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의 목멘 외침 “그 감옥에도 햇살을”
  • 박성준 기자 (snype00@sisapress.com)
  • 승인 1998.04.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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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사면 제외된 양심수 가족들, 조건 없는 석방 호소

올해 일흔 살인 조순선씨는 벌서 14년째 서울 · 광주 · 안동을 오르내리며 유랑 아닌 유랑 생활을 하고 있다.  서울은 출가한 딸의 집이 있는 곳이며, 광주는 남편(75년 작고)과 더불어 가정을 꾸리며 칠십 생애 중 절반이상을 살아온 제2의 고향이다. 경북 안동에는 간첩단 사건(이른바 구미 유학생 사건)에 연루된 그의 아들이 있다.

 아들 강용주씨는 85년 의과대학에 다닐때 간첩혐의로 붙잡힌 뒤 무기형을 선고받아(93년 20년형으로 감형)안동교도소에 14년째 수감되어 있다. 조씨는 서울과 안동을 오가며 아들의 옥바라지와 구명운동을 하느라 ‘정주(定住)생활’을 일찌감치 포기했다.

 강용주씨에 대한 조씨 부부의 애정과 기대는 남달랐다. 가정 형편이 어려웠지만 9남매 중에서 유일하게 대학, 그것도 의과대학에 진학했기 때문이다. 부모에게 강씨는 집안을 일으켜 세울 대들보 같은 존재였다.

 조씨 일가족에게 불행의 조짐이 나타난 때는 80년5월. 고등학생 때 시민군 일원으로 5 · 18을 겪은 강씨는, 대학에 진한한 후 본격적으로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가 본과 1학년 때인 85년 체포되었다. 그를 체포한 사람들은 운동권 학생을 검거하는 경찰이 아니라, 간첩 색출을 주요 임무로 하는 안기부 요원이었다. ‘집안에 돈이 없는 데다 안기부측 압력까지 겹쳐’변호사 도움이 전혀 없이 재판절차를 마친 강씨는 86년9월 간첩죄로 무기형을 확정 받고 안동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옥바라지에, 병구완에… ‘끝없는 고난’
 아들이 간첩이건 말건, 14년을 하루같이 아들의 석방만을 바라며 인고의 세월을 살아 온 조시였지만, 그도 끝내 슬픔을 억누르지 못하고 목 놓아 운 적이 두 번 있다. 첫 번째가 95년 <깊은 물에 큰 배 뜬다>는 제목으로 아들의 서한집이 나왔을 때이다. 서한집에는, 강씨가 재학 시절 학생운동을 같이 하며 사랑을 느꼈던 한 여학생을 그리는 대목이 있다.

 그 여학생은 어머니 조씨도 잘 아는 학생으로, 아들과 함께 옥살이하다가 먼저 출감하여 ‘아들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다른 배필을 만나 결혼했다. 조씨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원치 않는 이별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아들의 불우한 처지가 한스러워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두 번째는, 96년 영화감독 여균동씨가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로부터 의뢰를 받아 조씨 모자의 기구한 운명을 소재로 35mm영화 <외투>를 제작햇을 때이다. 12분짜리 이 영화에서 조씨는, 실제 상황과 다름없이 감옥에 간 아들을 12년째 기다리는 양심수의 어머니로 출연했다. 영화는 아들의 친구가 단 하루 동안 감옥에 간 친구 대신 어머니(조선순씨)를 위해 아들 노릇을 해준다는 줄거리였다. 어머니가 아들 친구와 술 한잔을 기울이며 ‘모자간의 회포’를 푸는 마지막 장면을 촬영할 때, 조씨는 물론 출연진과 제작진 모두 눈물을 흘렸다.

 기다림과 안타까움, 슬픔과 무력감, 분노와 억울함 등은 결코 영화 <외투>의 주제어도, 조씨 모자만의 한맺힘도 아니다. 지난 3월13일 건국 이래 최대였다는 정부의 특별 사면에 대해 대다수 양심수와 그의 가족들이 한결같이 느끼고 있는 아픔이다.

 남편이 공안 사건에 휘말려 복역한다는 이유만으로 교직 임용을 거부당한 여성, 약혼식만 겨우 올리고 약혼자가 출소할 날만 기약없이 기다리는 여성, 자기 몸도 성치 않은데 암으로 고생하는 시어머니를 병구완하면서 남편 옥바라지에 쉴 날이 없는 여성, 아버지가 간첩 누명을 쓴 탓에 자신도 안기부에 끌려가 온갖 고초를 겪고 끝내는 실형까지 선고받은 아들과 딸들…. 양심수 가족들이 사는 모습은 고난의 점철, 그 자체이다.

