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침없는 몸짓으로 ‘자유’를 말하리라
  • 소성민 기자 ()
  • 승인 1998.08.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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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그라운드 예술인 총집합, 8월25일부터 ‘실험 축제’

패기 만만한 젊은 예술인들이 한국 문화 . 예술계의 지형도를 바꿀지도 모를 ‘봉기’의 날을 기다리고 있다. 예술 각 분야에서 ‘독립운동가’를 자처하는 이들이 뜻을 한데 모아 대형 축제를 계획한 것이다.

  이들이 준비하는 축제의 명칭은 ‘독립 예술제 98‘(Indie Festival 98). 8월25일부터 9월15일 까지 대학로 일대에서 열리는 이 종합 예술 축제에는 11개 부문에서 1백10여 개 팀, 4백 여명의 예술인들이 ‘타자! 비틀자! 놀자!’라는 슬로건 아래 모여들게 된다.

  ‘독립 예술’은 이번 축제 준비 과정에서 생겨난 말이다. 독립 영화(Independent Film)라는 용어의 개념이 확장된 것이다. 독립 예술제는 비슷한 생각들을 가진 젊은 예술인들이 독립 영화제에 참가해 이를 다채롭게 구성해 보려는 시도에서 비롯되었다 (69쪽 상자 기사 참조)

  독림 예술제 98보다 규모는 작지만 비슷한 성격의 예술 축제가 최근 성공적으로 열리고 있기도 하다. 7월1일부터 서울 종로구 사간동 금호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언더그라운드 만화 페스티벌’이 한 달 동안 5천여 관객을 동원하는 성황을 이룬것이다. 8월9일까지 열리는 이 페스티벌은 ‘잔혹’이라는 주제 아래 만화뿐만 아니라 회화 . 사진 . 연극 . 록밴드 공연 까지 망라하고 있다.

  미술관에 전시된 언더그라운드 만화들은 20쪽을 넘지 않는 단편 만화집들이다. 관객들은 전시장 한 켠에 마련된 게시판에 적접 만화를 그려 볼 수도 있다. 여기서 뛰어난 평가를 받은 만화들은 언더그라운드 만화 잡지 <버전 업 히스테리><바나나>에 실리게 되고, 소질이 인정된 사람은 만화가로 데뷔할 수도 있다.

  언더그라운드 만화 페스티벌을 기획한 만화가 신일섭씨(29).그는 기존의 ‘제도권’ 만화 페스테벌이 작품성보다는 캐릭터 상품 판매 따위에 열을 올리는 모습에 환멸을 느껴 이번 행사를 기획 했다고 말했다. 그는 독립 예술제 98의 ‘대한민국 언더그라운드 만화 페스티벌‘에도 참가한다.

  순수 미술 작품만 전시해 온 금호 미술관이 언더그라운드 만화 페스티벌에 문호를 개방해 큰 호응을 이끌어낸 사실은, 보수적인 한국의 주류 문화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독립예술제 98이 한국문화 . 예술계의 중심부인 대학로 일대를 파고들어가 행사를 벌이는 것도, ‘땅밑‘(언더그라운드)에서 소수 마니아들만 상대하던 비주류 예술인들이 ‘땅위’로 올라와 대중들과의 폭 넓은 만남을 시도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세계적으로 유례 드문 대 규모 ‘언더 페스티벌’
  이른바 ‘언더그라운드’ ‘비주류’ 하위 ‘대항’따위의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예술인들이 이처럼 직접 대규모 축제를 주최하는 경우는 섹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세계적 명성을 자랑하는 영국 에딘버러 페스티벌의 ‘프린지(Fringe)페스티벌‘.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의 ’오프(Off)페스티벌‘등이 그나마 비주류 예술인들에게 본 행사장 주면에서 자신들의 세계를 펼쳐보일 기회를 제공하고 있을 따름이다.

  독립 예술제 98의 이규석 집행위원장은 이번 축제가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을 ‘한국 문화 . 예술계가 낳은 구조적 아이러니‘라고 표현 했다. 한국에‘프린지’ 나 ‘오프’ 와 같은 개념의 페스티벌이라도 존재했다면 굳이 독립 예술제를 개최할 필요가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자유로운 소통 공간이 차단된 현실에서 독립 예술 제98은 비주류 예술인들이 감행하지 않을 수 없었던 ‘자기 선언’ 인 셈이다.

