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바이벌 게임’ 몰린 보험업계
  • 박재권 기자 ()
  • 승인 1998.06.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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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량 해약 사태·‘고금리 상품’ 출혈 경쟁→경영 위기로 존망 갈림길에

 ‘떠나라 낯선 곳으로/그대 하루하루의/낡은 반복으로부터.’ 서울 광화문에 있는 교보 생명 사옥 한쪽 벽면, 고 은의 시 <낯선 곳>에 나오는 멋진 글귀가 행인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이와 함께 교보생명에는 또 하나 화제가 되는 것이 있다. 지난해 당기 순이익이 그것이다. 3월말로 끝나는 97 회계 연도 결산 결과, 국내 33개 생명보험사 가운데 최고(1천31억원)를 기록했다. 자산 규모는 삼성생명의 60%이지만, 당기 순이익은 삼성(6백26억원)을 제치고 1위에 오른 것이다.

 비결이 무엇일까. 교보생명 관계자는 세 가지를 들었다. 첫째는, 연금·교육 보험 같은 중·장기 보장 보험 판매에 주력해 왔다는 점이다. 이것은 경쟁사가 저축성 상품에 주력했다가 대량 해약 사태를 맞은 것과 대비되는 대목이다. 둘째는, 재벌 기업에 소속되어 있지 않아 순익이 새어 나갈 구멍이 없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는 IMF 사태가 닥치 senl에도 인원 정리는커녕 오히려 대졸 사원 6백명을 뽑고, 직원들의 월급과 상여금을 한푼도 줄이지 않아 조직의 안정성이 흐트러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외견상 걱정할 것 하나 없어 보이는 회사이다. 그러나 안을 들여다보면 초조한 빛이 역력하다. 마치 벌거벗고 크레모어 앞에 서 있는 것 같다는 것이 이 회사 관계자의 고백이다. 보험업계가 당면한 위기가 그만큼 심각하다는 얘기다.

 오는 8월붙어 대대적인 구조 조정에 들어가는 보험업계는 바야흐로 존망의 두 갈래 길에 서게 되었다. 그에 앞서서 보험업계에 불길한 전조를 드리우는 것은 IMF 사태가 닥친 후 계속되고 있는 대량 해약 사태이다. 특히 심했던 곳이 삼성생명. 김대중 정권과의 불화설과 삼성자동차 포기 설이 뒤엉켜 하루에도 2백억원이 빠져 나가는 최악의 사태를 경험했다. 이 때문에·고객에게 환급금을 당일에 지급하지 못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업계에서는 ‘삼성생명이 그때 죽었다 살아났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정도이다.

보험사, 해약 늘면 단기적으로는 순익 증가
 대량 해약 사탠느 이제 한풀 꺾인 모습이다. 그러나 불씨가 꺼진 것은 아니다. 올해 1월 이후 해약하거나 효력을 상실해 고객에게 돌려준 돈이 보험사에 들어온 돈보다 많았고, 이같은 흐름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유동성 확보에 비상이 걸리자 보험사들은 16.5% 고금리를 제시하고 은행·증권·투신사와 어깨를 겨루며 고객 유치 경쟁을 벌였다. 또 ‘거치 전환 특약’이라는 제도를 도입해 기존 저금리 상품을 고금리 상품으로 전환해 주기도 했다.

 고금리는 보험사에는 ‘쥐약’이나 마찬가지다. 보험사의 자산 운용 수익률은 10.7%. 그런데 고객에게 16.5%를 주겠다고 약속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한마디로 유동성 확보를 위해 역마진을 감수하겠다는 말밖에 안된다. 보험감독원 문창현 경영분석실장은 “삼성이 3조원, 교보가 1조원 규모의 역마진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보험사들은 지금 속으로 곪아 있다”라고 말했다. 기존 5사(삼성·교보·대한·홍국·제일)와 삼신올스테이트생명보험이 흑자를 기록한 데에 의심의 눈길이 쏠리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보통 보험사의 이익은 세 군데서 나온다. 하나는 사업비를 절감해 얻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객에게 돌아갈 환급금이 줄어들어 생기는 것이다. 예컨대 사망률·교통사고율이 줄면 환급금이 줄어들고, 이것이 보험사 이익으로 잡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고객이 맡긴 돈을 잘 운용해 이익을 얻는다. 보험사가 투자하는 곳은 대출(47.3%)이 가장 많고, 그 다음이 유가증권(25%)·부동산(7.9%)·금전신탁(5.8%)순이다.

 여기서 빠져 있는 것이 해약률과 당기 순이익과의 관계이다. 해약이 늘면 보험사가 손해를 볼 것으로 생각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다. 단기적으로 해약은 보험사의 순익을 증가시키는 구실을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보험 가입자가 중도 해약할 때 불입한 금액을 전부 찾아가는 경우란 거의 없다 당장 돈이 급해서 막대한 손실을 감수하는 것이다. 고객의 손해는 결과적으로 보험사 순익으로 잡힌다. 고객에게 돌려주어야 할 것을 다 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우증권 이승주 연구위원은 “보험사는 감추고 싶어하겠지만, 적정 해약률이라는 개념도 있다”라고 말했다. 적정 비율의 해약은 보험사에 오히려 득이 된다는 것이다.

해약률 일정 수준 넘으면 치명적 타격
 그러나 해약률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보험사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다. 대량 해약→유동성부족→고금리 제시→경영 악화라는 악순환에 빠지기 때문이다.

 울며 겨자 먹기로 다른 금융기관과 고금리 경쟁을 벌이고 있는 보험사들은, 이미 심각한 경영 위기에 봉착해 있다. 보험사의 재무 상태를 파악하는 잣대는 ‘책임 준비금’과 ‘지급 여력’이다. 책임 준비금은 고객들이 일시에 보험금을 돌려달라고 요구했을 때 돌려주기 위해 적립해야 할 금액이고, 지급 여력은 여기에 1%를 가산한 액수이다. 국내 생명보험사 가운데 책임 준비금을 착실히 적립하고, 지급 여력을 갖춘 회사가 과연 몇이나 될까. 생명 보험협회 정 량 홍보과장은 “5대 사 정도에 불과하다”라고 말했다. 삼성·교보·대한·홍국·젱일 생명뿐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5개 업체 관계자들도 안심하지 못하는 것이 지금 상황이다. 33개 보험사 가운데 하나라도 무너지면 전체 보험업계가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일반 고객들은 자기가 어느 회사의 어떤 상품에 가입했는지 구분해서 생각하지 않고, 보험업계 전체를 하나로 뭉뚱그려 보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한 보험사의 부도는 보험업계 전체에 인출 사태를 부를 수도 있다. 갈수록 늘어나는 실업자 문제도 큰 악재이다. 실업이 늘고 봉급이 깎이면 보험 해약이 늘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내우외환에 봉착한 보험업계는 지금 거대한 태풍속으로 빨려들고 있다.
朴在權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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