 91년 사노맹 사건으로 구속되어 무기형을 선고받은 ‘얼굴 없는 노동자 시인’박노해씨의 부인 김진주씨도 그중 한 사람이다. 남편과 같은 사건에 연루되어 4년간 옥살이했던 김씨가 맨처음 마주친 것은, 비록 초기이기는 했지만 직장암에 걸려 수술을 기다리고 있는 시어머니의 애처로운 모습이었다. 수술은 실패를 거듭해 3년에 걸쳐 일곱 번이나 하고서야 겨우 끝났는데, 김씨는 시어머니 병구완하랴, 남편 옥바라지와 구명운동을 하랴 동분서주하는데 3년을 고스란히 바쳤다.

 92년4월 사노맹 3차 사건대 구속되어 3년형을 선고 받았던 전경희씨는 9년째 약혼자가 출소하기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그이 신랑감은 서울대 법대 출신으로, 사노맹 중앙위원으로 활동하다가 검거된 백태웅씨. 86년 한 사회과학 출판사에서 직원과 아르바이트 대학생 사이로 만난 두 ‘동지’는 함께 노동 현장에 뛰어든 것이 계기가 되어 연인이 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자유세상’에서 함께 한 시간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백씨는 92년4월 15년형을 선고받고 원주교도소에서 복역 중이고, 전씨는 3년형을 마친 뒤 95년 청주여자 교도소에서 출소했다. 전씨는 김진주씨와는 언니 · 동생하는 사이로, 김씨와 함께 약혼자의 조속한 석방을 위해 백방으로 뛰고 있다.

 양심수 가족 중에는 부모가 관련된 사건에 연루되어 자녀들까지 옥살이한 사례도 여럿 있다. 92년 남한조선노동당 사건으로 구속된 손병선 · 손민영부녀와, 94년6월 국가보안법상 이적행위 혐의로 구속된 안재구 · 안영민 부자가 대표적이다.

 4 · 19세대이자 평화통일자문회의 상임위원을 지냈고, 89년 민중당 조국통일특별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한 손병선시는 92년9월,노동당에 입당해 친북활동을 한 혐의로 안기부에 불법 연행되엇다. 딸 손민영씨는, 같은 해 민중당에서 아버지 일을 돕다가 함께 구속되었다.

 딸 민영씨는 5년 형기를 마치고 지난해 10월 출소했으나, 수감 중에 얻은 관절염고 갑상선 기능 항진 · 우울증 · 기억력 감퇴등으로 몸이 크게 망가졌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손씨 부녀가 구속 · 재판 · 수감되는 과정에서 손씨의 부인과 부모가 충격을 받아 차례로 사망했다는 사실이다. 딸 민영씨는 그의 어머니가 담도암을 앓고 있었는데, 어먼 역시 수사 당국의 추적을 받아 병원에 갈 기회를 놓쳐 사망했다고 주장한다.

 남민전 사건(79년)으로 10년동안 옥고를 치르고 석방되었다가 94년 구국전위 사건으로 재수감된 안재구씨도 손병선씨 가족처럼, 가장 G나 사람 대문에 일가족 모두가 고초를 겪은 경우이다. 안씨는 남민전 사건이 발생하기전까지만 해도 미분기하학 분야에서 세계적ㅁ여성을 얻고 있던 수학자이자 대학 교수였다. 그가 반국가 단체 구성 · 국가기밀누설 · 금품수수외 간첩활동 혐의 등 어마어마한 죄목으로 안기부에 체포된 것은 94년6월14일 새벽, 자신의 시무실에서 수학관련 저서를 마무리하던 때였다. 안씨의 가족은, 그가 안기부에 연행된 지 보름이 넘어서야 행방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무렵 안씨의 막내 아들 안영민씨는 아버지의 모교인 경북대 수학과에 다니고 있었다. 영민씨는 기말고사 기간에 학교앞에서 영문도 모른 채 체포되었는데, 경찰청에서 약 20일간 조사받으며 아버지의 활동에 대해 허위로 자백하기를 강요받았다. 영민씨는 재학중 학생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경찰의 수배를 받다가 93년 2월 김영삼 대통령 취임 때 취해진 수배 해제 조처 덕분에 당국에 자진출두해 불구속 처분을 받고 복학한 전력이 있었다. 그는 결국 불구속 처분때 확정되었던 2년형과 구속 수사 기간을 합쳐 2년4개월 실형을 살고 지난해에 풀려났다.

생계마저 속박하는 ‘양심수 가족’굴레
 안씨 부자가 구속되어 수사를 받던 때는 국내에서 이른바 ‘주사파 파동’이 휩쓸던 시기였다. 안재구씨의 딸 안소영씨는  “감옥 문을 나와 10여년만에 강단에 다시 섰을 때 아버지는 어린애처럼 좋아하고 학문적 의욕도 넘쳤다. 그런 아버지가 94년 다시 간첩죄로 잡혀 들어가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우리 가족 모두는 당국의 주사파 바람몰이에 철저하게 희생당했다”라고 주장한다.

