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리 인준 파동, JP가 결단내려라”
  • 이숙이 기자 (sookyiya@sisapress.com)
  • 승인 1998.03.19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위헌 시비에‘인위적 정계 개편’등 연쇄파문예고… 정치권에‘결자해지론’증폭

 김종필 총리서리는 매일 아침 8시20분께면 세종로 정부종합청사에 출근한다. 하지만 3월3일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은 지 1주일이 다 되도록 김종필 총리서리의 공식 일정은 전무하다시피 했다. 기자실에는 연일‘공식 일정 없음’이라는 보도 자료만 휑뎅그렁하게 놓여 있었다. 어느 때보다 일정이 빼곡해야 할 새 정부 출범초기에 김종필서리는 맥없이 손을 놓고 있는 셈이다. 대통령과 장관은 눈코 뜰새없이 바쁜데, 정작 내각의 수장은 한가한 현상. 그 어처구니없는 현상의근원은 바로 총리 지명자 국회인준 무산이었다.

 요즘 여권에서는‘김대중 대통령을 만든 사람도 JP, 김대중 대통령을 망치고 있는 사람도JP’라는 푸념이 나온다. 이 푸념에는 좀체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김종필 총리인준 정국’에 대한 국민회의측의 딜레마가 집약되어있다. 몇몇 국민회의 의원이’정계를 개편해 야당을 혼내주자며 분위기를 선동하고 있지만, 아직 대세를 잡기는 무리다. 여권 내부에서조차 명분과 법리싸움에서 야당에 밀린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 총리파동의 쟁점은 두 가지로 압축된다. 3월2일 국회투표가 유효인지, 무효인지, 또 총리서리 체제가 합헌인지 위헌인지여부다. 그것만 밝히면 교통정리는 쉽다. 여권은 한나라당이 김종필 총리인준을 저지하기 위해 백지 · 공개투표라는 불법을 저질렀으므로 3월2일 투표는 무효이며, 따라서 국정공백을 메우기 위해 대통령이 선택한 총리서리체제는 합헌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한나라당은 2백1명이나 되는 의원이 투표를 마쳤으므로 이 투표는 유효하며, 따라서 이결과에 따라 김종필 총리 인준 가부를 결정해야 한다고 반박한다.

 정치권의 주장이 갈리면서 헌법학자들이나 법조계의 해석도 엇갈린다. 단국대 정석권교수 등은 여권을 옹호하는 입장이다.

 하지만 더 많은 법학자와 율사들의 견해는, 김종필 총리서리체제는 위헌성이 다분하다는 쪽이다. 우선 헌법 정신에 위배된다는 점이 지적된다. 헌법에 따르면, 국무총리는 국회의 사전 동의를 얻어야만 대통령이 임명할 수 있다. 인사가 대통령의 고유 권한인데도 이 조항을 둔 것은 대통령 유고시 그 임무를 대행할 국무총리는 국민의대표인 국회도 납득할 만한 인물어이야 한다는 취지에서다.

“헌법정신 위배 · 법 절차 무시”비판   
두 번째는 절차상의 하자다. 엄연히 국회표결이 진행되었는데, 왜 유고시에만 인정할 수 있는 ‘서리체제’를 가동하느냐는 것이다. 여권은 이 표결이 근복적으로 무효라고 주장하지만, 그 근거가 취약하다. 국회 법사위원회의 한 전문위원은 무기명 비밀투표가 자신의 표를 유효로 인정받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라면서, 몇몇 야당의원이 투표지를 공개했다면 그 표만 무효로 처리하면 되지, 투표 전체를 무효로 하자는 것은 난센스라고 말했다. 국민회의의 한 의원도“기표소에 1초 머물렀든, 1시간 들어가 있든 그것은 투표자의 선택에 달려있다”라면서, 여권의 무효주장에 무리가 있음을 인정했다. 따라서 이 투표함을 바로 개봉하든지, 아니면 그날 투표하지 못한 의원들에게 추가투표 기회를 준 뒤 개표결과에 따라 총리인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정직한 법 준수’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지적에도 불구하고 여권은 재투표를 하든지 아니면 서리체제를 강행하겠다는 강경방침을 고수하고 있다.

 김종필 총리서리체제는 위헌시비를 불러일으킬 뿐 아니라 심각한 국정공백을 초래할 위험성조차 내포하고 있다. 어느 시점에서든 김종필 총리 인준이 부결될 경우 그동안 JP가 총리 서리자격으로 결정한 모든 국사가 무효 논쟁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김종필 총리 서리가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사람을 쓰고 예산 집행을 결정했는데, 갑자기 총리서리가 무자격자라는 판정이 내려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그렇게 될 경우 대통령이 총리서리를 통해 행한 통치행위까지도 줄줄이 위헌시비에 휘말릴 수 있다. 이 점을 들어 한나라당은 현재 총리직무집행 정지 가처분신청, 권한쟁의심판 청구 등 강력히 법적대응을 해가고 있다.

 김종필총리 인준파동은 제2,제3의 파문도 예고하고 있다. 다름 아닌‘인위적인’정계 개편 조짐이다. 물론 여소야대 정국에서 정계개편은 예정된 순서라는 것이 중론이다. 하지만 요즘 여권 분위기를 보면 총리인준파동을 하루바삐 정리하기 위해 무리가 있더라도 앞당겨 정계개편을 시도할 태세이다. 청와대가 정계개편에 대한 여론조사를 의뢰해 발표하고, 국민회의 · 자민련 의원 총회에서‘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권이 안정된 의석을 확보해야 한다’는 말이 스스럼없이 나오는가 하면, 안기부와 검찰이 북풍수사를 계기로 야당측을 은근히 압박해 가고 있는 것이 그 신호탄이다. 이에 대해 야권이 정치보복이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어 가뜩이나 냉랭한 정국은 더욱 살벌해질 전망이다.

 도무지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여야관계. 하지만 정작 그 태풍의 눈인 김종필 총리서리는 어떤 해결의 열쇠도 내놓을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국회법에 따라 정당하게 재투표가 이루어진다면 그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겠다고 말한 것이 고작이다. 그로서도 속수무책인 셈이다.

 이제 정국의 앞날에는 두 갈래 길이 있다. 똘똘 뭉친 한나라당이 재투표를 당장 받아들여 김종필 총리인준을 부결시키든지, 여권이 정계개편을 해‘서리’꼬리표를 떼어 주는 길이다.

 그러나 정가에서는 제3의 대안, 즉 공동정부와 그가 만든 김대통령의 장래를 위해 김종필 총리서리 스스로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나는 것이 모양새가 좋지 않겠느냐는 주장이 암암리에 힘을 얻어가고 있다. 결국 김종필총리 서리정국을 풀 사람은 김종필 본인밖에 없다는 얘기다. 결자해지(結者解之)라는 말은 김종필 총리서리가 평소 즐겨 쓰던 말 중의 하나다
                                                                    .   李叔伊 기자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