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리 신화와 ‘식물 국회’
  • 서명숙 취재2부장 직무대행 ()
  • 승인 1998.07.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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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주는 박세리, 고통 주는 정치

 <그녀는 예뻤다>. 가수 박진영이 불러 지난해 크게 히트했던 댄스곡이다. 그 노래에 걸맞는 ‘예쁜 그녀’ 박세리 이야기로 온 나라가 떠들썩 하다. 한 네티즌은 컴퓨터 통신에 ‘박세리의 종아리는 무다리다. 하지만 참 예쁘다’라는 글을 올렸다. 그렇다 그녀는 예쁘다. 근육으로 똘똘 뭉친 그을린 종아리, 탄탄한 허리에서 나오는 힘찬 스윙이 국민에게 자부심과 희망을 던져 주고 있다. 세계 골프사를 새로 써가는 그는 좌절의 시대를 사는 국민에게 유일한 위안인지도 모른다.

 얼마전 정부는 그에게 훈장을 수여하기로 결정했고, 그의 모교는 박세리 기념관을 만들기로 했다. 프로 세계에서의 성취와 그에 따르는 영광은 어디까지나 개인 것이다. 뼈를 깎는 프로의 노력은 인간 한계를 확장하려는 도전 의식에서 비롯하는 것이며, 흘린 땀과 거둔 성취만큼 상금이나 연봉을 받는 것이 프로의 노력은 인간 한계를 확장하려는 도전 의식에서 비롯하는 것이며, 흘린 땀과 거둔 성취만큼 상금이나 연봉을 받는 것이 프로의 세계다. 거기에 애국심이나 국적이 개입할 여지가 별로 없다. 그런 프로 선수에게 정부가 이례적으로 훈장을 수여하기로 한 것도, 그의 도드라진 활약이 실의에 빠진 국민에게 기쁨을 안겨 준 ‘장외 효과’를 높이샀기 때문일 것이다. 세 정당의 대변인도 그의 세 번째 우승과 4라운드 합계 최다 언더파 타이 기록수립이 확정되자 앞 다투어 축하 논평을 내보냈다. 그 내용에는 ‘좌절에 빠진 사람들이 용기를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대목이 들어 있었다.

 정치권의 이런 논평에서 우리는 ‘박세리 현상’이 갖는 정치적 효과를 놓치지 않고 거기에 편승하려는 기민함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그러나 동시에 그 기민함이 본질을 놓치고 있는 현실에 절망을 느끼게 된다. 정치란 본디 무엇인가. 정치는 궁극적으로 국민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 행위라고 규정된다. 따라서 박세리가 수행하는 ‘국민에게 위인과 희망을 주는 역할’은 프로 골퍼인 그에게는 가욋일이며 뜻밖의 역할이지만, 우리 정치권으로서는 핵심적으로 떠 맡아야 할 과제이다. 그런데도 한국 직업 정치인들에게서는 본연의 직업적 책무를 수행하지 못하는 데 대한 자괴감이나 수치심을 눈꼽만큼도 엿볼 수 없다. 그들은 한술 더 떠 박세리에게 그역할을 당연하다는 듯 떠넘기고 뒷전에서 박수나 치는 데 만족하고 있다. 직업 의식과 방향 감각의 완벽한 실종이 아닐 수 없다.

정치 세계에 프로는 없는가
 한국 정치인들의 직업 의식과 방향 감각 상실은 ‘국회 없는 국회’ 상태가 두 달 가까이 계속되는 현실에서 극명하게 입증되고 있다. 여·야 모두 그때그때마다 이런저런 이유를 내세워 국회를 오랫동안 방치하고 있다. 직업적 관점으로 따지자면 명백한 사보타지(태업)이다. 지금 국회에 계류되어 있는 법안은 무려 2백65건에 달하고, 정부가 기업과 은행등의 구조 조정을 위해 개정 또는 신설해야 할 법안만 30여개에 이른다. 국회 공백은 입법 활동에만 그치지 않는다. 동해안에 간첩이 들어와도, 홈리스들이 거리에 넘쳐나도, 노동계가 노사정위원회를 탈퇴해도, 사정 소식으로 온 나라가 뒤숭숭해도 국회는 꿈쩍할 생각도 하지 않는다.

 여의도를 비운 선량들은 7·21 재·보궐 선거 현장을 누비거나, 정치권의 역할을 떠맡아 준 박세리를 대신해서 골프장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재·보궐 선거전에서 제아무리 목이 쉬게 외쳐도, 국민은 그 꼼수를 다 알고 있다. 여당은 여대야소로 뒤집은 뒤에 여당 국회의장을 만들려고 시간을 끌고 있으며, 야당 정치인들의 관심은 이미 당내 당권 싸움에 가 있다는 것을. 그래서 유권자들은 새벽 잠을 설치고 골프 경기를 보면서도, 정치권만 몸이 단 재·보궐 선거를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다.

 얼마 전 5개 은행 퇴출 때 일부 은행에서 퇴직금 변칙 처리라는 볼썽 사나운 일이 벌어지자, 정치권 역시 땅에 떨어진 직업 윤리를 개탄하고 나섰다. 그러나 한국 정치인들은 은행원의 직업 의식을 바판할 자격도, 박세리의 선전에 박수를 칠 자격도 없다. 대체 한국 정치인들은 언제까지나 박세리나 박찬호에게 정치인 본연의 역할을 떠넘긴 채 뒷짐을 지고 있을 것인가. 또 국민에게 행복은커녕 고통만 주는 존재라는 오명을 언제나 면할 것인가. 정치 세게에서도 프로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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