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섬 ‘4월의 비극’아직 끝나지 않았다.
  •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1998.04.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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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3발발 50주년/제주 사람들, 피해 의식 여전

지난해 제주도의회 소속 4 · 3피해신고센터에 한 할머니가 찾아왔다. 도의회가 4 · 3특별위원회(4 · 3특위)를 구성하고 피해신고를 접수하기 시작한 것은 94년. 그로부터 3년이 지나서야 안인순씨(75. 북제주군 애월읍 하귀2리)가 이곳을 찾은 것이다.

 안씨의 사연은 기박(奇薄)했다. 해마다 12월28일이면 안씨는 북제주군 애월읍 수산리를 찾는다. 50년전 12월28일에 죽은 동서(문정선 · 당시 21세)가 이곳에 묻혀 있기 때문이다.

 안씨 집안의 비극은 시동생 홍남기씨로부터 비롯되었다. 광복과 함께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시동생 홍씨는 ‘애월면에서 머리 좋기로 소문 난’수재였다. 그러나 4 · 3이 터지면서 홍씨는 ‘당(黨)활동에 간여하고 있었던 듯’무장대를 따라 한라산으로 들어갔다.

 홍씨가 입산하고 나서도 그 해 12월까지는 큰 문제가 없었다. 사건은, 임신 중이던 동서가 친정(하귀리 감은동)에 몸을 풀러 가면서 터졌다. 보릿짚을 깔아 놓은 방에서 배를 감싸안고 막 진통을 시작하던 동서에게 이른바 ‘하귀특공대’가 들이닥친 것이다.

 특공대란 4 · 3이후 경찰을 보조하기 위해 마을별로 구성한 청년조직을 말한다. 당시 감은동에 살던 목격자에 따르면, 이 특공대 소속2명은‘(입산자 가족은)종자를 말려야 한다’며, 마을 뒤편 원뱅디(‘뱅디’는 너른 들판 따위를 가리키는 제주도 방언)로 문정선씨를 끌고 갔다.

 소식을 듣고 안인순씨가 달려갔을 때 동서는 가슴 여덟 군데를 포함해 모두 열네 군데를 철창에 찔려 숨을 거둔 뒤였다. 하문에는 나오다 만 아기가 걸려 있었다. 안씨는 그 자리에 동서의 시신을 묻었다. ‘남들 눈이 무서워’대충 흑만 덮은 가매장이었다.

 학살의 ‘광풍’이 어느 정도 잠잠해진 2년뒤 안씨는 심방(무당)을 불러 굿을 했다. 꿈속에 자꾸만 동서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굿이 있던 날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굿을 구경하던 열두 살짜리 조카딸이 갑자기 안씨에게 ‘형님’하며 매달린 것이다. 그 말투며 몸짓이 영락없는 생전의 동서였다. 신이 들린 것이었다.

 조카의 몸에 실린 영혼은 ‘배를 갈라 달라’고 간절하게 호소했다. ‘아기가 다리 사이에 걸려 있어 걸을 수가 없고, 저승에서도 받아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영혼은 또 결혼식 때 하객으로 왔기에 술도 따라 주고, ‘오라방’(‘오빠’를 뜻하는 제주 방언)이라고 부르며 따르던 사람이 자기를 죽였다며 몸부림쳤다. 굿을 치른 뒤 안씨는 동서의 시신을 지금의 무덤 자리로 옮겨 제대로 수습해 주었다. 핏덩이도 빼내 곁에 묻어 주었다. 고추가 선명한 사내아이였다.

피해자들, 연좌제 걱정해 아직도 신고 기피
 사실 안인순씨 사연 정도는 제주도 사람들 사이에서 특별한 얘깃거리가 되지 못한다. 안씨의 동서보다 더 잔인한 방법으로, 더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사람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제서야’입을 열수밖에 없는 안씨 같은 사람들의 속사정이다.

 제주4 · 3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87년6월 항쟁이 있고나서였다. 사회전반의 민주화가 진전된 그 후 10년간 4 · 3사태, 4 · 3폭동, 4 · 3민중항쟁, 4 · 3학살 등 용어의 혼란이 상징하듯 그 성격을 규명해 보려는 논의도 잇따랐다. 93년부터는 관(官)이 여기에 가세했다. 앞서 말한 제주도의회 4 · 3특위가 그것이다.

 그렇게 10년 세월이 흘렀는데도 이제껏 침묵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안인순씨는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지난해 1월 제주도의회는 <제주도4 · 3피해조사보고서-수정 · 보안판>을 펴냈다. 여기에는 94~95년 2년간 제주도의회에 접수된 4 · 3희생자 1만4천5백4명의 명단이 실려 있다. 4 · 3특위 강덕환 간사는 보고서가 나간 뒤 1년이 지난 지금가지도 하루평균 10통 가량 추가 신고나 문의전화가 걸려온다고 말했다.

 이들 중에는 일가족 전체가 몰살당해 먼 친척이 뒤늦게 신고해 온 경우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남아있는 피해 의식 때문에 신고를 꺼리는 사람 또한 만만치 않은 숫자라는 것이 강덕환 간사의 말이다.