 ‘양심수가족=죄인’이라는, 연좌제에 뿌리를 둔 사회의 그릇된 인식은 양심수 자신은 물론 가족의 생계마저 위협하기 일수다. 92년 가을에 터진 남한조선노동당 사건 관련자 장창호씨(한양대 78학번)의 아내 차정원씨 사례가 그중 대표적이다. 서울교대 출신인 차씨가 장씨를 만나 결혼한 것은, 90년6월 남편 장씨가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노동상담원으로 일할 때였다. 장씨는 결혼 후 산업선교회 일을 그만두고 참사랑회관이라는 노동상담소를 운영하려 했다가 ‘뭔가 낌새가 좋지 않아’ 아내 차씨와 함게 충북 제천으로 내려가 의류행상등을 하며 생계를 꾸렸다. 그곳에서 예쁜 딸도 낳았다.

 장씨가 기관에 연행된 것은, 아내 차씨가 아이를 낳은지 사흘 뒤, 남편이 감옥에 갇히자 차씨는 어떻게 해서든 살아가자는 각오로 복학을 서둘렀고, 95년 초등교원 임용 시험을 치러 합격 통지까지 받았다. 그러나 교사가 되어 생계를 이어 가려던 차씨의 계획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6개월 넘게 기다려도 아무 연락이 없어 교육 당국에 문의했지만 ‘보안심사위원회가 당신의 신원을 조회했는데, 남편에게 문제가 있어 제외했다’는 대답을 들었을 뿐이었다. 차씨는 곧 행정심판을 청구했으나 기각 당했다.

 학습지교사 · 학원강사를 전전하고 있는 차씨는 최근 이 문제로 행정 소송을 진행 중이며, 이제는 제법 자란 일곱 살바기 딸과 함께 한달에 한번씩 대전교도소로 남편을 찾아간다. 차씨는 “남편 문제도 문제이지만, 이를 빌미로 교사 발령을 하지 않는 당국의 조처는 사실상 연좌제를 적용한 것이어서 명백한 불법이다”라며 목소리를 높인다.

 양심수와 그 가족에 대한 당국의 태도는 때때로 ‘피도 눈물도 없을 만큼’비정하다. 69년6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이후 지금까지 29년째 수감되어 있는 장기수 양정호씨의 사례가 그렇다. 양씨는 6 · 25때 국군으로 참전했다가 북한 인민군과의 교전에서 가까스로 목ㅎ숨을 건진 후 북한에서 결혼해 정착했다. 그는 69년 북에 처자를 두고 남으로 잠입한 이른바 ‘남파 간첩’인데, 어머니가 계신 고향을 찾았다가 기관에 체포되었다. 그가 그리운 어머니를 만난 것은 딱 한번. 89년 수감 생활 중 당국이 양씨의 전향을 유도하기 위해 만남을 허락한 덕분이었다. 그러나 그는 정작 모친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다. 집안의 장님이니 장례식에 참석하게 해달라는 양씨 가족의 귀휴 요청을 ‘사유가 되지 않는다’며 교도소 당국이 거절했기 때문이다.

 역대 정권에서는 양심수에 대한 감형 · 사면 · 복권은 물론이고, 심지어 귀휴를 허가하는 데도 전향서(반성문)를 냈느냐 안냈느냐를 결정적 잣대로 삼아왔다. 지난 3월13일 있었던 특별사면에서도 이같은 기준은 여지없이 관철되었다. 4백명 가까운 양심수에 대해 ‘석방불가’결정을 내리면서 ‘재범할 우려와 체제 전복 위험성이 있다’고 결정 이유를 대는 일도 되풀이 되었다.

 이에 대해 대다수 양심수 가족은 냉전적 사고의 연자이라고 본다. 이들은 또 전향서 한 장과 사상 · 양심의 자유를 맞 바꿀수 없다고 생각한다. 양심수 가족들이 변화한 상황을 인정하면서도, 3 · 13사면에 대해 ‘과거 정권의 구태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3월19일 오후 2시께, 서울 탑골공원 앞에서는 3 · 13사면 조처 이후 처음 열린 민가협 주최 ‘목요집회’가 진행되고 있었다. 봄비가 하루 종일 내렸지만 양심수 가족들은 보랏빛 수건을 머리에 쓰고, 양심수를 석방하라는 피켓을 든 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들은 막 여당 당사로 몰려가 추가사면을 요구하고 돌아온 참이었다. 3 · 13사면조처의 성토장으로 변해 버린 이 목요 집회가 1시간 넘게 진행되는 동안 간절한 외침이 빗소리와 함께 듣는 사람들의 가슴을 적셨다.

 “내 남편, 우리 아이는 왜 안 풀려 나나요.” 목요 집회는 변함없이 계속됩니다.  
                                                                      朴晟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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