  독립 예술제 98에 참가하는 예술인들의 면면만 보아도, 이축제가 얼마나 자유분방한 창작 정신과 빛나는 개성으로 충만한 것인지 알 수 있다. 먼저 90년대 중반부터 언더그라운드 음악의 메카로 떠오른 신촌과 홍대 주변의 라이브 클럽에서 맹렬히 활동해 온 젊은 뮤지션들, 허벅지랜드, 오르가슴 부라더스, 갱통릭, 시봄에 핀 딸기꽃 등 그 이름에서부터 강렬한 개성을 뿜어내고 있는이들은 이제 독립 예술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다.

  언더 뮤지션 볼빨간(27. 본명 서준호), 그는 95년 결성한 록그룹 ‘조쿨’의 드럼 주자로 라이브 클럽에서 활동해 왔다. 병역 문제로 밴드가 잠정 해체디자. 올해초부터 볼빨간이라는 예명으로 혼자 활동하고 있다. 삐삐롱스타킹의 리더 달파란(본명 강기영)을 좋아해 이를 패러디하여 지은 이름 불 빨간은, 자신의 볼이 빨갛다는 뜻을 갖고 있다.

  볼 빨간은 관광 버스 기사 유니폼 같은 특이한 차림새로 ‘테크노 지루박’ 이라는 독특한 음악을 구사해 요즘 라이브 클럽에서 인기가 높다. 그가 이런 음악을 선보이게 된 이유는, 주변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뽕짝 메들리‘ 가락이 언제부터인가 흥겹게 들렀기 때문이다. 그는 단순한 메들리 곡 사이 사이에 테크노 사운드를 가미하여 만든<지루박 돌려요(이박사에게 바침)><사랑의 십자 말풀이>등 자작곡 5곡을 모아 독립 음반을 냈다. 이 가운데 <동천각(중화요리)>이라는 작품은 ‘내가 맛있게 하는 집을 한 군데  알고 있는데...‘어유 거기가 어디에요 알면 좀 자세히 가르쳐 주세요‘ 같은 문답식 가사 전개와 ‘소문났네 소문났어 맛좋은 동천각 신속 배달‘ 같은 노골적인 홍보성 후렴 구로 파격적인 스타일을 보여주고 있다.

  독립 음반사 ‘인디’의 김종휘 실장은 볼빨간의 테크노지루박을 가리켜 “언더그라운드 음악마저도 정형화하는 듯한 기미가 보이자 자신만의 해학성으로 새로운 음악적 전복을 시도한 경우“라고 해석했다. 언더그라운드 세계에서 조차 자기 정체성의 변신을 꾀하는 실험이 거듭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결성된 록그룹 ‘앤’은 ‘언더’에서 ‘오버’로 자연스럽게 부상하고 있는 사례다. 앤의 연주는 난이도가 높으면서도 듣기에는 편안한 리듬을 선사한다. 앤이 비디오 켐코더로 찍은 뮤직 비디오 <러브레터>는 우연히 케이블 텔레비전의 음악 채널에 방영된 뒤 두 달도 안되어 뮤직 비디오 베스트 5에 선정될 만큼 인기를 끌고 있다.

  지난 7월25일 홍대 주변 라이브 클럽 ‘스팽글’에서 만난 한 고교2학년 남학생은 앤이 발표한 독립 음반을 구입해 매일 듣고 있다고 말했다. 벌써앤의 마니아가 생겨난 것이다.

  독립 예술제 98의 ‘인디 콘서트’에는 볼빨가 .앤을 비롯해 녀재 활약하고 잇는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이 총출동한다. 공연만 한 번 보아도 90년대에 들어서서 가장 뚜럿한 성과를 거둔 언더그라운드 음악의 현황을 파악할 수 있다.

  음악 . 영화 . 만화 만큼 자본의 놀 리가 창작의 자유를 옥죄는 분야는 아니지만, 이번 행사에 참가하는 무용 . 미술 등 다른 부문들 역시 ‘독립‘을 추구하기는 마찬가지다. 순수 예술의 ‘엄숙주의’나 학맥 . 인맥 등 갖가지 파벌 따위에 갇혀 버린 창의성을 독립시키려는 것이다.

  ‘가관’은 이화여대 무용학과 동기생 5명이 올해 대학을 졸업하며 결성한 무용단이다. 현대 무용을 전공한 이들은 고교 . 대학은 물론 무용단에 들어가서조차 뻔한 스타일의 춤사위만 되풀이해야 하는 ‘제도권 무용’ 에 환멸을 느껴 왔다. 게다가 예술 고등학교 출신들이 전체 무용학과 학생의 90%를 차지하고, 대학을 마치면 특정 교수들을 따라 끼리끼리 무용단에 입단하는 현실은 인문계고교 출신인 이들에게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가관은 춤출 수 있는 공간만 허락되면 라이브 클럽이든, 야외든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달려간다. 무대 무용만을 고집하지 않는 가관의 열정은 <은하철도999> 같은 4분짜리 창작무용에서도 잘 드러난다. 손가락으로 코앞을 찌르는 코미한 동작이 곁들여진 <은하 철도999>를 본 관객들은 전문 무용수들의 파격성에 놀라면서도 웃음을 참지 못하고 즐거워한다.

