뚫린 하늘, 꽉 막힌 재난 구호
  • 정희상 기자 (hschung@sisapress.com)
  • 승인 1998.08.20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부 수해 재발 방지 약속 헛말/국가 구난 체계 구축 시급

하늘이 해도해도 너무 한다. 온 국민이 경제난에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이번에는 하늘마저 뚫렸다. 수도권에 이어 전국을 강타하고 있는 수재는 신기록 행진까지 벌이고 있다. 기상 관측 사상 최고치라는 전국 각지의 강우량과 막대한 인명·재산 피해는 그 통계의 끝이 어디일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어디까지나 ‘지금 이 시각 상황’일 수밖에 없는, 중앙재해대책본부가 집계한 인명·재산 피해 실태(8월5~9일)는 10일 현재 사망·실종 2백29명, 가옥 침수 4만4천여 채, 농경지 침수 4만6천여 ㏊이다. 또 주택 1천61채와 도로 7백79곳 98㎞, 하천 3백90곳 76㎞, 수리 시설 1백59개 등 2천4백70개 시설이 파손 또는 유실되었다. 이재민 숫자가 12만명을 넘어섰고, 산사태에 휩쓸린 묘지도 경기도 고양·파주·양주 지역에서만 1천75기에 이른 것으로 집계되었다.

 중앙재해대책본부는 현재 잠정 집계된 재산 피해액이 천억여 원대에 이르지만 정확한 피해 조사가 끝나면 2조원 대를 넘어설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피해가 이 정도 선에서 그친다 하더라도 이번 수재는 역사상 최대의 자연 재해로 기록되겠지만, 문제는 여전히 수마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서울·경기·충청·강원 지역 주민들은 재기할 기운을 차릴 여유조차 없이 망연자실한 채 하늘만 쳐다보고 있다.

 그러나 불가항력적인 상황이라 해서 하늘만 탓할 수는 없다. 인간이 보인 허점도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과학적 예측이 어려운 게릴라성 폭우라 할지라도 번번이 예측을 벗어나거나 속수 무책이 된 기상 예보 체제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정부는 96년 임진강 대홍수 직후 기상 예보 체제 선진화를 국민에게 약속하고도 이를 어겼다. 당시 정부는 강우량 측정용 레이더 및 기상 슈퍼 컴퓨터를 도입하고, 미국 지구물리유체역학연구소의 풍수해 수치 모델과 ‘특이 기상 예고제’를 도입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예산 타령만 하다가 오늘에 이르렀다.

겉치레 수방 대책…예산 타령만
 또 이번 수재로 하천들이 범람해 큰 침수 피해를 낸 서울 일부와 경기 북부 지역 상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행정 당국의 겉치레 수방 대책도 피해를 키우는 데 한몫을 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집중 폭우 기간 내내 집중 조명을 받은 서울의 중랑천에는 서울 시내 곳곳에 89개나 설치된 빗물 펌프장이 단 한 곳도 없다. 서울시측은 중랑천을 낀 도봉·노원·강북구 일대가 서울 전역의 평균 높이보다 지대가 높아 침수된 사례가 없었기 때문에 그동안 빗물 펌프장을 설치할 필요를 못 느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번 수재로 중랑천이 상류 지역의 강우량에 따라 범람할 수 있는 지역이라는 사실이 입증되자 앞으로 대책 마련 지역에 포함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주먹구구식 행정조차 무색해진 곳은 경기 북부 지역이다. 이번 수재로 막대한 피해를 본 파주·문산·연천·동두천 지역은 2년 전에 똑같은 물난리를 겪었던 곳이다. 당시 경기도는 이 지역 수해 피해 사례를 모아 <수해 백서>를 발간하고 ‘더 이상 경기 북부에 똑같은 수재가 없도록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장담했다. 당시 범람했던 경기 북부의 각종 하천을 준설하고 배수 펌프장을 설치하겠다는 것이었다. 96년 수해 당시 70% 선이었던 경기 북부 문산천·갈곡천·곡릉천·탄천 등의 제방 축조도 100% 완료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번에 범람한 하천들은 바로 2년 전에 언급한 그 하천들이었고, 제방 축조율은 여전히 70% 선에 머물러 있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마저 외면한 당국의 무신경이 똑같은 수마를 불러들인 셈이다. 이에 대해 경기도 재해대책본부의 한 관계자는 “각종 수해 방지 시설을 설치하기 위한 계획은 잡아 놓았지만 IMF 시대라서 예산을 배정하지 못해 정비가 늦어지고 있다”라고 변명했다.

 물론 선진적 기상 예보 및 수방 체제 정비에 투자를 해 왔더라도, 이번처럼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게릴라성 집중 폭우가 쏟아진다면 완전한 방재 기능을 다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천재지변이라 할지라도 재난 지역 주민들을 긴급 피난시키고 구호 활동을 제대로 하면 피해는 얼마든지 줄일 수 있다.

