”

  그러나 이 같은 이론들이 뒤늦게 부활한 사오정의 인기를 분명하게 설명하지는 못한다. ‘유머는 자기 내부에 감금된 충동의 발로‘ 라는 프로이트의 분석을 떠올리면 더욱 그렇다. 이를 사회로 확장시키면 결국 유머는 잠재된 민중의식을 반영하는 거울이 된다.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최초의 사오정 시리즈가 등장한 것은 지난해 11월께였다. 사오정 형제가 길거리에서 만났다.“형, 목욕탕 가?” “아니, 목욕탕 가.” “응, 난 또 목욕탕 가 는 줄 알았지.“

  문화 평론가들은 여기에서 대화 단절 내지 부재를 읽어낸다. 실제로 그 뒤 등장한 사오정 시리즈들은 공통으로 이 같은 대화 단절을 담고 있다.

  사오정이 군대에 갔다. 때마침 <우정의 무대> 제작진이 사오정이 속한 부대를 찾았다. “장기 자랑 하실 분 나오세요.“ 사회자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오정이 무대에 뛰어올랐다. “무슨 장기를 보여 주시겠습니까?“ 사회자가 묻자 사오정은 의기양양하게 소리친다. “네, 무대 뒤에 계신 분은 우리 어머니가 틀림없습니다.“

한국은 남의 얘기 안듣는 ‘사오정 나라’
  대화 단절은 우선 세데 간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신세대들은 기성세대를 ‘가는 귀먹은 사오정’에 비유한다. 실제로 PC통신에는 ‘우리엄마(담임)는 사오정‘이라는 글이 종종 오다.

  텔레비전을 보는 사오정 에게 동생이 칭얼댄다 “형, 냉장고에 있는 우유 마셔도 돼?” 텔레비전에 정신이 팔려 대답이 없는 사오정. 동생은 사오정을 흔들며 우유를 마셔도 되느냐고 재차 묻는다. 이에 화를 버럭내며 사오정이 하는 말. “조용히 하고 냉장고에 있는 우유나 꺼내 먹어.“

  이 같은 사오정의 모습에서 신세대는 자기 고민을 진지하게 들어 주지 않고 공부나 하라며 채근하는 기성세대를 떠올리는 것이다.

  최근 PC통신에서 ‘뜨고 있는’ 아마추어 유머 작가 이대환씨(28. 작가명 ‘둔남’)는, 사오정 시리즈 자체가 신세대끼리만 주고받는 암호와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진단한다. 실제로 기성세대들은 사오정 시리즈에 대해 ‘그게 무슨 유머냐’는 식의 반응을 보이곤 한다. ‘썰렁함’을 유머의 주된 기준으로 삼는 신세대의 감각을 이해하지 못하면 따라 웃기도 어려운 것이 요즘의 유머시리즈이다.

  세대간 갈등 뿐만이 아니다. 사오정 시리즈는 경제난 이후 증폭되고 있는 계층간 갈등과 의사소통 부재를 조롱하는 ‘지독한 풍자’로도 읽힌다. 이시리즈가 국제통화기금(IMF)한파 직후 등장 했다는 사실에 주목하면 더욱 그렇다. ‘우리 눈물을 닦아 달라‘는 실업자와 서민들의 호소에 정부는 ‘그럼, 닦아 주고말고’ 라며 사정의 칼 날만 닦고 있을 뿐이다 (36쪽 만평 참조).

  ‘사오정 정부’ ‘사오정 국회’라는 말이 유행하는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이다. 여려 번 당적을 바꾼 정치인 박찬종씨는 신세대로부터 ‘사오정 정치인‘ 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기도 했다. PC통신 이용자 김준모씨는 ‘국민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정치인들에게 먼저 사오정 시리즈를 들려주어야한다‘ 고 주장한다.

  대화 단절은 때론 일방적이고 폭력적인해결을 부른다. 레스토랑에 간 사오정 친구들은 ‘나는 콜라’ ‘나는 주스’라며 각각 다른 메뉴를 주문한다. 그러나 맨 나중에 주문하는 사오정은 ‘여기 커피 셋이요“라고 제멋대로 일축할 뿐이다. 국회가 다시 열리고 노.사.정이 얼굴을 맞대도 이들이 민의에 제대로 귀를 기울이지 않는 한 미래는 비관 적일뿐이다. ‘한국 사회에 만연한 의사 소통부재를 직접적인 방식으로 조롱한 최초의 유머 시리즈‘라고 평가 되는 사오정 시리즈는 결국 이 같은 현실을 경고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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