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 만에 밝혀진 ‘의로운 모금’
  • 나권일 기자 ()
  • 승인 1998.06.04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원풍모방 노조, 80년 5월말 광주 항쟁 피해자 돕기 성금 최초로 거둬

5 · 18 광주 항쟁 직후인 5월 말 서울의 ‘원풍모방 노동조합’ 조합원 1천7백여 명이 거액의 성금을 모금했다. 모두 4백70여 만원, 그 돈은 어디에 쓰였을까? 원풍모방 노조의 성금이 비밀리에 광주의 5·18 관련 피해자들에게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이 최근 밝혀졌다. 이같은 사실은 당시 원풍모방 노조 지부장이었던 방용석 의원(국민회의)과 박순회 당시 원풍 노조 부지부장이 <시사저널>에 밝힌 것으로, 정부가 아닌 민간 차원에서 모금한 5·18 최초의 성금이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80년 5월 말, 원풍모방 노조(지부장 방용석)는 4백70여 만원을 모금해 6월 초 비밀리에 가톨릭 광주대교구 윤공희 대주교에게 직접 전달했다. 광주의 ‘광’ 자도 꺼내기 두렵던 시절에 원풍모방 노조가 이만한 성금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은, 노동자들 중 50% 이상이 호남 출신이었고, 조합원들이 선진적인 의식으로 무장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성금 전달한 뒤 극심한 탄압에 시달려
 국민회의 방용석 의원 “광주의 엄청난 사실을 접한 호남 출신 조합원들이 먼저 모금을 시작한 뒤, 상임집행위원 회의를 열어 조합원 전체가 참여하는 모금으로 확대했다. 5·18이 전두환 정권에 맞선 의로운 투쟁이었다는 것을 조합원들에게 알린 뒤 모금했다”라고 밝혔다.

 이 성금은 노조 부지부장이던 박수회씨(52·현 가톨릭노동사목전국협회의회 지도위원)가 직접 광주에 내려와 성홍철 가톨릭노동청년회(JOC) 지도신부가 입회한 가운데 윤공희 대주교에게 전달했으며, 주로 5·18 피해자들의 생계비와 수배자들의 도피 자금, 유족 위로금 등을 사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당시 가톨릭노동청년회에 활동했던 정향자씨(48·광주가톨릭노동상담소장)는 “전달받은 성금을 성홍철 지도신부께 맡기고, 필요할 때마다 상용처를 논의한 뒤 꺼내 썼다. 당시 5·18 유가족 등 피해자들이나 도피 중인 사람들에게 20만원에서 50만원까지 은밀하게 전달했다”라고 말했다. 정씨는 또 “광주 사람들을 폭도로 내모는 절박한 상황에서 거액을 모금한 원풍모방 노동자들에게 항상 고마운 생각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원풍모방 노조는 5·18 성금을 전달한 뒤 공안 당국의 표적이 되어 극심한 탄압에 시달렸다. 특히 방용석 지부장과 박순회 부지부장은 5·18 성금과 관련해 ‘폭도들에게 성금을 전달했다’는 이유로 81년 안기부에 끌려가 심한 고초까지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순회씨는 “81년 2월 서울시 사회과 노동계가 6일 동안이나 노조에 대한 특별 업무 감사를 실시하면서, 공금을 유용해서 성금을 보낸 것이 아니냐고 추궁했다. 윤공희 대주교로부터 받은 확인 영수증을 제시해 위기를 모면하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라고 말했다. 원풍모방 노조는 그 뒤 노동운동 조직을 와해시키려는 계엄사령부 협동수사본부의 탄압을 이겨내지 못한 채 82년9월 무너지고 말았다.

 원풍모방 노조의 이같은 성금 전달 사실은 18년이 지난 지금까지 당시 노동게에서 활동했던 몇몇 사람들만 알고 있었다. 김현체씨(39·전5·18 광주민중항쟁동지회 사무국장)는 “당시로는 엄청난 거액을, 1천7백여 노조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모금한 것은 민중운동사적으로도 중요한 사건이다”라고 말했다.

 박순희씨는 “80년 5월에 가장 많이 피해를 본 계층은 극빈층과 노동자들이다. 원풍모방 노조만해도 5·18 이후 노조 간부가 무더기로 합수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고, 일부는 삼청교육대에까지 끌려가 상상을 초월하는 고초를 겪었다. 5·18 항쟁 당시 노동자들의 활동이 소홀히 평가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라고 말했다.

 한편 5·18 직후 모금한 성금은 공식적으로는 전두환 정권이 ‘광주 사태 피해 수습’ 목적으로 전남도에 전달한 52억원이 전부이며, 항쟁 소식이 알려진 뒤 독일과 미국의 인권 단체에서도 성금이 답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羅權一광주 주재기자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