 안인순씨는  70년대까지도 1년에 몇 차례씩 ‘시동생에게서 연락이 없었느냐’고 찾아오던 경찰을 기억하고 있었다. 89년부터 ‘4 · 3은 말한다’(초창기 제목은‘4 · 3의 증언’)시리즈를 장기 연재하고 있는  <제민일보> 4 · 3특별취재반의 김종민 기자는‘농민보다는 공무원 · 사업가처럼 사회적으로 명성을 얻은 사람일수록 4 · 3피해신고를 기피하는 경향이 잇다’고 분석했다. 연좌제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다.

 한 예로 아버지가 토벌대에게 죽은 홍문평씨(제주시 일도2동)는 한국전쟁이 나자 육군에 입대해 항공학교 조종사 모집 시험에 합격했다. 그 후 1년에 백회이상 출격하는 기록도 세웠다. 그러던 어느 날 특무대에서 홍씨를 부르더니, 아버지 일을 이야기하면서 더 이상 조종을 못하게 했다. 홍씨는 노태우대통령 시절 자신의 작은 아들이 ROTC에 합격하고도 들어가지 못한 이유 또한 연좌제 때문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4 · 3은 말한다>에서).

“제주사람들 ‘정신적 분열’앓고 있다”
 이번에 ‘4 · 3 50주년 기념사업추진범국민위원회’에 참여한 한 제주출신 교수는 친척의 거센 항의로 곤욕을 치렀다. 그런 데 끼면 평판이 나빠진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그 이면에는 ‘친척들에게 행여라도 해 끼칠 일은 하지 말라’는 경고가 숨어 잇는 듯했다고 그 교수는 씁쓸해 했다.

 4 · 3 반세기를 맞은 올해 제주지역 시민 · 사회단체들이 4 · 3의 진상을 규명하는 일 못지 않게 제주도민이 앓고 잇는 후유증에 관심을 돌린 것은 이 같은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제주4 · 3연구소 김창후 이사는 이를 ‘목소리만 높였던 지난 10년에 대한 반성’이라고 표현했다.

 이와 관련해 눈길을 끄는 것이 제주토박이 다큐멘터리 감독 김동만씨(31 ·스튜디오21 대표)의 새 작품 <본풀이>이다. 이 작품에는 4 · 3으로 인해 육체적 · 정신적 후유증을 앓고 있는 네 사람이 등장한다. 4 · 3때 총을 맞아 턱을 잃은 진아영 할머니, 당시 부모를 잃었으나 뿌리를 찾으려는 일념으로 아버지의 본적(전남 영암)을 찾아 헤매는 김복남씨 등이 그들이다.

 김동만씨는 이번 다큐멘터리를 찍는 동안‘<인간시대>라도 만들겠다는거냐’는 농담 섞인 비아냥을 감수해야 했다. 이미 <잠들 수 없는 함성,4 · 3항쟁>이라는 정통 역사 다큐멘터리를 제작했고, 이 작품 때문에 현재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어 있는 김씨의 전력에 비추어 이번 작품이 ‘너무 말랑말랑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었다.

 이에 대한 김씨의 해명은 간단하다. 지금 현재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아픔의 정체가 무엇인지 밝혀지지 않고서는, 백년 뒤에도 4 · 3에 관한 논의는 제자리걸음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김씨는 제주사람들의 아픔을 이해하는 핵심단어로 ‘레드콤플렉스’,그리고 이 때문에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섞인 경험을 지목했다.

 연좌제에 대한 피해의식은 레드콤플렉스와 바로 이어져 있다. <제민일보> 4 · 3특별취재반은 최근 증언채록에 가장 애를 먹은 때로 이른바 ‘황장엽 리스트’가 연일 언론에 보도되던 시기를 꼽는다. 증언자들이 ‘세상이 다시 어지러워지면 내말이 문제가 되지 않겠느냐’며 증언을 기피했다는 것이다. 이들의 걱정에는 역사적인 근거가 있다. 제주 사람들은 4 · 19직후 국회가 구성한 ‘양민학살사건 진상조사특위’에 출석해 증언했던 이웃이 쿠데타로 정권이 바뀐 다음 치도곤을 당하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황상익 교수(서울대 의과대학 · 의사학교실)는 최근 제주 사람들의 정서를 정신의학 관점에서 분석해 눈길을 끌었다. 그에 따르면, 제주 사람들은 병들어있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억압 · 부정 · 인격분리 · 반동형성 등 온갖 심리적 장치를 동원해야 했기 때문이다.

 황교수는 과거에 대한 억압과 부정이 제주 사람들의‘인격분리’로 이어졌다고 분석했다. 4 · 3이후 많은 제주인이 고향을 등져야했다. 또는 고향에 남아서도 죽은 부모의 존재를 깡그리 잊고(잊으려고 노력하고)자식들에게 이를 말하지 않았다. 이처럼 자신과 후손을 고향과 조상으로부터 분리 · 단절하는 것이야말로 인격분리의 한 유형이라는 것이다.