 그런데 이번에 광범위한 지역에서 일시에 대규모 수재가 발생하자 국가 재난 구호 체계 전반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이 드러났다. 현행 재난 관리법은 자연 재해가 발생하면 현지 시장·군수가 지휘 책임자가 되어 공무원·군부대·119 구조대 등 구조·구난 요원들을 지휘 통제하고, 시장·군수→도지사→행정자치부(재해대책본부) 순서로 보고하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이번 수해는 현지의 피해 규모가 너무 커서 시·군 당국의 힘만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강화도와 경기 북부 지역의 경우 집중 폭우 초기에 구난·구조 체계가 일시에 마비될 정도로 가공할 수재가 발생했지만 중앙재해대책본부는 불통인 현지 전화만 붙잡고 발을 동동 굴렀다. 재해 규모에 따른 중앙과 지방 행정 당국 사이의 효율적 재난 지휘·지원 체계를 마련하지 못해서 생긴 일이다. 이 때문에 신속한 구조와 지원이 절실한 수해 현장 곳곳의 이재민들은 심지어 사나흘씩 고립된 채 필사적으로 목숨을 부지한 경우도 있었다.

 특히 독자적인 재난 구호 및 수해 복구 경험이 없는 대부분의 지방자치단체는 집중 폭우 초기에 이재민 숫자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그나마 위험 지역 주민을 신속히 대피시킨 서울 지역의 경우도 정신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중랑천 범람에 대비해 재난 대피소인 인근 지역 초등학교에 주민 수천명을 대피시키기는 했지만 정작 마실 물조차 준비하지 못해 이재민들을 두 번 울리기도 했다.

선진 구난 체계 도입은 언제쯤…
 한국의 긴급 재난 구호 체계가 안고 있는 이런 문제점은 미국의 경우와 극명히 대비된다. 미국도 1차적 재난 구호 책임은 현지 지방행정기관에 있지만, 지방 정부가 감당하기 힘든 큰 재해는 즉각 주 정부를 통해 대통령에게까지 보고가 올라간다. 주지사는 주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대통령은 ‘재해 구조 및 긴급 지원법’에 따라 재해 직후 신속히 비상사태를 선포해 연방 차원에서 긴급 지원반을 파견한다. 이런 대규모 재해에 대해 종합 재난 관리를 담당하는 곳은 대통령 직속 기구인 연방비상 관리청(FEMA)이다. 이 기구는 단순히 지방에서 올라오는 통계를 집계하고 구호 물품을 보내 주는 우리의 재해대책본부와는 성격이 다르다. 교통·통신·정보·의료·수색 및 구조 등 12개의 중앙 긴급지원반을 편성하고 재난이 발생하면 현지에 급파해 사태를 장악한다.

 이에 반해 한국은 재난 관련 개별법에 따라 소관 부처 별로 책임과 권한이 분산되어 효율적 구난·구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작 큰 문제는, 지난 수년 동안 대규모 천재와 인재를 겪으면서 정부가 국가 전체적 종합 재난 관리 체계 확립이 절실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아직까지 실천을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성수대교 및 삼풍 백화점 붕괴 참사, 대구 지하철 가스 폭발 사고, 경기 북부 수해 등을 겪고 나서 김영삼 정부는 종합적 재난 예방 및 구호 활동을 담당할 대통령 직속 기구로 ‘안전관리청’을 신설하겠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95년 2월 고베 대지진 때는 일본의 긴급 재난 구호 체계를 배워 온다는 뜻으로 정부 관계 부처 합동 조사반을 파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이 국민의 세금을 들여 무엇을 배워 왔는지, 또 안전관리청 얘기는 어디로 갔는지 오리 무중이다.

 이번 수재의 경우 경제난 와중에서 일어났다는 점 때문에 중앙 정부의 신속한 개입은 더욱 긴요했다. 수마가 할퀴고 간 대부분의 시·군 지역은 피해 규모가 워낙 커서 지역내 민간 구호품 지원은 거의 불가능한 실정이다. 그나마 수해 피해가 적은 지역에서도 경제난 탓에 구호품과 도움의 손길이 전례 없이 적게 나오는 실정이다.

 지난 10여 년간 한국의 자연 재해 피해는, 인명 피해가 연평균 3백50여 명으로 일본에 비해 인구 대비 3.5배를 넘어서고 있다. 재산 피해는 연평균 4천억원대에 달한다. 그러나 요란한 재해 방지 구호는 매번 그때뿐이었다. 재난 방지 안전 비용 투자를 외면해 오다 이번에 또 수백명의 인명 피해와 2조원 대의 재산 피해라는 크나큰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