  독립 예술제 98에 뛰어든 젊은 미술인들 역시 어떻게 하면 고뇌하는 예술가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대중에게 가깝게 다가설 수 있는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해왔다. 그래서 찾은 대안 가운데 하나가 92년부터 진행되어 온 ‘거리 미술전‘이다. 홍익대 미대 출신들을 주축으로 결성된 미술 창작 그룹 “삐라통‘은 이번 독립 예술제 기간에도 대학로 거리에서 거리 미술전을 벌인다.

  연극 부문에서는 올해 한국 예술종합학교 연극원을 처음 졸업한 1기생들이 결성한 극단 ‘프로젝트 1‘의 창작글 <종이 열대어>가 주목된다.<종이열대어>는 고전 소설 <장화홍련전>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연극원 1기생 출신 연출가 김민정씨(29)에 따르면, 원작에서 억울하게 살해되는 장화와홍련 자매는 이번 작품에서 단순히 선량한 여인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두 자매는 자기 울타리에 갇혀 수동적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자폐증’에 걸린 인간들로 묘사된다. 극의 마지막은 홍련이 종이 열대어를 어항에 넣는 장면이다. 어항은 원작에 서 두 자매가 죽임을 당하는 연못을, 종이 열대어는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인간을 상징한다. 종이 열대어란,물속에 들어가야 살 수 있으면서도 막상 물속에 들어가면 해체되고마는 운명을 표현한 것이다.

  독립 예술제 참가자들은 이처럼 예술에 대한 혈정과 실험 정신으로 가득 차 있다. 그렇지만 이들을 바라보는 기성 세대의 시각은 아직 냉소적이다. 한 예로 독립 예술제 집행위원회는 지난 6월 한국문화예술진흥운(문예진흥원)에 ‘우수 공연단체‘ 지원 기금 2천5백만원을 신청했지만 한푼도 받지 못했다. 문예진흥원의 심사회의록에는 ‘독립이라는 의미’가 인정되지 않는다. 지원 대상이 아니라고 본다‘라고 짤막한 논의 내용만이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문예진흥원의 한 관계자는 심사 기준이 예술성에 중점을 둔 데다가, 처음 시행되는 행사에는 관례적으로 지원을 삼가는 편이어서 독립 예술제를 지원하기 곤란한 상황이었다고 밝혔다.

문예진흥원, 지원 거부...정부는 후원조차 사양
  문예진흥원이 매년 구성하는 심사위원회에는 거의 40~50대 이상의 문화 . 예술계 명망가들이 위원으로 위촉되는데, 이들이 생각하는 독립 예술은 행정 관료들이 생각하는 그것과 별반 차이가 없는 듯하다. 문화관광부도 이번 둑립 예술제에 지원은커녕 ‘후원’ 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다양한 예술적 실험들에 대한 사전 제작 지원이 절실한데도 정부는 이미 성공이 검증된, 따라서 지원이 절실하게 필요하지 않은 분야만 지원하며 생색내는 형국이다.

  대중문화 평론가 김종엽씨는,5달러 가량만 내면 록 카페든 재즈 클럽이든 어디에서나 맥주 한병 마시며 수준 놓은 연주와 음악을 들을 수 있었던 유욕에서 ‘이런 게 바로 문화구나’라고 감탄했던 체험을 갖고 있다. 그런데 한국의 현실은 어떠한가. 일반 음식점에서는 2인 이상의 공연을 금지하고 있는 현행 식품위생법에 따라, 라이브 클럽에서 활동하는 뮤지션들이 범법자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김종엽씨는 대항 문화가 발전해야 주류 문화도 계속 창의성을 발휘 할 수 있는데 한국의 문화 토양은 너무 척박하다고 아쉬워 했다.

  아무런 보수나 지원도 받지 못한 채 자비를 들여 이번 예술제를 준비하고 있는 젊은 예술인들. 그 순수한 열정과 자유로운 영혼 앞에서는 말로만 ‘21세기는 문화 산업의 시대’를 운운하는 기성세대의 허세조차 무색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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