 더 비극적인 심리기제는 ‘반동형성’이다. 황교수는 제주청년들이 한국전쟁 당시‘귀신 잡는 해병’이 되어 ‘빨갱이소탕’에 앞장선 것이나, 4 · 3당시 빨갱이 누명을 쓰지 않거나 벗으려고 이웃을 고발하는 등 토벌대의 앞잡이 노릇을 했던 행위를 반동형성의 소산으로 보았다.

 <제민일보>특별취재반이 최근 펴낸 <4 · 3은 말한다> 제5권은 제주 사람들이 이처럼 정신적인‘분열’을 앓을 수밖에 없었던 정황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할아버지와 손자를 마주 세워놓고 서로 ‘뺨때리기’를 강요(구좌면 월정리)△부모형제가 총에 맞아 죽을때 그 가족에게 만세를 부르고 박수를 치도록 강요(표선면 가시리)△장모와 사위를 대중이 모인 가운데 관계를 갖게 하고 총살(국회‘양민학살 진상규명특위’조사당시증언) △토벌대에게 가족을 잃은 사람이 주도해‘산과 내통했다’고 의심받던 같은 동네 사람3명을 주민들이 돌로 때려죽임(안덕면 서광리)등이 그것이다.

정부‘4 · 3특별법’제정해 환부 치료해야
 따지고 보면 제주 사람들의 독특한 투표행태 또한 이 같은 ‘피의 기억’에서 말미암는다는 것이 김석준 교수(제주대 · 사회학)의 지적이다. 제주도는 ‘무소속의 천국’으로 알려져 있다. 역대 국회의원선거(48~92년)에서 뽑힌 국회의원 35명 가운데 무려 17명이 무소속이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남들보다 앞서지도 처지지도 말라’는, 4 · 3이후 형성된 제주 사람들의 독특한 처세관이 이같은 결과를 낳았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김석준 교수는 그보다는 제주 사람들의 지속적인‘친여성향’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지적했다(무소속으로 당선된 국회의원 또한 대부분 여당으로 변신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결과는 62년과 80년에 있었던 국민투표에서 제주도가 전국 최고의 찬성률을 보인점이다(그것도 전국평균보다 각각 10.9%와 4.5%포인트가 높은 압도적 찬성이었다). 김교수는 군대의 힘으로 정권을 장악한 집단이 강력한 폭력을 배경으로 사회를 장악해가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들 시기의 공통점을 찾았다. 이 같은 폭력의 승리가 제주 사람들에게 4 · 3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고, 그 결과 4 · 3으로 형성된‘순응적 적응의 정체성’을 발현하게 했다는 것이 김교수의 해석이다.

 이 같은 현상들은 개인뿐 아니라 집단도 4 · 3의 후유증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을 보여준다. 황상익 교수는, 사실 여부를 떠나 일단‘빨갱이’라고 낙인찍힌 사람을 마치 문둥병환자 대하듯 소외시키고 4 · 3을 방치해온 우리 국민들 또한 병들어 있기는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대선 당시 공약을 살려‘4 · 3특별법’을 하루빨리 제정하는 것이야말로 이 같은 한국사회의 환부를 치료하는 지금길이라는 것이 제주사회의 중론이다.
 
 ‘4 · 3’은 본래 5 · 10단독 선거 반대 등을 구호로 내건 좌익무장대가 제주도안에 있는 경찰지서를 일제히 공격한 48년 4월3일을 뜻한다. 그러나 오늘날 4 · 3은 이날로부터 한라산의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된 54년 9월21일까지 6년6개월 동안 발생한 양민대량 학살을 가리키는 용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당초 토벌대가 파악한 무장대 숫자는 5백만명 안쪽이었다. 그러나 이 5백만명을 토벌하기 위한 작전에서 엄청난 인명이 희생되었다. 사망자수는 8천명에서 8만명까지, 집계하는 기관과 사람에 따라 제각각이다.

 4 · 3이 발발한 이듬해 나온 주한미군사령부 보고서(1949년 4월1일)에는‘지난해 1만4천~1만5천 주민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들 중 최소한 80%가 토벌군에게 사살되었다’고 쓰여 있다. 그러나 기록의 오차나 49년 이후 발생한 사망자를 감안하면 전체희생자 수는 3만명 안팎으로 추산된다는 것이 <제민일보>의 주장이다. 이는 당시 제주도 인구의 8분의 1에 해당하는 숫자이다.

 특히 인명과 재산 피해가 극심했던 이른바‘초토화 작전’(1948년 10월20일~12월31일)시기, 토벌대는 1백30여개에 이르는 중산간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을 무차별 학살했다. 그러나 이 작전의 근거가 된 계엄령이 불법으로 공포된 것이라는 주장이 나와 최근 논란이 일고 있다. 4 · 3발발 50주년을 맞아 아직도 그 후유증을 치유하지 못한 한국 현대사의 피맺힌 상처를 더듬어 본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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